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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태종)

고대제왕중 제일의 서예가

by 중은우시 2008. 12. 18.

 

 

 

글: 유병광(劉秉光)

 

역대제왕중에서 글을 잘 쓰던 사람은 적지 않다. 다만 일정한 수준에 이르러, 서예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으로 서예사상 이름을 남긴 사람은 많지 않다. 당현종(唐玄宗)의 글을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힘이 좀 약하다. 송휘종(宋徽宗)의 "수금체(瘦金體)"는 가늘고 곧으며 빼어나지만 지나치게 딱딱하다. 송고종(宋高宗)의 글은 공력이 심후하나, 영감이 결여되어 있다; 강희제(康熙帝)의 글은 호방하고 힘이 있으나 깊이가 없다. 여러가지 흠결로, 이런 제왕들의 서예에서의 성취는 그들의 지고무상한 황위처럼 등봉조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은 다르다.

 

당태종은 웅재대략의 정치가일 뿐아니라, 천고를 오시하는 서예가이다. 이 점에 대하여, 그의 대표작인 "진사명(晋祠銘)"과 "온천명(溫泉銘)"의 두 비문을 보면, 그의 서예에서의 조예가 얼마나 뛰어나고 등봉조극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 수 있다. 당태종의 서예는 왕희지의 기풍을 이어받았다. 글자체는 웅혼창망(雄渾蒼茫)아고, 품격은 경건표일(勁健飄逸)하다. 글의 행간에서 대가의 풍모와 왕자의 기도가 느껴진다. 그의 개인적인 서예조예는 역대제왕중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밀어부친 '권력서예' 및 그의 중국서예에 대한 심원한 영향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서예는 상부구조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후자는 전자의 영향을 받는다. 권력이 서예에 대한 영향은 촉진, 조절, 금지의 세 가지 형식이 있을 수 있다. 당나라때 서예가 번영한 것은 권력의 촉진과 인도와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이는 서예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역대왕조에서 "서예가 성한 것은 당나라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당태종은 제왕의 존엄으로, 위인의 기백으로, 문인의 흉금으로, 옛것을 몰아내고 새것을 내놓았고, 지고무상의 권력을 운용하여 서예예술에 있어서, 단기적으로 보면, 그가 초당서예번영의 좋은 발단을 열어주었고, 장기적으로 보면, 그는 전체 당나라서예수준이 역대왕조중 최고봉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국가의 강대, 문화의 번영, 선비의 앙양, 이것은 서예창작을 활발하게 하는 역사의 요소이다. 황제의 서예에 대한 고도의 중시와 적극적 태도는 서예명가가 배출되는 인문적 요소이다. 당태종이 재위하는 동안, 홍문관을 설치하여, 서예명가로 하여금 서학박사(書學博士)를 맡게 했다.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서예인재를 길렀고, 경사의 5품이상 관리는 반드시 홍문관으로 가서 서예를 배우게 하였다; 왕희지를 '서성(書聖)'으로 받들어, 서예의 정통화에 큰 공을 세운다; 왕희지의 서예를 매개로 하여, 서예이론을 만들고, 초당서예계에 개입하여, 서예의 번영을 가져오고, 초당 1백년의 서풍을 이끌어낸다; 인재를 선발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기준으로 삼게 하였고, 응시자는 반드시 해서를 아름답게 써야 했다. 그래야만 합격하고 그렇지 못하면 탈락이었다.

 

당태종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하여, 대신들에게 서예를 열심히 연마하도록 강제했다. 비록 독재적이었고, 지나치게 엄했지만, 무형중에 서예를 보급한 것이다. 이외에, 당태종은 자주 신하들과 서예에 대하여 논하였다. 일부 대신은 글을 잘 써서 황제로부터 중용을 받았다. 일부 서예가는 황제를 접견하거 여러 혜택을 받았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예를 잘하면 장점과 이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서예예술은 관리선발, 임용의 선결조건이어서, 일종의 요건과 제도가 되었다. 이런 당나라의 특색, 시대의 특색은 서예예술번영의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당태종의 영향하에, 당고종, 당예종, 당현종, 당숙종은 모두 서예를 아주 사랑하고 제창한다. 그들은 모두 아주 뛰어난 서예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이 따라가는 법이다. 서예가 더욱 흥성하게 된다. 이런 예술에 대한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당나라의 서예는 공전절후의 번영을 누린다. 권력은 당나라의 서예번영을 촉진했고, 서예발전에 유리한 사회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하여 많은 서예대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저수량(褚遂良), 구양순(歐陽詢), 우세남(虞世南), 설직(薛稷), 손과정(孫過庭), 이옹(李邕), 회소(懷素),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 장욱(張旭)등의 서예대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름을 일세에 떨쳤을 뿐아니라, 영향도 컸다. 서예는 당나라시기에 가장 많이 보급된 예술일 뿐아니라, 가장 성숙한 예술분야였다.

 

만일 당시(唐詩)를 역사의 하늘에 떠서 비추는 보름달로 비유한다면, 지금까지 여전히 봄바람에 비가 내리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스며들어 자양분을 제공한다면, 당나라의 서예는 밤하늘에 점점이 새겨진 별들과도 같이 천년의 비바람을 겪었지만 여전히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지금까지도 여러 서예연구자들이 임모하는 것이다. 안, 유, 구양, 저등 저명한 서예가들의 법첩은 여러 서예애호가들이 손에서 떼지 못하는 작품들이다. 당태종, 이 제왕서비를 개창하고 행서로 비문을 쓴 선구자인 서예의 지도자이고, 서예를 중시하고 서예를 제창한 서예대가이다. 봉건사회를 전성기로 끌어올렸을 뿐아니라, 당나라서예를 중국서예사상 가장 휘황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중국고대제왕중 '제일의 서예가"라고 부르는 것에 전혀 의문이 없다. 그가 중국서예사상 제일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이겠지만. 당연히, 그는 아마도 자신이 이런 명호를 하나 더 얻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문화는 한 사람의 문화가 아니다. 서예도 한 사람의 서예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문화가 계속 이어지게 할 것인가? 어떻게 서예를 발전시킬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천고일제가 생각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