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황제이다. 바로 그가 대당성세를 열었고, 중국봉건사회를 번영의 최고봉에 이르게 하였다. 그의 문치무공(文治武功)으로 역대왕조에서 모두 그를 성군의 대표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황위를 취득한 과정은 각양각색의 전설로 충만하다. 야사와 민간전설에서, 이세민은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큰형 이건성을 주기고, 그 후에 부친 이연을 퇴위시킨 후에 황위에 등극했다. 그 수단은 악독했고, 잔인했다. 다만, 정사의 기록에서는 이세민이 대당을 개창한 과정에 공로가 높고, 수나라을 전복시키는데 주요한 기획자 및 조직자였고, 그가 황위에 오른 것은 수도거성(水到渠成)의 자연스러운 일이렀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사의 기록은 사실일까? 이세민의 즉위후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역사를 뜯어고치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대당의 창립과정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이연(李淵)에게는 모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건성(建成), 차남 세민(世民), 삼남 원패(元覇, 요절함), 사남 원길(元吉). 이연의 집안은 혁혁했고, 이름은 도참에 따랐다. 수양제는 그를 매우 꺼려했다. 이연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야망을 감추고 힘을 길렀고,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일찌감치 딴마음을 품었지만, 계속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동안 조정은 폭정과 가렴주구에 해마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도처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이연은 기회를 틈타 자신의 근거지를 확보하고 천하를 노린다. 다만 그의 성격은 노련하고 신중하여 계속하여 속셈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록 이러했지만, 수양제는 그래도 유수 왕위와 고군아를 보내어 암중으로 이연을 감시했다. 조정의 이목이 많은 상황에서 이연은 믿을 만한 조수가 필요했다.
온대아가 편찬한 <<대당창업기거주>>는 이씨부자의 대당건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는 친히 반수의거인 진양기병에 참가했다. 그의 기록은 상당히 진실성이 있다. 이 책에서 기록한 바에 의하면 당시 이연의 신변에서 믿을만한 사람은 차남 세민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아들은 모두 곁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 속의 생각을 이세민에게 얘기하고, 이세민은 당시 혈기방장하고 젊은 때여서 자연히 이연의 가장 믿음직한 조수가 된다.
대업12년(616년)말, 이연은 명을 받아 남하하여 반란군을 진압한다. 북방의 돌궐이 이 기회를 틈타 태원유수가 관할하는 마음(산서성 삭현)을 공격하여 빼앗아간다. 수양제는 대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연을 구금한다. 이연은 화가나서 거병을 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곁에는 이세민 하나 밖에 없었고, 이건성과 이원길은 아직 하동에 있어 힘이 분산되어 있었다. 거병에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저 참고지낸다. 그러나, 돌궐의 창궐로 수양제는 이연을 사면하여 그로 하여금 태원을 지키게 한다. 일단 기회가 오자, 이연은 쉽게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시 건성, 원길에게 통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병을 준비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건성은 하동에서 무리를 끌어모으고, 이세민은 진양에서 병사를 모은다. 대거 인재를 끌어모으고 얼마지나지 않아, 건성, 원길과 이연의 사위인 시소(柴紹)가 차례로 태원에 도착한다.
대업13년(617년)초, 이연은 유문정(劉文靜)으로 하여금 가짜 수양제의 칙서를 만들게 하여, 태원, 안문, 마읍등지에서 병사를 모은다. 2월, 이연은 다시 반수의 기치를 들고 분양궁(산서 영무 남쪽)으로 남하한 유무주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병사를 모집한다. 이와 동시에, 이연은 돌궐의 시필칸에게 신하를 자처하며, 돌궐의 지원을 받아낸다. 그리하여 돌궐이 등뒤에서 공격할지도 모를 걱정을 든다. 이런 각종 준비를 완료한 후, 이연은 마침내 수나라조정에 반기를 든다. 그는 준비가 충분했고, 계획이 치밀한데다, 병력이 많아서, 파죽지세로 치고 내려와 그 기세를 막아내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금방 서하성을 차지하고, 백성들을 전혀 다치지 않고 원래의 생업에 종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지지와 신임을 얻는다. 7월, 이연은 이원길을 진북장군, 태원유수로 하여 태원의 모든 일을 책임지게 한다. 이연은 친히 3만명을 이끌고, 거병한다. 그리고 관중으로 향한다. 반년도 되지 않아 수나라의 통치를 전복시킨다.
이로써 볼 때, 태원기병의 전과정은 이전에 수년간 고생하여 경영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두 이연이 혼자 처리한 거이다. 그는 대당의 창립에 탁월한 공헌을 세웠다. 당왕조를 창립한 주요공로는 당연히 이연에게 있다. 계속하여 '호걸들과 몰래 연결하고' 용감한 이세민은 가장 뛰어난 조수였고, 적극적인 조역이었다. 그러나,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등의 정사에는 사실이 왜곡되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수양제가 강회를 남순할 때, 와강채 농민의거가 최고조에 달하여 심각하게 수나라의 통치를 위협했다. 이세민은 이 기회를 틈타서 일을 이룰 수 있다고 보고, 모든 준비와 안배를 했다. 반란을 일으키고자 할 때 비로소 부친 이연에게 얘기한다. 이연은 이를 듣고 깜짝 놀란다. 단지 당시의 형세에 밀려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더 이상 협의할 여지도 없어서, 할 수 없이 이세민이 하자는대로 따르게 된다. 그리하여 거병반란의 길로 들어선다. <<신당서>> <<자치통감>>도 모두 이 주장을 따랐다. 태원기병의 첫번째 공로를 이세민에게 돌린 것이고, 이연이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역할이 된다. 이리하여 이세민은 반수거병, 대당창업의 첫번째 공로자가 된다.
이런 모순이 생긴 것은 이세민이 황제위를 탈취한 후 사서를 수정한 것과 관련있다. 이세민은 현무문사건을 통하여 차남의 신분으로 황제에 등극했다. 그리고 친형 이건성을 죽인다. 이것은 어떻게 말하더라도 도통이나 윤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잔혹한 행위를 감추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등극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세민은 사관을 통제하여 역사를 고쳐쓰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재상이 국사를 감수하는 제도를 만든다. 이것은 사관으로 하여금 진실대로 글을 쓰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저 통치자의 의도에 맞추어 역사를 고쳐쓸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재위기간동은 법도에 어긋나게 여러번 국사와 기거주를 친히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변명하여 말하기를, "오늘 내가 국사를 보는 것은 좋은 일은 논할 필요가 없고, 만일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이것을 귀감으로 삼아 스스로를 고치기 위함일 뿐이다" 라고 했다. 정관14년(640년), 이세민이 계속 요구하자 "방현련등은 국사를 삭제하거나 생략하여 편년체로 하고, 고조, 태종실록 각 20권을 만들어 올렸다" 이세민의 지시하에, 사관들은 이세민이 "현무문사변"을 일으킨 원인을 "사직을 안정시키고, 만민을 이롭게" 하기 위한 대의의 행동으로 묘사하여,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이세민의 의도에 따라, 정관의 사신들은 <<고조실록>>과 <<태종실록>>을 편찬할 때, 온갖 묘사로 이세민의 무덕연간의 공로를 내세웠고, 태자 이건성의 공적을 가능한 한 말살했으며, 고조 이연의 역할도 최대한 줄였다. 그리고 태원거병의 밀모를 태종이 정교하게 계획한 것으로 쓰고, 고조는 완전히 피동적인 역할로 묘사했다. 이렇게 하여, 이세민은 대당왕조를 창업한 최고의 공로자가 되었다. 그러니 황위는 당연히 그의 것이어야만 했다. 이연이 퇴위한 후에 이치대로 그가 황위를 계승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세민이 황위에 등극한 것은 수도거성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 하나의 해석이 있다. 이세빈이 국사를 뜯어고치면서 자신의 태원기병에서의 역할을 높이고, 이연의 공로를 낮추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필요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정관의 사신에게 태원기병에서 이연이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피동적으로 거병에 참가한 것으로 바꾸었다. 그 목적은 이연을 충성의 이미지로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유가의 도덕적 요구에 맞추었던 것이다; 이연은 수양제가 그를 체포하려고 하고, 이세민, 유문정들이 함정을 파서 그에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을 때 ,그리고 거병할 때도 이연은 여전히 "의병을 일으켜 주상을 맞이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보면 이연은 대충신이다. 일부러 이렇게 묘사한 것은 이세민의 통치보호에 유리하다.
이세민이 거병과 반란을 자신이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진명천자의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그가 사관들에게 <<태종실록>>을 쓸 때, 극력 그가 출생할 때, "두 용이 관문의 밖에서 여의주를 가지고 놀고, 전후 3일간 떠나지 않았다"는 기이한 현상을 기록하게 한 것과 일치한다. 태원거병의 과정을 묘사할 때도 극력 그의 모략이 뛰어나고 용감하고 전투를 잘했다는 것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그가 천명을 받은 일대군주라는 것을 인증하고자 하였다.
이런 주장은 심리나 논리상의 추측이다. 많은 사실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종의 또 다른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로써 볼 때, 이세민이 즉위한 후 창업국사를 수정한 것은 의문없는 사실이다. 그가 국사를 수정한 첫번째 목적은 "현무문사변"에서의 악랄한 행적을 감추는 것이고, 자신의 즉위를 광명정대하고, 수도거성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하여 도통상의 합법성을 취득하기 위한 것이다.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지금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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