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백련교(白蓮敎)의 기원

by 중은우시 2008. 12. 27.

글: 빙풍(氷楓)

 

백련교는 당(唐), 송(宋)이래로 민간에 전해지는 비밀종교결사이다. 유래는 불교(佛敎)의 정토종(淨土宗)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정토종의 시조인 동진(東晋)의 석혜원(釋慧遠)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서 유유민(劉遺民)등과 백련사(白蓮社)를 조직하여 함께 염불을 했다. 후세의 신도들이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 북송때 정토종의 염불결사는 아주 성행하는데 대부분이 백련사(白蓮社) 또는 연사(蓮社)라고 칭했다. 남송 소흥연간 오군 곤산(현재의 강소성 곤산)이 승려 모자원(茅子元) (법명은 慈照)은 당시 유행하던 정토결사의 기초하에서 새로운 불교의 종파를 만드니 바로 백련종(白蓮宗) 즉, 백련교이다.

 

초기의 백련교는 아미타불을 숭배했고, 염불지계(念佛持戒, 염불을 하고 계율을 지킴)를 제창하여, 신도들에게 살생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사음(邪淫)하지 말고, 헛된 말을 하지 말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정하고, 신도들에게 조상을 잘 모시도록 요구하였다. 이는 일종의 반승반속(半僧半俗)의 비밀단체였다. 교의(敎儀)는 비교적 간단했다. 경전도 통속적이어서 알아듣기 쉬웠다. 그리하여 하층인민들이 쉽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자주 인민군중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용되었다. 원(元), 명(明)의 두 왕조때 백련교는 여러번 농민반란을 조직한다. 청나라초에는 반청비밀조직으로 성장한다. 비록 청나라정부로부터 여러번에 걸쳐 피비린내나는 탄압을 당했지만, 가경원년(1796년)에 이르러 "백련교의 난"은 가경연간에 가장 규모가 큰 반란이었다.

 

가경연간의 백련교의 난은 전후 9년4개월이나 지속된다. 최초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백련교도였다. 참가한 사람수는 수십만명에 달했다. 반란은 사천, 호북, 섬서의 변경지역에서 발발했다. 투쟁지역은 호북, 사천, 섬서, 하남, 감숙의 다섯개 성에 이르렀다. 심지어 호남성의 용산현에까지도 미친다. 백련교의 난에 참가한 반란군은 9년에 걸친 투쟁을 통하여 청나라정부의 부, 주, 현, 청, 위등을 204개나 점령하거나 함락시킨다. 그리고 청나라정부가 16개성에서 데려온 병력에 항거하고, 대량의 청나라군인을 죽인다. 그리하여 청나라군은 1,2품 고위장군 20여명, 부장, 참장이하의 장교 400여명을 잃는다. 청나라정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모두 백은 2억냥을 소모하는데, 이는 당시 청나라정부 5년간의 재정수입에 상당한다. 이로부터, 청왕조는 성세에서 무력이 쇠약해지고, 재정이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신속히 몰락의 나락으로 가라앉는다.

 

백련교는 일종의 종교개념인데, 포괄되는 내용이 아주 광범위하다. 1천년동안 중국이라는 땅위에서 나타났던 각종 "이단" "좌도" "사교"의 총합이며, 불교, 도교 이외의 중요한 민간종교이다. 백련교는 중국 하층사회백성의 생활, 사상, 신앙과 투쟁을 반영한다. 중국농민전쟁사상 아주 중요한 역할은 한다.

 

백련교도의 주요한 특징은 소향(燒香, 향불을 피움), 송게(誦偈, 경전을 읊음), 미륵불과 명왕을 신봉하는 것등이다. 백련교의 경전은 <<미륵하생경>>, <<대소명왕출세경>>등등이다. 하층백성들이 낮에는 일하는 상황을 고려하여, 백련교도들은 대부분 "밤에 모여서 새벽에 흩어졌다" 입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빈부, 성별, 연령을 구분하지 않아, 남녀노소 누구나 원하면 가입이 가능했다. 명말청초에 이르러, 백련교는 점차 교리측면에서 완비되고, 교의는 더욱 체계화된다.

 

백련교의 교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는 두 개의 세력이 서로 대립투쟁하고 있다. 바로 명(明)과 암(暗)이다. 명은 바로 '광명'이며, 선량과 진리를 대표한다. '암'은 '암흑'이며, 죄악과 불합리를 대표한다. 이 두가지 세력은 과거, 현재와 미래에 계속하여 투쟁한다.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오면, 광명은 최종적으로 암흑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것이 바로 "청양(靑陽)", "홍양(紅陽)", "백양(白洋)"의 삼제(三際)이다. 교도들은 "천생노모(天生老母)"를 모시고, "진공가향, 천생노모(眞空家鄕, 天生老母)"라는 8자진언을 외운다. 천생노모는 천상의 무생무멸(無生無滅)의 고불(古佛)인데, 그녀는 속세의 자녀들을 교화시켜 천계로 되돌아오게 하여, 겁난을 피하게 하려고 한다. 바로 이 천계가 '진공가향'이다. 천생노모는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세상에 내려보내는데,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시기에 인류세계를 통치한다.

 

청양시기는 연등불이 통치하는 초제(初際)단계이다. 그 때는 아직 천지가 없었다. 다만, 명암은 있었다. 명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이고 암은 멍청하고 바보같은 것이다.

 

홍양시기는 석가모니불이 통치하는 중제(中際)단계이다. 이때는 암흑세력이 우위를 점하여 광명세력을 압박한다. 그리하여 "공포대겁"이 일어난다. 이때 미륵불이 내려온다. 쌍방의 결투를 거쳐 최종적으로 광명이 암흑을 이긴다.

 

백양시기는 미륵불이 통치하는 후제(後際)단계이다. 명암은 각각 자기 자리를 찾고, 명은 대명(大明)으로 암은 극암(極暗)으로 되돌아간다.

 

초제단계의 명암대립은 과거이다, 중제의 명암투쟁은 현재이다. 후제의 명암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미래이다. 종교우두머리들은 사람들이 백련교를 믿으면, 미륵불의 비호하에 대겁의 해를 아무런 위험없이 넘길 수 있고, 운성(雲城)으로 들어가서 겁난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제도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구질서가 무너진 후에 새로운 천년복(千年福)의 경계를 세울 수 있고,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편안하게 자기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백련교는 현단계(중제)는 비록 암흑세력이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미륵불이 반드시 하강하여 광명이 결국은 암흑에 승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현상타파를 주장하고, 사람들에게 투쟁하도록 격려한다. 이 점은 많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어필했다. 그들이 여기에 깨달음을 얻고 고무되었다. 여기에 우두머리들은 평소에 경문전수, 부적, 권법, 정좌 및 기공운용등으로 사람의 병을 치료해주어 백성들이 백련교에 많이 귀의하도록 했다. 그리고 스승제자관계를 통하여 종적관계를 형성한다.

 

백련교의 신도는 아주 많았다. 주로는 사회하층에서 왔다. 각 파의 내부는 가장식의 통치가 이루어졌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분명하고, 등급이 삼엄했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반란의 조직형식이 된다. 원나라말기에 난현을 중심으로 기동(하북동부) 및 장성(長城) 근방은 백련교가 활동해오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전국으로 퍼져갔으며, 한산동(韓山童), 유복통(劉福通)이 이끄는 반원의거가 일어난다. 명초 영락제때 당새아(唐賽兒)가 이끄는 의거가 있었고, 명말 천계제때에는 서홍유(徐鴻儒), 왕호현(王好賢)이 이끄는 의거가 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소규모의 농민의거가 있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 가정연간의 강남 태호유역에서는 마조사(馬祖師)가 이끄는 농민의거가 있었고, 산서, 내몽고일대의 농민의거도 있었다. 청나라 건륭연간에는 산동일대에서 왕륜(王倫)이 이끄는 농민의거가 일어난다.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가경연간에 일어난 의거 즉, 청나라중엽에 일어난 천초섬(川楚陝) 백련교 대의거였다.

 

백련교의 조직은 청나라때 아주 널리 분토된다. 황하상하류, 장강남북의 도처에 모두 있었다. 특히 직예, 산동, 산서, 호북, 사천, 섬서, 감숙, 안휘등의 성에서 백련교가 아주 활발했고, 각급 인민들이 많이 참가했다. 농촌에는 "향약흘교(鄕約吃敎)"가 있었고, 성진(城鎭), 집시(集市)에는 "차역서판흘교(差役書販吃敎)"가 있었다. 당시 문파는 아주 많았다. 청차문교(淸茶門敎), 우팔교(牛八敎, 우팔은 朱자를 나눈 것임), 십자교(十字敎), 분향교(焚香敎), 혼원교(混元敎), 홍양교(紅陽敎), 백양교(白陽敎), 노군문교(老君門敎), 대승교(大乘敎), 청향교(淸香敎), 원돈교(圓頓敎), 팔침교(八針敎), 대양교(大陽敎)등이 있었다. 각양각색이었다. 그중에 많은 교파는 백련교의 지파(支派)이다. 백련교에 가입한 군중이 가장 많았고, 영향도 가장 커다. 백련교 자체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다. 각자 교주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상당히 복잡하게 조직한다. 지도자의 명칭도 아주 많다. "조사(祖師)", "사부(師父)", "노장궤(老掌櫃)", "소장궤(少掌櫃)", "장교원수(掌敎元帥)". "선봉(先鋒)"등등이 있다. 이런 조직형식은 비밀전교와 분산활동에 적합했다. 어떤 때에는 경문을 가사로 만들어서, 민간소곡에 맞추어 북을 치고, 죽판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형식으로 전도하기도 했다.

 

백련교의 교주와 수령들은 백련교의 경전에서 암흑을 반대하고 광명을 추구하며, 광명이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는 교의를 선전하면서, "대겁재우, 천지개암, 일월무광(大劫在遇, 天地皆暗, 日月無光, 대겁이 오면 하늘과 땅이 모두 어둡고, 해와 달이 빛을 내지 못한다)", "황천장사, 창천장생(黃天將死, 蒼天將生, 황천이 죽고 창천이 나온다)" "세계는 반드시 크게 변할 것이다"라고 선전했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천하를 집으로 삼고, 교우관계를 부모가 같은 형제자매관계로 삼도록 하였으며, 교우간에는 서로 재물을 나눠주고, 서로 돕도록 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이들 구호는 농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절박한 요구사항이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아주 큰 흡인력이 있었고, 발전이 아주 빨랐다. 그리하여 당시에 아주 큰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