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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진탕(陳湯): 2천년전의 참수공격 (I)

by 중은우시 2008. 11. 17.

작자: 미상

 

자고이래로, 중국전통유가문화의 눈으로 보면 전쟁은 폭력의 대명사이다. "적을 1만 죽이려면, 스스로도 3천은 잃게 된다" 전쟁의 파괴성을 과장하여 2쳔년이래로 중문억무(重文抑武)의 정책을 써왔다. 그리하여 상무정신은 날로 희미해지고, 일반대중들이 군사역사에 대하여 아주 낯설게 여겨지게 되었다. 2003년, 미국은 사담 후세인을 참수하려는 참수공격을 진행할 때, 많은 중국인들의 첫번째 반응은 전쟁을 이렇게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백만군중에 대장의 수급을 베는" 작전방식은 미국이 처음 개발한 것이 아니다. 일찌기 이천년전에, 이미 한 중국장군이 전쟁에서 운용하여 실천한 바 있고, 일거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통하여 한나라의 위엄을 서부에 떨쳤다. 명성이 그다지 높지 않은 이 인물은 바로 중국군사상 한번의 전투로 이름을 날린 일대명장 진탕이다.

 

사신살해

 

서한(西漢)의 전반기는 거의 사방에서 포연이 낭자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의 포화속을 뚫고 나왔다. 한원제의 즉위(기원전49년)때, 유씨조상들은 이미 싸울만한 싸움은 거의 다 싸웠다. 위청, 곽거병, 조국충(趙國充)등의 명장들의 휘황하고 전쟁터를 누비던 시대는 점차 멀어져 갔다. "도광검영을 암담해지고, 고각쟁명은 멀어져갔다" 한나라의 왕도와 패도를 겸용하던 정치방침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유가학설의 여러가지 치국방안 즉, 감형관정, 여민쟁리를 하지 않는 것등의 관대한 정책이 실행되었다.

 

안으로 반란이 없고, 밖으로는 우환이 없어 사해가 평화로운 가운데, 돌연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대한조정이 서역으로  흉노선우의 인질 구우리(駒于利)를 호송한 위사마 곡길(谷吉)등이 임무완성후 인질의 부친인 지지선우(至單于)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소식이 들려오자, 조야는 진동을 했다. 지지선우는 한나라에 투항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 한나라의 사신을 죽여버린단 말인가?

 

그 연유는 역시 흉노쪽에서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일찌기 일세를 풍미했던 흉노칸국은 한나라와여 여러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패배한 후 원기를 크게 상하고 내외로 곤란이 겹쳐서,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기원전60년 다시 "다섯 선우가 서로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모돈선우(冒頓單于)의 후손들이 서로 공격하였던 것이다. 죽은자가 수만이 되었고, 가축도 열에 여덟, 아홉은 죽었다. 인민들은 기아에 빠지고, 서로 불을 태워 먹거리를 구했다. 그리하여 크게 혼란스러워졌다. 6년후,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와 지지선우의 양강이 싸워, 양패구상한다. 쌍방은 전략적 우세를 점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일찌기 숙적이었던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친다. 심지어 "아들을 한나라조정에 인질로 보내기"까지 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한나라의 지지를 받고자 한 것이다. 이 두 흉노선우에 대하여 한나라조정은 '균등하게 대우'하는 동시에, 균형전략을 취한다. 지지선우에게 패배한 호한야선우는 지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 두번에 걸쳐 단신으로 한나라의 조정을 찾아와서 배알한다. 한다나조정은 풍성하게 하사품을 내렸을 뿐아니라, 병사를 파견하여 귀국길을 호송해 주었고, 그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남흉노부한(南匈奴附漢)"이다.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투항하는 동시에, 그의 숙적인 지지선우는 호한야 선우가 이미 한나라에 투항하고 병력이 약해서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회를 틈타 병사를 일으켜 호한야의 지역을 집어삼키고자 하였다. 한나라가 병사를 보내어 호한야를 호송하여 대막의 실지를 수복하게 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지지선우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한나라가 호한야를 도와주고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ㄱ하고, 그리하여 한나라사신을 모욕하고 서역으로 진군한다. 오손을 격파하고, 오게, 견곤, 정령의 소국 3개를 합병한다. 그리고 수도를 견곤(堅昆, 지금의 러시아경내인 예니세이강 상류일대)에 두고, 주변을 통치한다. 비록 이러했지만, 그는 스스로의 병력으로는 한나라를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한나라에 대하여 공공연히 대항을 하지는 않았다. 기원전44년 다시 사신을 보내어 한나라조정에 조공을 바치고, "내부(內附)를 원한다"고 하면서 인질로 보낸 아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한나라조정은 비교적 신중했다. 비록 황제는 위사마 곡길을 보내어 지지선우의 인질인 아들을 귀국시키기로 결정했지만, 조정대신들은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지지선우가 진심으로 귀부한 것이 아니므로, 인질을 새외로 내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당사자인 곡길은 달랐다. 그냥 새외로 내보내며리면 이것은 더 이상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겠다는 것이므로 "이전의 은혜를 잊고, 나중에 원한으로 남을 것"을 우려했고, 상대방이 귀부하지 않을 핑계거리를 제공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선우의 왕정까지 호송하는 것이 좋고, 그가 귀부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한나라는 강대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혹시 지지선우가 감히 한나라의 뜻에 어긋난 짓을 하여, 한나라사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기면 이는 한나라에 죄를 짓게 되므로, 한나라의 국경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신 하나의 희생으로 변경의 여러해동안의 안정을 얻어내면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한원제는 결국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불행한 것은 곡길의 그 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천리먼길을 가서 지지선우의 아들을 호송해주었지만, 지지선우는 마음을 뒤집고, 안면을 바꾸었다. 곡길등을 죽여서 원한을 풀었다.

 

두 나라의 다툼은 그때까지는 사신을 죽이는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었다. 말끝마다 한나라에 귀부하겠다고 한 흉노의 선우가 감히 말을 뒤집고, 한나라사신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외교적 도전이고, 적나라한 적대행위이다. 지지선우의 한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이번 행동으로 한나라에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의 숙적인 호한야 선우는 한나라의 지원하에 실력이 날로 증가되었다. 만일 계속 견곤이 머무르고 있다가는, 아마도 한나라 남흉노 양쪽의 협공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어떡할 것인가?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이다.

 

어디로 도망칠 것인가? 한나라에서 멀면 멀수록 좋다. 기원전44년, 마침 서쪽의 강거(康居, 서역의 나라이름, 지금의 신강북쪽에서 러시아령 중앙아시아까지)가 와서 구원을 청한다. 북흉노와 연합하여 오손(烏孫, 서역의 국명,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이사이크호수 동남쪽)을 치자고 한다. 이 좋은 기회를 틈타, 지지선우는 북흉노를 이끌고 강거의 동부에 거주한다. 한나라의 추격병이 올 것을 우려하여 그는 계속 도망쳤고, 그의 부족은 도중에 얼어죽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겨우 3천여명이었다. 그리하여 실력이 크게 감쇄된다. 다만, 강거에 도착하자, 한나라와 국경이 멀어지게 되어, 지지선우는 즉시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는 용맹하고 호전적이다. 여러번 오손을 격퇴하고, 심지어 수도인 적곡성의 아래까지 쳐들어가고,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다. 일시에 서역지역을 횡행하게 된다. 한나라는 세번에 걸쳐 사신을 강거에 보내어 사신 곡길등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돌려주지 않을 뿐아니라, 놀리기까지 한다: 이곳은 살기가 좋지 않다. 너희 대한왕조에 의탁하려고 하는 참이다. 나는 준비가 끝나는대로 아들을 다시 인질로 보내겠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대항한 것은 지지선우에게는 두 가지 호신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지리상의 거래우세였다. 강거는 한나라와 만리나 떨어져 있다. 이것은 많은 부하들을 동사시켜가면서 얻은 곳이다. 한나라가 이렇게 멀리까지 원정할 용기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흉노유목민족의 빠른 기동력이다. 흉노와 같은 북방유목민족은 목축업을 위주로 하므로 매일 말을 타고 가축을 기른다. 말타는 기술이 아주 뛰어나다. 전투중에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서, 화살처럼 맹렬하게 공격한다. 진공이 실패하면 재빠르게 후퇴한다. 오고가는 것이 바람과 같이 빠르고,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 기동성의 우세는 중원농경문화하에서 자란 서한의 장병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저명한 한나라신하인 조착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바 있다: "흉노는 풍우에도 버티고 기갈에도 버틴다. 중국의 사람들과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전체 중국고대사를 살펴보면, 유목민족의 생래적인 천연적인 기동성은 중원왕조의 머리위에 드리운 다모클레스의 검이다. 한나라때는 흉노가, 당나라때는 돌궐이, 송나라때는 요,금이 있었다. 한나라-흉노의 전쟁은 천년이후, 몽골이라는 북방유목민족이 다시금 굴기하여, 그들이 막북초원에서 일어서서, 중국의 전체를 차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칼끝은 서로 북으로 향했다. 서로는 호라즘(화랄자모)을 정복하고, 러시아를 평정했으며 한꺼번에 유라시아대륙을 휩쓸었다. 유럽의 다뉴브강에까지 이르렀으니 유목민족의 기동성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북흉노는 천연적인 기동성우세를 가지고, 멀리 한나라의 대군이 동원을 완성하고, 서역에 진입할 때, 지지선우는 비록 승리할 자신은 없지만, 도망칠 여력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지선우의 마음 속에는 강거와 한나라는 각각 천하의 한쪽 끝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한나라가 군사적으로 자신들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사신을 보내서 평화협상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전쟁터에서 가져오지 못한 것은, 협상탁자에서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인정해야 할 것은 지지선우의 이런 생각은 확실히 정확했다. 다만 그는 한 가지를 놓쳤다. 일찌기 장군들이 운집한 대한왕조에 다시 일대명장이 나타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교령유위(矯令有威)

 

 일대명장 진탕은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다. 그는 위청, 곽거병과 같은 귀족장군도 아니고, 이광, 이릉과 같은 군인세가를 뒷배경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산양 하구(지금의 산동 연주 북쪽)의 보통평민으로 태어났다. 조상은 아무런 관직도 그에게 물려주지 못했고, 그는 자기의 노력과 용기를 가지고 헤쳐나가야 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진탕은 어려서 책읽기를 좋아했고, 박학다식했으며 글을 잘 섰다. 집이 가난하여 사방에서 돈을 빌렸고, 가끔 빌린 돈을 갚지 못했다. 그리하여 동네사람들이 모두 그를 멸시했다.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와서 관직을 얻고자 할 때, 부평후 장발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한원제 초원2년(기원전47년)에 무재(茂才)로 추천받는다.

 

그러나, 관직에 임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돌연 진탕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다. 관리가 되고 싶었던 그는 관례에 따라 고향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그를 불효하다고 고발한다. 사례소에서 조사함에 따라 감옥에도 잠시 갇힌다. 겨우겨우 다른 사람이 보증을 서서 풀려난다. 그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서, 나중에 낭관으로 추천받는다. 그러나 고생을 겪을대로 겪은 진탕은 이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한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낭관이 되는 것은 막 관료사회에 진입한 것을 의미할 뿐, 반드시 승진될 것이라는 보증은 없었다. 출신이 비천한 그로서는 운명을 뒤바꿀 유일한 방법은 바로 변방에서 공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진탕은 여러번 적극적으로 사신으로 변방을 나가겠다고 요청한다. 기원전 36년(건소3년)에 그는 마침내 서역도호부 부교위로 임명된다. 서역도호인 감연수(甘延壽)와 함께 서역에 사신으로 간다. 관료로서 순탄치 못했던 그는 마침내 공을 세울 기회를 얻은 것이다.

 

여기서 설명하여야 할 것은, 기원전 42년에서 기원전 36년까지 한왕조는 곡길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를 가지고 외교수단으로 교섭하는 외에 전쟁을 하려는 결의는 보이지 않았다. 감연수, 진탕이 받은 임무는 서역도호부가 정상적으로 방어업무를 다하라는 것이고, 그들이 이끄는 것은 그저 호위군대였지, 대한왕조의 서역정벌군이 아니었다.

 

지리를 모르는 자는 장군이 될 수 없다. 서역도호부 소재지로 가는 길에서 매번 성읍, 산천을 지날 때마다 진탕은 높은 곳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았고, 지형을 관찰했다. 목적지인 오루성(烏壘城, 지금의 신강 쿠얼러와 룬타이의 사이)에 도착한 후, 감연수, 진탕의 두 사람은 북흉노에 관한 1차적 정보를 얻는다. 지지선우는 이미 강거에서 자리를 잡았고, 오손을 몰아낸 공으로, 날로 교만해지고 있으며, 기세가 날로 커지고 있다. 기회를 틈타서 강거국왕의 딸과 귀족, 백성 수백명을 죽였다; 그리고 강거국 사람들을 압박하여 선우성을 쌓게 만들었고,매일 500여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2년내에 완성했다; 그리고 대완(서역의 도시국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카칸사이)등 나라를 공갈협박해서, 매년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그들의 통제범위는 천리나 되었고,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알고난 후, 진탕은 국면이 낙관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지지선우는 강거로 도망친 후 한나라의 변경에는 비록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선제이래로 확립된 서역질서는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지선우의 폭력에 저항할 힘이 없는 서역제국은 모두 눈을 한나라조정에 향하고 있다: 만일 곡길의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만일 북흉노가 서부에서 계속 세력확장을 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다면, 도대체 한나라를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지선우에 투항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보면, 한나라가 서역에서 철혈도병으로 고생스럽게 쌓아온 위망에 의문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탕은 깊은 우려를 가졌고, 마음 속으로 전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진다; 지지선우와의 전투는 조만간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느니, 선제공격을 해서 제압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옛날 이사장군 이광리도 처음에 대완을 정벌할 때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도 참패한 후에 귀환했다. 병사는 열에 한둘만 남았다. 지금 진탕, 감연수 두 사람의 수하에 있는 병력으로는 지지선우를 토벌하기에는 확실히 힘이 모자랐다. 현재의 계책으로는, 서한과 서역의 제도우세를 발휘하게 하여, 둔전,술방의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래야 일격에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다만 반드시 상사인 감연수의 동의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진탕이라는 막 서역도호부 부교위로 부임한 젊은이는 감연수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한다: "지지선우는 흉맹하고 호전적이다. 강거와 결탁하여, 게속 이웃나라를 침략한다. 목적은 오손, 대완을 집어삼키는 것이다. 만일 두 나라가 정복되면, 몇년내에 서역의 모든 왕국이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지지선우는 반드시 서역의 우환이 될 것이다. 현재 아직 힘이 강해지지 않았을 때를 틈나, 우리가 변경의 둔전사병을 동원하고, 서역각국의 인마를 합하여 일거에 진공하여 그들 성아래로 몰고가는 것이 좋겠다. 지지선우는 도망칠 곳이 없을테니 우리 둘은 하룻만에 천고의 공로를 세우는 것이 된다" 이 말 속에 이해득실 전략전술이 모두 명확히 언급되어 있다. 사서에서 진탕이 '용기가 있고 생각이 깊다. 책략이 많고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했다"라고 한 것이 이해된다.

 

이에 대하여 감연수도 맞다고 동의한다. 다만 관서에서 오래 머문 노병으로서 그는 자신이 조정에서 서역에 보낸 일선관리이지, 대외작전을 결정할 권력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것은 반드시 조정에 주청을 드려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진탕은 전투기회는 순식간에 변하므로 시기를 놓칠 수 없다고 보았다. 중앙은 멀리 떨어져 있어, 적의 상황을 잘 모르므로, 조정에서 논의하면 정확하지 않은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반드시 과감하게 일처리를 해야 하므로 먼저 일을 벌인 후에 나중에 보고하자고 하였다. 감연수는 자기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서 망설였다. 주사령관이 결정을 하지 않는 상황하에서, 부사령관인 자신이 아무리 전쟁계획을 완벽하게 짜더라도 그것은 탁상공론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교묘하게도, 하늘은 진탕에게 한번의 기회를 준다: 감연수가 돌연 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병이 오래갔다. 주사령관이 병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으므로, 진탕은 부교위로서 그의 직무를 대리했다. 역사는 사실로 증명한다. 그는 이 기회를 충분히 이용한다. 그는 서역도호부의 명의로 거짓 한나라조정의 성지를 만들어, 거사(車師, 지금의 신강 투루판지역)에 있던 둔전한군을 소집하고, 서역제국에 징집령을 내린다. 지지선우를 토벌한다는 말을 듣자, 15개 서역국가가 모두 병사를 보내어 지원한다. 그중에는 지지선우로부터 여러번 공격을 받았던 오손도 포함되어 있다.

 

대군이 모여서, 출병을 준비할 때, 병석에 누워있던 감연수가 소식을 듣는다. 그는 바로 병상에서 놀랍게도 벌떡 일어나 이번 작전을 저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성지를 조작하여 병사를 일으킨 진탕에게 있어서, 이번에 한나라와 서역제국이 연합으로 만든 '다국적부대'는 이미 다 모여있었고, 화살은 한번 쏘면 되돌릴 수가 없다. 이미 퇴로가 없었던 것이다. 중요한 순간이므로, 진탕은 화를 벌컥 내며, 손에 검을 들고 감연수에게 경고한다: 대군이 이미 모였다. 당신이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느냐?" 비록 사서에는 감연수가 용감하고 힘이 있는 대역사라고 되어 있지만, 이때는 그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그는 진탕의 전차를 탄다.

 

감연수, 진탕이 협력하여, 한편으로 사람을 장안에 보내어 황제에게 스스로 조서를 위조한 죄를 탄핵하고, 동시에 병사를 일으킨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호한연합군으로 이루어진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출발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의 여러해동안 움직이지 않던 군사기제는 진탕이라는 무명의 인물에 의하여 다시 발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