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계합(張繼合)
유(儒), 불(佛), 도(道)는 중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영향이 큰 3대 문화유파이다. 중국의 토착종교인 도교와 천축에서 온 외래품인 불교가 막 세력을 얻기 시작한 때, 특히 위진(魏晋) 시대이후 세력을 다투기 위하여 치열하게 격전을 벌여왔다. 가짜 고승, 가짜 도사는 속속 이 참혹한 지구전과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투쟁은 이미 도가, 불가의 종교적 본뜻에서 많이 벗어났고, 명리를 추구하고 명성을 낚으려는 정도에 이르렀으니, 강호의 사기꾼과 다를 바 없었다.
도교의 약속은 불교보다 백배는 현실적이었다. 무슨 윤회니, 내세니 하는 말은 필요없다. 그걸 누가 확인해줄 수 있겠는가? 우리 도교에 들어온다면, 일평생 한 사람만 득도하면 주변사람까지 모두 하늘에 오를 수 있다. 만일 못믿겠거든 연단을 하고 장생불로하는 '방사'를 보라. 그들이 증거이다. 이런 말에 현혹되어 당나라의 역대 황제, 후궁들은 모두 도교로부터 '수계'와 비슷한 '부록'의식을 받았으며, 그들이 국교인 도교에 귀의하였다는 것을 나타냈다.
"도교(道敎)"라는 명칭을 확정한 것은 노자도 아니고, 당나라의 황제도 아니다. 기원5세기의 구겸지(寇謙之)라는 도사이다. 그때부터 노자의 위패는 이 토착종교의 대전에 모셔지게 되었고, 득도하여 신선이 되고, 장생불로한다는 광고어는 수많은 신도를 불러모았는데, 당시의 권력가와 세도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도를 모으기 위하여 불교와 도교는 안면을 몰수하고, 공개적으로 싸웠다. <<조야첨재(朝野僉載)>>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효화제가 명을 내려, 도사와 승려를 모셔서 각자의 재주를 자랑해보도록 시켰다. 승려와 도사는 서로 양보하지 않고, 하루종일 싸웠다. 그리하여 승자와 패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원도관(元都觀)의 도사인 섭법선(葉法善)은 두 되에 이르는 호도를 가져와서, 껍데기와 속까지 한꺼번에 우걱우걱 깨끗이 먹어치워 버렸다. 승려들은 그게 무슨 재주냐고 무시했다. 도사는 마음이 조급해 졌다. 섭법선은 다시 발갛게 달은 철밥그릇을 가지고 나와서 맨손으로 들고는 그걸 승려의 머리위에 내려놓으려고 했다. 늙은 승려는 깜짝 놀라서 가사로 얼굴을 가리면서 쥐새끼처럼 도망쳤다. 효화제가 이를 보고는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웃었다. 불도 양가는 인신공격을 하고 목숨까지 위협할 짓을 벌였다. 풍도있는 교의나 훈계는 모두 저 멀리 던져버렸다. 낭패하게 패한 편도 그렇지만, 무식하게 이긴 측도 모두 체면이 서기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내던지는 행동을 하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어떤 사람은 승려와 도사를 사칭하여 각지를 다니면서 사기를 쳤다. 세상사람들은 도대체 누가 진짜 승려이고 누가 가짜 도사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오대때의 왕인유의 <<옥당한화>>에는 젊은 도사 한 명이 천재적인 사기극을 벌인 일을 기록하고 있다.
장안성에 한 도사가 있는데 연단을 잘 하고 아주 젊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300여세라고 하였다. 장안성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고, 자주 그에게 연년익수의 환약을 받아갔다. 그래서 그 도사는 돈을 많이 벌었고, 도관의 문밖에는 말과 가마가 가득했다. 하루는 문밖의 한 사람이 들어와서 보고했다. "도사님, 당신의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도사는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멍청한 놈, 내가 만든 단약을 먹지 않더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구나. 아직 100살도 안되었는데, 이렇게 늙어버리다니.." 과연 들어온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였다. 그는 공손하게 도사에게 참배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내력을 알아보니, 그 백발노인은 바로 도사의 친아버지였다. 도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속는 것같다.
아마도 늙은 부친을 학대한 것이거나, 아마도 부자가 공모해서 함께 쇼를 벌인 것일 수도 있다. 돈을 벌면 그만이지 아들로 하건 손자로 하건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쨌든 도사의 사기극은 들통이 났고, 그는 친생부자관계를 더럽혔을 뿐아니라, 도교 천년의 깨끗한 명성과 노자후예의 철밥통까지 깨뜨려 버렸다.
청나라때 소련의 <<숙형잡록>>에는 이런 불교의 패륜아를 기록하고 있다:
건륭시대에 "법화상"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북경성동쪽의 한 절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하늘에 통한다고 알려져 있었고, 그가 교류하는 사람은 모두 왕공귀족이었다. 화상은 아주 기세등등했고, 귀족자제들을 도박에 끌어들였다. 몰래 여인을 두고, 밤낮으로 음탕한 짓을 벌였다. 이런 후안무치한 행위를 했지만, 그는 아주 돈이 많았다. 그리하여 현지 사람들은 감히 그에게 뭐라고 하지를 못했다. "과의공"인 아리곤은 이 불문의 패륜아를 미워했다. 그리하여 부하를 시켜 칡흑같은 밤에 담장을 넘게 해서 이 중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 중의 패덕행위를 증명할 자료들도 확보했다. 아리곤은 사후에 문제가 생길 것을 두려워해서 바로 그날 밤에 이 중을 때려서 죽여버린다. 나중에 상부에서 법화상의 편을 들어주려는 사람이 찾아왔지만, 모든 것은 이미 끝난 후였다.
법화상은 마치 지금으로 하면 조폭의 우두머리와 같았다. 이를 볼 때, 승려와 도사들은 민간세력, 관청사대부와 결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승려와 도사를 출가한 조직폭력배라고 하기도 한다. 선종의 6조인 혜능은 그의 어록집인 <<단경>>에서 "만일 수행하고자 한다면, 집에서 해도 되고, 절에 있어야 하지 않는다. 절에 있으면서 수행하지 않으면, 서방에 있으면서 마음이 악인인 것과 같고, 집에서도 수행을 하면 동방에 있지만 착한 사람인 것과 같다" 화상이나 비구니중에서 부처에 의지해서 의식주를 해결하는가? 천희5년(1021년) 천하의 승려비구니는 근 46만명에 달하였고, 사원이 4만개에 달하였다. 이같은 거대한 규모에 사치와 낭비가 없었겠는가?
처음으로 종교에 칼을 들이댄 사람은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였다. 446년, 그는 장안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불사에서 대량의 무기를 수색해 냈다. 그리하여 이를 핑계삼아, 그가 통지하는 황하유역에 불교를 금지시킨다. 사원암자는 모조리 불태운다. 화상과 비구니는 모조리 참수했다. 574년, 북주의 제3대황제인 우문옹도 불교를 금했다. 845년, 당나라 18대황제인 이염도 다시 불교를 금했다. <<당회요>>에 따르면, 당시 철거된 절이 4600개였고, 강제환속당한 승려비구니가 260,500명에 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삼무지화(三武之禍)"이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금지령은 비록 불교의 전승을 중단시키지도 못했고, 불교와 도교의 싸움을 막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고대인들이 외래종교에 대하여 경계심을 유지하도록 하는데는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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