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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천년간 잠든 서하(西夏) 문화를 누가 깨웠는가?

by 중은우시 2008. 7. 24.

서하왕릉(동방의 피라미드)

 

글: 신공무기(申公无忌)

 

하란산(賀蘭山)의 아래, 천년간 잠들어있는 왕릉의 폐허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왕조" 서하국(西夏國)의 왕릉이다.

 

제3호릉은 바로 서하의 개국황제인 이원호(李元昊)의 능이다. 송, 요, 금나라와 병존하며, 189년이나 존속했던 왕조는 돌연 역사의 강물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런 경우는 중국과 세계의 역사상으로도 드문 일이다.

 

필자의 귀에는 1134년 가을 한족의 민족영웅인 악비가 읊은 <<만강홍>>이 울린다. "노발충관...." 역사의 소리는 그렇게 깊이 가라앉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사는 서하왕조와는 관계가 없다. 그 때의 남송은 거의 서하와 마찬가지로, 역사무대에서 여진족의 금나라와 마주하고 있었다. 싸우기도 하고, 화평의 시대를 보내기도 하면서, 삼국정립의 국면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철기의 출현은 이런 짧은 역사의 균형을 철저히 무너뜨렸다. 쇠발굽아래, 서하, 금, 남송은 하나하나 멸망한다. 그런데, 여진인도 아직 남아있고, 한족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오로지 서하문명을 창립한 당항족(黨項族)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렀다. 서하는 이런 역사의 수수께끼를 남긴 것이다.

 

원나라의 통치자들은 송요금사(宋遼金史)는 써서 남겼다. 오직 서하에 대하여는 거의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서하는 중국역사상 당항족이 1038년에 설립하여 1227년까지 중국의 서부지역에 건립했던 정권이다. 역사상 "서하(西夏)"로 불린다.  중원대지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송나라사람들은 이들을 '서하'라고 불렀다. 송요금사에는 모두 하국편(夏國篇)이 있다. 그러나 내용이 상세하지 못하다. 서하라는 나라는 있었지만, 정사(正史)는 남기지 못했고, 남겨진 사료도 너무나 적다. 우리는 그저, 서하에 문자가 있었고, 불교를 숭상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저 그 뿐이다.

 

서하의 문명은 1804년에 이르러 장주(張澍)라는 인물에 의하여 역사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었다.

 

장주는 청나라때 유명한 경학자, 사학자 겸 금석학자이다. 1776년에 태어나서 1847년에 죽었다. 자는 백윤(白淪)인데, 수곡(壽谷), 시림(時霖)이라고도 썼다. 호는 개후(介侯), 구민(鳩民), 개백(介白)등이다. 양주부 무위현(지금의 감숙성 무위) 사람이다. 19살에 거인이 되고, 24살에 진사가 된다. 26세에 귀주성 옥병현 지현이 되고, 나중에 준의지현, 광순지부, 사천 병산지현, 흥문, 대족, 동량, 남계지현, 강서 영신지현, 강서임강부대리통판등의 직위를 지냈다. <<청사고>>에 전이 있다. 1804년, 장주는 오랫동안 떠나있던 고향으로 돌아와서 요양한다. 아마도 하늘의 조화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의 일종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서하학(西夏學)연구의 대문이 열리게 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하루는 장주와 친구가 청응사(淸應寺)에 놀러갔다.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는 동안에 절의 깊은 안쪽까지 들어가게 된다. 이때, 장주는 돌연 눈앞에 사면을 벽돌로 쌓아서 막아놓은 정자를 보게 된다. 이 정자는 왜 이렇게 벽돌로 봉쇄해놓았을까? 절안의 화상에 따르면, 이것은 저주받은 정자라는 것이다. 봉쇄된지 이미 수백년이 되었다고 한다. 현지에는 이 봉쇄된 벽돌을 허무는 자는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그리하여, 수백년동안 아무도 감히 이 정자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정자의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장주는 원래 담량이 있었고, 민간에서 말하는 무슨 보복에 대하여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화상에게 사람을 불러 정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 맹서했다. 개봉한 후에 무슨 재앙이 있으면 모두 그 혼자 감당하겠으며, 다른 사람이 연루되지 않게 하겠다고. 장주의 계속된 요청으로, 화상은 마침내 응락한다. 벽돌을 하나하나 들어내자, 커다란 검은색의 석비(石碑)가 나타났다. 비신(碑身)은 반원형이고, 사방에는 인동꽃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비문의 정면에는 단정한 해서체의 글자가 가득 차 있었다. 장주가 석비에 가까이 다가가서 위에 쓴 글자를 읽어보았는데, 깜짝 놀랐다: 이 비문의 글자는 멀리서 보기에는 모두 아는 글자같았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한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문자인가 부호인가? 장주는 즉시 정자 사방의 벽돌을 모두 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석비의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호국사(護國寺) 감응탑(感應塔) 및 사원을 건설한 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비문의 작성연대를 보고는 장주가 깜짝 놀란다: '천우민안오년세차갑술십오일술자건(天佑民安五年歲次甲戌十五日戌子建)". 장주는 '천우민안'이 서하의 연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비석의 기괴한 문자가 바로 이미 '죽은' 지 수백년도 더된 서하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석비는 바로 '천하절비(天下絶碑)"라고 불리우는 <<중수양주호국사감응탑비(重修凉州護國寺感應塔碑)>>(즉 "서하비(西夏碑))이다. 이 비석의 발견은 서하학 연구의 서막을 연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왕조'를 되찾게 된 것이다. 일찌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하는 이로써 역사의 먼지를 털어내고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서하비는 서하문자를 해석하는데 절판된 사전역할을 했다. 장주는 나중에 <<서서하천우민안비후(書西夏天佑民安碑後)>>를 통하여 "이 비석은 내가 발견한 후부터...금석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기서가 추가되었다" 호국사의 석비가 왜 청응사로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이 정자를 봉쇄했는지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전설이 있는데,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서하문명의 재발견에 두 사람의 외국인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오늘의 평가로는 그들이 중국문화의 '약탈자'이지만. 그들은 바로 러시아인 코즈로프와 영국인 스타인이다. 1908년, 군인신분의 코즈로프는 러시아황가학회의 파견으로, 탐험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온다. 1908년에서 1909년까지 코즈로프는 두번에 걸쳐 어지나강 하류의 바단지린사막의 가에 있는 흑수성(黑水城)에 대하여 발굴을 진행한다. 그리고 잘 보존되어 있던 대량의 역사유물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그는 성의 서하불탑내에서 묶음으로 되어 있는 서하경권(西夏經卷)과 다른 왕조의 역사진보를 찾았다. 그 중에는 서적, 문서, 육필원고, 불상, 회화등의 진귀한 문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자신이 쓴 <<여행기>>에 따르면, 서책, 화권 및 육필원고만도 합계 2만점이상이었다고 한다. 그중,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하문의 간본과 사본이 8천여종에 달하였다. 여기에는 한문전적에서 번역한 <<논어>>, <<맹자>>, <<효경>>, <<손자병법>>, <<유림(類林)>>등이 있고, 서하문으로 쓴 <<문해(文海)>>, <<음동(音同)>>, <<잡자(雜字)>>, <<성립의해(聖立義海)>>등의 자전, 사전이 있다. 그중 서하문과 한문의 두 문자로 쓴 <<번한합시장중주(番漢合時掌中珠)>>는 특히 진귀하다. 이 책은 두개의 언어를 서로 대역하고, 뜻을 서로 풀어쓴 도구서이다. 책에는 서하문과 한문의 두 언어의 단어를 썼는데 모두 대응하는 뜻과 발음을 적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서하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문을 배우기 쉽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한문을 아는 사람이 서하문을 배우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전이 나타난 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존하는 서하문헌을 해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것이다.

 

영국인 스타인은 더욱 유명하다. 그는 돈황등 중국문화역사유적지의 발굴과 약탈에 참가했다. 이 자는 일찌기 돈황 막고굴의 왕도사의 신임을 얻어 적은 돈을 주고, 대량의 막고굴내의 진귀한 역사유뮬을 가져갔다. 1913년에서 1915년까지 그의 제3차 중국탐험에서 다시 호텐(和田), 니야(尼雅), 누란(樓蘭)유적을 다시 방문하였고, 돈황이외에 흑성자(黑城子)와 투루판(吐魯番)등지의 유적지를 발굴했다. 이에 따라 그는 고고보고서 <<아시아내지고고기>>(1928년) 전4권을 썼다. 그중 서하문명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기술을 하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현재 서하문명에 관련된 대량의 문물은 러시아와 영국에 보존되어 있다. 아마도 이 두 사람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찌되었건, 그들은 서하문명의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것이다. 이 점을 회피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연구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서하문명의 재발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은 확실히 서하왕릉의 발견과 발굴정리업무이다. 하란산 아래에 있는 서하왕릉은 1970년이전에까지는 당나라의 능묘로 알고 있었다. 황야에 흩어져 있는 피라미드형의 황토흙무더기는 일찌기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기도 했다. 역사의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1970년 초봄, 섬서의 고고학자는 영하를 거쳐 내몽고의 아라산으로 가는 도중에 은천시에서 멀지않은 하란산의 아래에 높낮이가 서로 다른 황색의 흙언덕(土丘)을 발견했다. 이들 기세당당한 능묘건축군은 당나라묘라고 추측했다. 다만, 당시 영하 사학계와 고고학계는 이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 더더구나 이들 능묘가 누구의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고고학자가 소위 '당묘'를 본 것을 영하의 관련인들에게 얘기하자 이를 듣고는 망연해 했다고 한다.

 

1971년 겨울, 난주군구의 모부대는 하란산의 아래에 소형 군용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십여일후, 몇몇 전사는 기지굴토공사를 하면서, 의외로 십여개의 오래된 도기제품을 발견한다. 그들 주에는 부서진 도자기항아리도 있었고, 흩어져 있는 비석조각도 있었다. 위에는 네모난 문자가 쓰여져 있는데, 전사들은 봐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부대장은 이를 본 후에, 전사들에게 즉시 굴토공사를 중단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신속히 영하박물관에 보고한다. 당시 종간(鍾侃)이라는 연구원이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와 동료는 은천시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공사현장으로 갔다. 현장을 보호하고, 동시에 구조성 발굴을 개시한다. 10일후, 오래된 묘실(墓室)이 드러났다. 묘실에서는 무사상(武士像)등 잘 그린 벽화를 발견한다. 동시에 고대의 정교한 공예품과 네모난 벽돌등 도기제품이 출토된다. 네모난 벽돌에는 네모난 글자와 꽃무늬가 가득 차 있었따. 종간등이 자세히 연구하고 측정한 결과 이는 서하제왕릉(즉 6호묘)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출토된 네모난 글자는 바로 '천서(天書)'와 같은 서하문(西夏文)이었다. 종간은 1960년에 서북대학 역사학과 고고학전공의 젊은이였는데, 나중에 서하역사연구의 권위자가 된다. 나중에 영하박물관장, 영하문물고고연구소장을 역임하고, <<영하사화>>, <<서하간사>>등의 저서를 남긴다.

 

1972년 8월, 중국고고학계는 이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중대한 발견을 발표한다. 이후, 중국의 고고학자는 6호왕릉(제4대서하황제 건순현종의 묘)과 7호릉(서하중흥왕 인종황제 인효의 묘)등의 묘를 집중적으로 발굴하고 정리한다. 여기서 대량의 서하왕조문물을 발견한다. 얼마전에 다시 3호릉(이원호 묘)에 대한 보호적 발굴을 진행한다. 이들 묘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은천에 가면 반드시 들르는 관광성지가 되었다.

 

서하의 문명은 이러한 곡절을 겪은 후에 완전하게 후세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모호한 것들은 점차 분명해졌다. 당항족은 원래 청해호의 이남, 황하, 대통하 및 황수 원류부근의 산지 초원일대에서 생활했다. 일찌기 서한의 서강족(西羌族)의 한 갈래이다. 그리하여 당항강(黨項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나중에 당항족은 대량으로 내지로 이주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들을 북위 선비족 척발씨의 후예라고도 하고, 당나라에서는 이씨성을 하사했다. 북송때에는 다시 조(趙)씨성을 하사받으며, 오늘 날 영하일대에 정착한다. 당나라말기에 이르러, 당항족의 세력은 점차 강성해 진다. 그들의 조상인 척발사공(拓跋思恭)은 하주(夏州)를 점거하고, 서평왕(西平王)에 봉해지며, 하국공(夏國公)을 세습한다. '비록 나라를 칭하지는 않았지만, 왕도 있고 영토도 있었다(雖未稱國而王其土)". 1038년, 척발사공의 후손인 이원호가 송나라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나라의 이름을 대백고국(大白高國)이라 한다. 중국역사에서는 '서하' 또는 '대하(大夏)'라고 부르는 왕조이다. 영토는 영하성 전부와 감숙성 대부분, 신강, 청해, 내몽고 및 섬서성의 일부지역을 포함한다. 동으로는 황하에 이르고, 서로는 옥문관에 이르며 남으로는 소관(蕭關, 영하성 동심의 남쪽)에 이르고, 북으로는 대막을 장악했다. 폭이 아주 넓었다. 서하국은 10명의 황제가 있었다. 1227년에 몽골의 원나라에 멸망당한다. 당항족도 재앙을 입어 이때부터 소실된다. 서하문자는 죽은 문자가 된다.

 

다행이라면, 오늘날, 서하문자는 영하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서하왕릉의 앞에서 하란산 돌을 파는 잡상인도, 언제든지 관광객을 위하여 서하문자로 된 도장을 파줄 수 있다. 찬란한 역사문명은 모침내 아무도 덮어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을 제패한 징기스칸도 서하문화를 완전히 덮어두지는 못했다.

 

서하문자 인장(大白高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