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진탕(陳湯): 2천년전의 참수공격 (II)

by 중은우시 2008. 11. 18.

 

삼천리기습

 

진탕이 조서를 위조하여 출병하였으므로, 후세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도박꾼'으로 본다. 사실 군사행동은 그 자체가 하이리스크이다. 관건은 리스크를 가치와 어떻게 균형맞추느냐에 있다. 군사학적인 각도에서 본다면, 진탕의 모험은 충분히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첫째,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강거는 한나라에서 원거리에 있다는 지리적인 우세가 있었다. 일찌기 지지선우는 이러한 천연적인 우세를 믿고 덤볐다. 다만 진탕이 조서를 위조하여 병사를 일으킨 돌격정책의 앞에는 그러한 우세가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루에서 강거까지의 거리는 장안에서 강거까지의 거리를 졸지에 절반으로 줄여버렸다. 그리하여 빠르게 북흉노를 기습할 가능성이 있게 된다. 작전성공의 확률도 많이 올려놓았다.

 

둘째, 전쟁시기를 잘 잡았다. <<손자병법.계편>>에는 '상대방이 대비하지 못하 때 공격하여, 그가 생각하지 못했을 때 친다. 이것이 병가에서 승리하는 길이다. 주도권을 잃어서는 안된다." 진탕의 원거리 기습의 최대의 승산은 바로 지지선우가 한나라가 만리 먼 곳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는데 있었다(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적시에 이 시기를 장악하여 상대방이 방비하지 않는 심리상의 소솔을 틈타서 병사를 직접 성아래까지 밀고 들어가면, 북흉노 유목민족의 기동성 우세도 발휘할 기회가 없게 된다. 아마도 지지선우는 도망칠 기회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셋째, 인화. 진탕이 조서를 위조하여 병사를 일으킬 때 모은 것은 다국적군대 혹은 둔전한군이다. 혹은 서역제국의 병마이다. 그들은 원정지리와 북흉노의 작전에 대하여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두 중원지역에서 데려오는 한나라군대보다는 훨씬 낫다.

 

동시에, 사방에서 모여든 한호연합군은 적군에 비하여 수량에서의 우세를 점할 뿐아니라, 한나라가 인근 제국과 연합하여 불의한 지지선우를 공격한다는 여론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병력을 일으키는데 명분이 충분한 것이다. 이런 요소들의 배후에는 서한시대의 성공적인 둔전제도와 서역도호제도가 있다. 그들은 한군의 원정에 가장 좋은 병력을 제공해준다. 진탕은 최대한도로 자신의 제도우세를 이용했고, 평화와 전쟁의 결합, 가까운데서 병사를 모으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지지선우가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다.

 

기원전36년 겨울, 지지선우가 한나라사신을 죽이고 강거로 숨어버린 8년이 지난 해였다. 대한왕조의 서역도호, 기도위 감연수, 부교위 진탕은 4만의 한호연합군을 이끌고 강거로 진격한다. 대군은 6로로 나누었는데, 그중 3로는 남도(타림분지 남쪽 경계)를 따라 파미르고원(총령)을 넘어 대완왕국을 지나간다; 또 다른 삼로는 북도(타림분지 북쪽 경계)를 따라 오손왕국이 수도 적곡성을 지나, 오손왕국을 횡단한 후 강거왕국의 변경까지 들어가서, 전지(지금의 중앙아시아 이사이크호수)의 서안으로 진격한다. 연도에 적군의 약탈부대를 궤멸시켜, 놀란 소국을 안정시키고, 적군의 허실을 정탐한다. 강거국의 국경동부로 들어간 후, 진탕은 아주 성숙한 전시정치경험을 드러낸다: 명을 내려 기율을 엄수하도록 하고, 불태우거나 죽이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리고 현지의 강거수령과 술을 마시면서 연맹을 맺어 둔다. 현지의 강거사람들도 지지선우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그리하여 성내의 흉노인들의 실정을 진탕에게 알려준다. 강거의 길잡이의 인도하에 한호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선우의 성에서 30여리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한다.

 

진탕의 다국적부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눈아래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지지선우는 여전히 꿈속을 헤메고 있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신없어했다. 이전의 교활함과 강경함과는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대군이 국경을 밀고 들어오자, 그는 사신을 보내어 물었다: "한나라군대가 이곳에는 뭐하러 왔는가?" 한나라군대의 대답이 아주 재미있었다: "선우께서는 이전에 글을 올려, 강한 한나라에 귀순하고, 스스로 천자를 배알하겠다고 하였다. 천자께서는 선우가 대국을 버리고 강거에 은거해 있는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여 도호장군으로 하여금 맞이하게 한 것이다." 쌍방은 이렇게 묻고 대답하면서 여러통의 외교사령을 교환했다. 최종적으로 한나라측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후통첩을 보낸다. "우리는 먼 곳을 왔다. 말도 피곤하고 사람도 피로하다. 양식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귀 선우와 대신들에게 빨리 결정하라고 해라" 전쟁의 화약냄새는 드디어 공기 속으로 퍼져갔다.

 

전쟁의 막이 정식으로 열렸다. 연합군은 도뢰수(지금의 카자흐스탄 타라스강)가로 공격했고, 3리쯤 떨어진 곳에 진세를 굳힌다. 선우성위에 오색깃발이 바람이 날리고 있었다. 수백명이 갑옷을 입고 성위를 경비했다. 백여명의 기병은 성아래에서 오가고 있었다. 성문입구에는 백여명의 보병이 어린진을 구축했다. 훈련을 통하여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성위의 수비군은 연합군에게 큰 소리로 도전했다: "자신있는 놈은 나서라." 지지선우의 이런 허장성세에 대하여 감연수, 진탕이지휘하는 한호연합군은 그저 진세를 굳히고 기다렸다. 침묵으로 응대했다. 백여명의 흉노기병이 한나라병영으로 쳐들어오자, 한나라군영의 병사들은 화살을 쏘아서 격퇴시켰다. 이후 한나라군대의 강궁부대가 나서서 성문바깥에서 훈련하는 흉노의 보병, 기병에게 쏘았다. 그들은 즉시 놀라서 성안으로 철수하고, 성문을 걸어잠궜다.

 

적이 겁을 먹은 것을 보고는 감연수, 진탕은 총공격령을 내린다. 대지를 뒤흔드는 전고의 소리를 들으며 연합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화살은 비오듯이 성루로 쏟아졌다. 선우성은 토성이었다. 바깥에 두 층의 견고한 목성이 있다. 흉노인들은 완강하게 저항했고, 목성의 안에서 밖으로 화살을 쏘아댔다. 연합군과 격렬하게 서로 화살을 쏘아댔다. 이때, 지지선우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싸웠다. 전신에 갑옷을 입고 친히 성루에 올라가서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수십명의 처첩도 모두 활을 들고 반격했고,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4만대 3천의 전쟁에서 우세는 금방 갈렸다. 선우가 친히 나섰지만, 전투에 전환점을 마련해주지는 못했다 .연합군의 화살이 비처럼 내리는 가운데 홍노수비군은 점점 약해졌다.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지지선우는 화살에 코를 정통으로 맞았다.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성내로 되돌아갔다. 그의 처첩중 여러 명도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목성의 흉노수비군은 궤멸했다. 연합군은 그 기회를 틈타서 불을 질렀다. 밤이 되자, 수백기의 흉노가 불을 견디지 못하고 어둠을 틈타서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다. 그러나, 비오듯 쏟아시는 화살이 모두 섬멸되었다. 한밤중이 지나고, 목성은 모조리 무너졌다. 흉노 수비군은 토성으로 물러가서 사수했다. 연합군은 성을 격파할 시기가 도래한 것을 보고는 더욱 격렬히 공격했다. 바로 이때, 1만여명의 강거기병이 돌연 전쟁터에 나타난다. 그들은 10여대로 나누었는데, 매대는 천여명이었다.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성위의 흉노수비군과 서로 호응했다. 한나라군대에 대하여 반포위태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어둠을 틈타 연합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양면에서 적을 맞이한 연합군은 공격과 방어가 질서있었고, 강거기병의 여러차례 공격에도 진지는 끄덕없었다.

 

여명이 되자, 선우성의 사방에 불이 붙었다.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서, 소리치면서 성에 올랐다. 꽹과리소리, 북소리, 죽이라는 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한군은 성을 격파하고 진입했다. 성밖의 강거병사들은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자 신속히 도망친다. 지지선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백여명을 이끌고 싸우면서 물러났다. 왕궁에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한군은 화공을 이용하여 용감하게 공격했다. 바로 지지선우를 격살하여, 참수에 성공한다. 이 전투에서 선우알지, 태자, 각왕이하 1500여명을 참살하고, 145명을 포로로 잡고, 100여명이 투항한다.

 

기원전 35년 정월, 북흉노의 지지선우의 수급은 한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보내어진다. 곡길등이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벽력생휘(霹靂生輝)

 

진탕이 지지선우를 이긴 전투는 너무 쉬웠던 것처럼 보인다. 간단하게 한번의 원정기습과 이틀도 되지 않는 공방전 끝에 가볍게 지지선우를 참수하고, 성을 빼앗았다. 거의 일방적인 전투였고, 조금도 위험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승리이지만 절대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진탕의 원정에서 군사적인 돌연성요소를 제외하면, 한나라와 흉노의 쌍방실력을 비교하면 그러하다.

 

첫째, 전략태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예전에 모돈선우가 살아있을 때, 동호를 대파하고, 서로 월지를 몰아내고 남으로 누번, 백양을 합병하고, 북으로 곤유, 굴사, 정령, 격곤, 신리를 복속시키고, 누란, 오손, 호게 및 그 곁의 26개국가를 평정했다. 이리하여 대막남북을 통일한 것이다. 수하에 30만의 군대가 있어 한때 위세를 떨쳤다. 오랫동안 전란을 겪고, 막 나라를 세운 한나라가 그들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고조 유방으로부터, 문경 두 황제에 이르기까지 한나라는 수십년을 은인자중하고 수십년간 힘을 비축하고, 수십년간 비축한 국력자원을 일대웅재 한무제의 수중에서 위세를 발휘한다. 한-흉노대전이 수십년 겪은 후에 전략태세가 전면적으로 역전된다.

 

세월이 바뀌어 지지선우시대가 된다. 흉노는 일찌감치 하투, 농서, 양주등 전략요충지를 잃었다. '언지산을 잃으면 부녀들의 안색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한나라의 계속적인 개간이민, 둔전이민, 서역교통의 전략적인 추진으로 흉노의 활동공간은 갈수록 좁아졌다. 기껏해야 소국들 사이에서 힘을 쓸 뿐이고, 막 소선중흥을 겪은 한나라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당시 흉노대신이 말한 것과 같이. "강약은 때가 있다. 지금은 한나라가 강성하니, 오손성곽등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되었다. 흉노는 날로 쇠약하니, 다시 횝고될 수 없다. 비록 굴강하기는 하나 하루살이의 편안합이다. 이제 한나라를 섬겨서 안전을 도모하자, 섬기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다. 어찌 그런 계책을 쓸 것인가?" 이것이 바로 형세이다. 형세는 사람보다 강하다. 어느 흉노선우도 이제는 실력차이가 현격한 전략형세를 뒤집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군사력대비의 차이가 명확해졌다. 지지선우를 습격한 전투를 보면, 진탕이 조서를 위조하여 출병한 개인영웅주의일 뿐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대한왕조가 수십년동안 점차 건립하여 완비된 군사역량(제도우세 포함이 유목민족에 대항하여 실전으로 점검한 것이다.

 

흉노와의 전투에서 한나라는 싸우면서 배웠다. 배우면서 고쳤다. 기병, 마차, 보병의 각종 병종이 계속 조정되고 새로 조직되었다. 한무제시대부터, 기병의 발전이 아주 신속했고, 기원전 119년 봄의 막북대전에서 위청, 곽거병의 양군의 전마수량만 14만필에 달했으니 실력이 아주 강대했다. 결국 한군기병은 전략군종으로의 변화를 완성한다. 그리하여 주력병종으로 성장한다. 이리하여 한나라군대는 기동성에서 적군의 기동력에 대항할 수 있게 된다. 원거리습격에서도 우회, 포위, 분할 섬멸로 전장터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살상력과 기동력이 모두 크게 제고되었다.

 

그리고 한나라군대가 아주 중시한 것은 기병, 마차, 보병의 연합작전이었다. 한무제때 위청이 새외로 나가서 전투할 때 무강차(武强車, 피혁으로 방어하는 전차)를 둘러싸게 해서 군영을 만들어, 방어로 썼다. 동시에 정예기병 5천을 내보내 흉노를 공격했다. 실전경험을 계속  쌓으면서, 한나라군대는 일종의 기병야전, 보병성루공격, 차병방어의 승리전법이 마련되었다. 협동작전도 점점 완벽해진다. 지지선우를 섬멸하는 전쟁에서 바로 한나라군대의 군사력이 강성하고 각종병종이 협동작전을 하고, 공방을 겸비하여 만여 강거기병은 한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던 것이다. 하물며 한군의 장단병기는 모두 정교하여 유목민족들의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흉노쪽을 돌아보면, 시종 진격은 잘하지만 방어에는 서툴렀다. 방어전은 유목민족의 장기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기동력우세를 전혀 써먹을 수 없는 것이다. 지지선우의 최대의 전술착오는 바로 사방에서 한호연합군이 밀려오고 중과부적인 상황하에서 여전히 성을 고수하는 전략을 쓴 것이다. 이는 달걀로 돌을 깨려는 짓이다. 결과적으로 이년에 걸쳐 만든 선우성이 한군의 강공하에 하룻낮 하룻밤만에 함락되고 만다.

 

나폴레옹이 말한 바 있다: "하느님은 항상 물질역량이 강한 측에 서서 싸운다". 사실은 증명한다. 농업문명기초위에서 건립된 고도로 조직화된 무장역량앞에, 아직 정교화된 작전분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유목민족은 기본적으로 승산이 없었다. 한나라가 여러해동안 단련한 둔전군제, 공방겸비의 무기장비, 배합이 잘 이루어진 병종조합에 지지선우의 작전실패까지 겹쳤으니, 어찌 쉽게 패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지지선우가 멸망한 전투는 한군이 합리적으로 자신의 장점을 활용하여 원거리를 급습한데 있다. 공성과 참수가 깔끔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전체작전의 흐름은 빠르기는 섬전과 같고, 기세는 노도와 같았다. 아주 멋있게 승리를 거두었다. 군사적이든 심리적이든 모두 흉노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지지선우가 주살된 후, 남흉노 호한야선우는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기쁜 것은 숙적이 이미 죽은 것이다. 두려운 것은 한나라군대의 무력이 강대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세번째로 친히 황제를 배알한다. 그리고 북황을 지키며 영원히 신하를 칭하겠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저명한 "소군출새(昭君出塞)"로 이어진다. 남흉노의 운명은 이때부터 철저히 한나라와 엮이게 된다. 진한이래의 북방의 우환은 일거에 해소된 것이다. 나중에 왕망이 찬탈하며 천하에 대란이 왔을 때도, 흉노는 그 기회를 틈타서 침입하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종실의 유향이 말한대로, "이 전투는 곤산의 서쪽에 위엄을 떨치고, 곡길의 수치를 씻었으며, 소명의 공을 세우고, 여러 오랑캐가 굴복하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번 전투 한번으로 진탕은 천하에 이름을 날린다. 대승을 거둔 후에 감연수, 진탕이 한원제에게 올린 유명한 글에서 "명범강한자, 수원필주(明犯强漢者, 雖遠必誅, 명확히 강한 한나라를 범하는 자는 비록 멀리 있더라도 반드시 주살한다)"는 말을 남긴다.

 

명장 진탕은 일생동안 이 한번의 전투뿐이다. 다만 이 한번의 전투는 수십년간 한-흉노전쟁에 원만한 마침표를 찍었다. 그래서, 이후 진탕의 운명이 어떻게 좌절되더라도, 그의 용기, 모략, 재화는 찬란하게 빛나는 별과 같이 승리의 순간에 찬란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