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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고대의 4대풍류

by 중은우시 2008. 10. 17.

글: Tea.T

 

"풍류(風流)"라는 두 글자는 개략 현재의 말로 하자면 "낭만(浪漫)"일 것이며, 사람들이 모두 바라는 것이다. 고대에도 풍류는 있었으므로 풍류천고라는 말도 있다. 이로써 볼 때, 고인들은 풍류에 대하여 상당히 좋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인들은 "한수투향(韓壽偸香)", "상여절옥(相如竊玉)", "장창화미(張敞畵美)", "심약수요(沈約瘦腰)"를 합쳐서 고대의 "4대풍류"라고 하였다. 지금 보면 이 네가지 풍류는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한수투향"

 

한수(韓壽)는 서진(西晋)시대의 미남자이다. 관련사료에 따르면, 한수의 자는 덕진(德眞)이고, 남양 도양 사람이다. 진서에 따르면,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멋있었다" 한수는 멋진 용모를 가지고 있어 당시의 많은 규중소녀들이 그에게 빠져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한수는 젊고 멋있을 뿐아니라 사곡(詞曲)에도 뛰어났다. 당시 그의 가장 뛰어난 곡명은 <<투향(偸香)>>이었다. 이 사곡의 내용은 바로 그가 한번은 서진의 권신인 가충(賈充)의 집에서 있었던 연회에서 가부의 작은 딸 가오(賈午)와 만나는데, 가오가 그를 마음에 들어했다. 가오는 며칠 후, 노비를 시켜 그를 한밤중에 담장을 넘어 집안으로 끌어들여 몰래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 관계를 맺었는데, 가오는 그녀의 부친에게서 몰래 서역에서 나는 기향(奇香)을 훔쳐서 이 미남자에게 건네준다.

 

한수와 가오의 이 사랑이야기는 나중에 명나라때 육채가 <<회향기(懷香記)>>로 썼다. 많은 문인들은 "한수투향"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나중에는 점점 "투향"이라는 말이 남녀간에 몰래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을 말하게 되었다.

 

사실 가오는 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언니인 가남풍(賈南風)은 중국역사상 유명한 추녀이다. 동생인 가오라고 하여 특별히 예쁠 이유는 없다. 나중에 가충이 딸과 한수가 몰래 정을 나누고 또 임신했다는 말을 들은 후, 이미 생쌀이 익어 밥이 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딸을 한수의 처로 준다. 오래지 않아, 한수는 승승장구한다. 가충의 도움을 받아 산기상시, 하남윤까지 급속도로 승진을 거듭한다.

 

당나라때 저명한 시인 이상은의 시와 북송의 일대권신 구양수의 <<망강남>>이라는 사에서도 한수의 '투향"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상여절옥"

 

여기서 말하는 상여는 바로 "사마상여"이다. 그의 자는 장경이고, 사천 남충 봉안 사람이다. 서한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사마상여는 금(琴)을 잘 탔는데, 그가 쓴 금의 이름은 "녹기(綠綺)"인데, 전설상 가장 뛰어난 금의 하나이다.

 

사마상여는 어려서 글읽기, 격검을 즐겼다. 한경제에 의하여 "무기상시"로 보애지지만, 이것은 그의 원뜻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하고, 임공현령 왕길에게 의탁한다. 임공현에는 탁왕손이라는 부호가 있는데, 그의 딸인 탁문군이 용모가 빼어나고, 풍채가 있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북과 금을 잘 다루었다. 그리고 문재도 있었는데, 불행히도 남편이 일찍 죽어 과부로 지내고 있었다.

 

사마상여는 탁왕손에게 재색을 겸비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한번은 탁가의 손님으로 간 기회에 금을 빌어 그의 탁문군에 대한 사랑의 정을 표현한다. 이런 것은 오늘날 보면 솔직하고 대담하며 열렬한 행동이다. 자연히 주렴의 뒤에서 듣고 있던 탁문군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리고 사마상여와 몰래 만나본 후에는 완전히 마음이 기울어, 둘은 같이 도망치기로 약속한다. 그날 밤, 탁문군은 악세사리를 챙겨서 집을 나선다. 일찌기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마상여와 만나서, 두 사람은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종신대사를 이루게 된다.

 

탁문군은 뛰어난 여자였다. 사마상여가 성도에 돌아온 후, 집안이 가난하여 집안에 네 벽밖에 보이지 않는 지경이 되자, 대담하게 임공의 고향에 술집을 열고, 스스로 술을 판다. 마침내 체면때문에 둘의 결혼을 인정치 않던 부친으로부터 그들의 결합을 인정하도록 만든다. 후인들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를 가지고, 금곡 <<봉구황(鳳求凰)>>을 지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당나라때의 유명한 시인 장호는 <<사마상여금가>>라는 시를 지었다.

 

이 이야기는 뻔한 것이고, 스토리도 간단하지만, 청년문사인 사마상여가 젊고 예쁘며, 댜재다능하며 재산도 많은 어린 과부 탁문군을 마음에 두고, 그녀와 사사로이 혼인까지 한다. 사마상여가 뜻을 얻지 못하였을 때, 탁문군이 길러준다. 사마상여가 이름을 얻은 후에 조강지처를 버리려고 하지면 결국 실행하지 못한다. 다만, 당초에 탁문군이 어쨌든 아름다운 옥이었고, 사마상여가 몰래 그녀와 손을 잡고 도망쳤는데, 이는 "절옥"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몰래 도망치는 것을 "절옥"이라고 부르게 된다. "상여절옥"은 천고에 전해지는 유명한 고사가 되는 것이다.

 

"장창화미"

 

장창화미의 이야기는 <<한서. 장창전>>에서 유래한다. 한무제때 경조윤(京兆尹)인 장창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의 재자였다. 그와 부인은 관계가 아주 좋았다. 부인이 어려서 상처를 입어 눈썹의 끝에 결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부인의 눈썹을 그려주고나서 조정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이 일을 한무제에게 고한다. 한번은 한무제가 조정에서 여러 대신들 앞에서 장창에게 그 일을 묻는다. 장창이 말하기를 부부간에 규방에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눈썹을 그려주는 것보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없다고 말한다. 황상이 나에게 국가대사를 잘하는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상관없지만 내가 부인의 눈썹을 그려주는 것이야 사적인 일인데 왜 관여하느냐는 취지로 말한다. 황상도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나중에 사람들은 "장창화미"를 가지고 남편과 부인의 규방의 즐거움을 묘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아주 많다. 시중에는 낙빈왕의 시도 있고, 남송의 저명한 시인 범성대의 시도 있다. 명나라의 유명한 희곡가 공상임도 명구를 남겼다. 그리하여, "장창화미"의 이야기는 나중에 유행이 되고, 역사적으로 눈썹을 그리는 유행이 퍼지게 만든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왕창령의 시에도 관계된 내용이 나오고, 당나라의 유명한 또 다른 시인 장호의 시에도 눈썹을 그리며 단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의 시에도, 당송팔대가인 한유의 시에도 장창화미에 관한 내용이 나올 정도이니, 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심약수요"

 

심약의 자는 체문이다. 남조 오흥 무강 사람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절강성 덕청현 서쪽 사람이다. 송, 제, 양의 세 황조에서 관리를 지냈다. 옛날 사서에서는 그를 양나라사람이라고 칭한다. 심약은 문벌사족집안에서 태어났고, 역사상 '강동의 호족은 주(周), 심(沈)이 가장 막강했다"는 말이 있다. 이로써 볼 때 심씨집안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알 수 있다. 심약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복습을 했다. 그의 모친은 그의 건강으로는 이렇게 힘든 공부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자주 그의 등에 있는 기름을 줄였다. 그리고 일찌감치 그의 방에 불을 껐다. 청년시기의 심약은 이미 여러 서적에 통달하고, 글도 잘 썼다. 그리고 역사학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 그는 이십여세부터, 20년의 시간을 들여, '진사'를 완성한다. 아쉽게도 이 진사는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심약의 글은 유명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무슨 업적을 세우지 못했다. 502년, 소연이 제화제를 압박하여 황제위를 양보하게 만든다. 그리고 국호를 "양"이라고 한다. 그가 바로 양무제이다. 심약은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상서복야에 임명된다. 양무제는 그를 아주 총애했다. 심약은 재주가 뛰어났으나, 재주를 믿고 교만했다. 한번은 양무제와의 시문시합에서 패배한다. 심약은 나중에 고의로 양무제에게 져주었다고 말하여 양무제의 분노를 산다. 원래는 중죄로 다스려야 했으나, 다행히 심약의 친구인 서면이 잘 말해서, 겨우겨우 감옥에 갇히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더 이상 정치적으로 발전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더욱 불행한 점은 그의 또 다른 친구인 장직이 술마신 후 실언을 하여 양무제에게 벌을 받아 유배를 가서 죽게 되었다. 양무제는 심약에게 자신의 장직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심약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하여, 양무제의 질책을 받는다. 이런 몇 번의 곤경을 겪으면서, 심약은 마침내 병으로 쓰러진다. 날로 초췌해져 갔고, 허리는 가늘어졌다. 513년, 이 시단의 일대종사는 우울하게 죽어간다. 심약의 사후 양무젠느 시호를 "은"으로 내려 세상에서는 그를 "심은후(沈隱侯)"라고 칭한다.

 

"심약수요"는 문학에서 여러번 문인의 성격을 묘사하는데 뜨인다. 그 뜻은 병색이 짙은 초췌한 모습이고, 우울하며 병이 많다는 연민의 뜻을 담은 말이다. 남당의 유명한 사인인 이욱의 사에도 심약수요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명나라 시인 하완순도 이에 관해서 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