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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역사대작영화와 허구

by 중은우시 2008. 7. 15.

글: 사걸붕(史杰鵬)

 

요즘 역사대작영화를 논할 때면,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뉜다. 하나는 지나치게 허구여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대로 허구로 꾸미는 것이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필자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위의 두 가지 의견에 모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억지로 입장을 밝혀야 한다면 나는 아마도 약간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즉, 내 생각으로, 허구는 대부분의 상황하에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허구를 자기 하고싶은대로 해서는 안되고, 역사적 상황의 합리성에 부합해야 한다. 당연히, 영화 한편에 충분히 강력한 영혼이 있다면, 허구측면에서도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다. 완전히 역사적 사실을 따르는 영화는 무미건조하다. 어떤 역사적 사건은 그 자체가 이미 상당히 재미있지만, 충분히 집중되지 않는다. 만일 허구의 방식으로 각각의 요소를 종합하지 않으면, 예술품이 된다고 보기 힘들다.

 

좋은 역사영화라면, 영혼을 첫번째로 놓아야 한다. 즉,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점이 분명해야 하고, 사람들의 감정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찍은 역사영화 <<브레이브 하트>>는 내가 여러해전에 보았다. 극의 내용은 이미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주인공이 형을 받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한 마디 말 "자유"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것이 영화의 영혼이다. 주인공인 웰레스의 모든 행동은 이 영혼을 둘러싸고 돌아간다.

 

중국의  최근 역사대작들은 그렇지 않다. <<영웅>>의 '영혼'이라면, "도살은 장래에 죽이지 않기 위함이다"라는 말이다. 정말 놀랍다. 어떻게 이렇게 반인류적이고 반문명적인 시각이, 그리고 진시황의 폭압적인 통치사상에도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 영화 한편의 영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십면매복>>은 뭘 말하고자 하는지를 모르겠다. 나는 보면서 그냥 잠자고 싶었다. 얘기하는 것은 그냥 절룩거리는 투정(偸情)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냥 DVD로 찍어서 보면 될 내용이다. 대작으로 찍는 것은 순수한 필름낭비이다. <<황금갑>>은 권력의 앞에서 인간성, 가족의 정도 의미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같다. 비록 이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많은 노력을 들여서 이런 영화를 하나 찍는 것이, 관중들이 영화관에 와서 이런 썩어빠진 교훈이나 듣자고 한 것인가? 정말 너무 저질이다. <<야연>>은 세익스피어의 희극을 차용하여, 감정이 어떻게 한 황제의 거동에 영향을 주는지를 표현하고 싶었다본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상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투명장>>은 대체로 괜찮은 편이다. 다만 어떤 곳은 논리가 혼란되는 점이 있다. 그리하여 전편에서 보여주려는 난세에 구차하게 살아간다는 기조를 약화시켰다. 단지 <<묵공>>만이 필자가 생각하기에 괜찮다. 논리적으로도 문제가 기본적으로 없고, 사상적인 우의도 괜찮다. 비록 역사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논리는 충분하다.

 

둘째, 영혼이 있다는 기초위에서, 허구의 스토리는 역사상황의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중국에서 최근에 찍은 영화대작은 기본적으로 합격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그들의 사혈(死穴)이다. <<영웅>>에는 두 협객이 진나라 왕궁으로 침입하는데, 장작을 패듯이, 수박을 자르듯이 무수한 호위병사를 죽여버리고, 진왕과 직접 칼싸움을 벌인ㄷ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이 언제든지 궁전을 무인지경처럼 드나들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왜 이연걸과 합의를 하고, 고육계까지 써가면서, 이연걸을 도와서 입궁하여 진왕을 죽이도록 하겠는가? 이것은 완전히 날조이다. 논리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십면매복>>의 관부에서 추격병이 나무위로 뛰어올라가는 것은 뾰족한 대나무로 유덕화등에게 날리는데,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무료하기 그지없는 짓이다. <<황금갑>>에서는 궁녀들이 집단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장예모가 농민식으로 사앙한 황궁세계일지 모르겠다. 황금이 찬란한 사방벽의 장식은 사람들에게 홍수전의 침실을 생각하게 할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농민이나 깡패도적이 황국에 들어가는게, 요즘 사람들이 파출소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모두 허위날조의 전형이다. <<야연>>에서 당당한 황태후가 어찌 마음대로 궁전을 드나들 수 있겠는가? 거기에다가 강호의 술사에게 가서 독약을 사다니...권력이 하늘에 닿는 황제가 형수를 손에 넣지 못해서 결국 말도 안되게 자살을 해버리다니, 모두 중국영화의 특성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이들 허구는 역사의 가능성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허구가 아니다. 그리고 논리를 위배하는 허위날조이다. 감독과 극본의 눈에는 관중의 두뇌가 팽이처럼 언제든지 마음대로 갖고 놀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일시적으로 갖고 놀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영원히 성공할 수는 없다.

 

셋째, 역사의 구체적인 점에 대한 고증도 아주 중요하다. 역사인물이 스스로 "나 효장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가 죽은 후에나 받은 시호를 자기의 입으로 말하는 꼴이 된다.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영화의 품격을 한참 떨어뜨린다. 관중들도 신뢰감이 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이런 자잘한 역사적인 상식도 모르는 사람이 혹은 알았더라도 고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 감독이나 극작가라면 그들에게 어떻게 좋은 영화 한편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는 미친 자의 꿈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영화에서 일부 역사인물들의 칭호는 그냥 넘길 수가 없다. 현재 은막에는 관리를 "대인"이라고 칭하고, 왕후의 딸이면 그냥 "군주"라고 칭하는데, 정말 말이 되지 않는다. "대인"이라는 칭호는 아마도 명나라가 되어야 유행한 것일 것이다. 한나라 위나라시대에는 대인은 모두 아들이 자기의 부친을 부르는 말이다. "군주"는 당나라때 나타난 칭호이고, 단지 황태자의 딸에게만 쓰였다. 이런 칭호를 더 앞선 시기인 한나라 위나라의 영화에서 쓴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적절하지 않다. 일반관중들은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정치성은 전혀 보증되지 않는다. 이외에 무기, 갑옷, 의복, 장식, 관제, 언어품격등의 세부적인 사항도 모두 고증을 철저히 거쳐야 한다. 이것은 예술의 허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 자신은 이런 자들이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우기면서 스스로를 변호하는 것을 보면 참담하고, 역겹다. 예술이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 사실 세상에서 예술을 아는 사람은 많다. 너 한 사람이 이것이 예술이라고 하여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너는 네가 무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언어품격에 대하여 얘기해보고자 한다. 중국의 최근 몇년동안의 대작들은 이 문제가 특히 심하다. 주인공은 모두 반쯤 문어체이면서 구어체도 아닌 말을 해서, 관중들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한다. 이는 관중들이 역사에 대하여 비록 지식이 깊지는 못하지만, 역사인물의 말과 현재의 골목길속어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관의 웃음은 바로 감독과 극작가의 이른 무지함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것이다. 어떤 자들은 죽어도 잘못은 인정하지 않아서, 박학한 것처럼 꾸미고는 부끄럼도 없이 큰소리치기도 한다. 고대인의 말과 현대인의 말은 사실 모두 같다. 다만 고대인의 서면언어가 오늘날과 다를 뿐이라고. 옛날에는 말과 글이 서로 달랐을 뿐이라고 한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 즉,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어보겠는데, 만일 고대의 사람과 현대의 사람이 하는 말이 완전히 같다면, 그렇다면 문어체 즉, 서면어는 도대체 누가 만들어낸 것이란 말인가? 어느날 천재가 있어서 종래에 존재하지도 않던 '서면어'를 창조해내서 기록했단 말인가? 분명히 서면어도 억측으로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오래전의 구어를 충실하게 기록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비록 청나라말기까지, 문어체는 여전히 방고(仿古)의 특색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실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고, 여전히 완만하게 변화해갔다. <<상서>>와 <<좌전>>은 현저히 다르다. <<좌전>>과 <<전국책>>도 많이 다르다. 위진시대에 이르러, <<세설신화>>에 기록한 많은 구어화된 것들은 정통적인 문어체보다 훨씬 알아먹기 힘들다. 문어체의 안정성은 상대적인 것이다. 여기에 중국의 이천여년의 사회, 생활, 정치, 문화는 그리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어체의 적용능력에 그다지 큰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이다. 현대문명은 새로운 명사에 대한 발전을 날로 새롭게 하여, 문어체가 전혀 적응해갈 수 없는 것이다. 초기의 백화는 절대로 오늘날의 길거리속어와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선진 양한의 출토문헌을 보면, 보통사병의 집에 보내는 편지나 길거리의 계약, 하급관리의 글도 모두 당시의 정통문헌에 접근해 있다. 단지 쓰는 글자가 정치하지 못할 뿐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말은 절대로 지금처럼 이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고금의 백화가 같다는 말도 안되는 논거를 내세워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무료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