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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진)

진나라시대 백년간의 사천이민현상

by 중은우시 2007. 11. 28.

 

기원전 316년 진나라는 당시 사천에 자리잡고 있던, 파(巴), 촉(蜀)을 멸명시켰고, 사천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게 된다. 이때 진나라는 장기간의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중이었고, 파, 촉의 개조는 진나라의 통일이정표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진나라는 인구, 정치, 경제의 여러 측면에서 파, 촉에 대하여 개조를 진행하고, 파 촉을 자신의 후방기지로 삼는다. 진나라의 혜문왕때부터 시작하여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근 1세기동안 사천으로 이민을 보내어 사천은 이민열기가 뜨거운 곳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진나라는 촉후(蜀侯)를 세번 옹립하고 세번 죽였다. 경제적으로, 진나라 사람들은 파촉지방에서 세금을 과중하게 거두어 파인(巴人)들이 반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파촉지방의 역할은 더할 나위없이 컸다.

 

기원전314년, 촉지방에 첫번째 이민붐이 일었다. 예전에 조용히 지내던 촉지방에는 한무리 또 한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 중에는 진나라의 상국(相國)을 지낸 여불위(呂不韋)도 있었고, 국가에 버금가는 부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조(趙)나라의 탁씨(卓氏)도 있고, 노나라의 정정(程鄭)도 있었다. 그리고 의복이 남루하고 손에 수갑을 찬 죄인들도 있었다. 이처럼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촉지방이었다. 촉지방은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촉도(蜀道, 촉으로 가는 길)은 험하기로 유명했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이처럼 어려움에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촉으로 이사를 가는 것일까? 기원전314년부터, 이러한 이주가 일어났고, 거의 중단되지 않으면서 1세기간 지속되었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전무후무한 대이주를 기획하였는가?

 

기원전300여년의 어느 날, 한무리의 먼지를 뒤집어쓴 무리들이 험준한 촉도를 걷고 있었다.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촉도에서 그들은 있는대로 고생을 했다. 목적지인 성도(成都)까지 가려면 아직도 한참 걸어야 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배를 오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진나라의 백성도 있고, 조나라, 위나라의 귀족들도 있었다. 이외에 수갑을 찬 죄인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진나라의 상국 여불위도 있었다.

 

상국, 귀족, 백성, 범인으로 구성된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같은 이 무리는 한중(漢中)에서 사천에 이르는 연도에 사는 백성들에게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기원전 314년부터, 이 촉도에는 거의 매일 이런 이주대열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사람이 적던 촉도는 이때 아주 번잡한 주요도로가 되었다.

 

강대한 진나라는 그들에게 함께 가도록 했다. 진나라 장수인 사마착(司馬錯)은 진왕에게 촉을 멸하도록 건의했고, 이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이 부유하고 풍족한 촉지방을 진나라의 후방기지로 삼아서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돈과 물자를 제공받고자 했다. 촉을 멸한 후, 촉지방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가 진나라사람들에게 떨어진 과제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촉후라는 허수아비를 내세워서 정치적인 개조작업을 진행했다. 성도성을 쌓아서 군사적인 개조도 진행하였다.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고 사람을 많이 동원한 것은 경제적인 개조작업이었다. 이때의 진나라는 육국의 병사들을 대적할만했다. 그리하여 파, 촉의 지방에서의 물자를 급히 필요하게 된 것이다. 통일은 군사실력의 각축이지만 국력의 비교이기도 하다. 강대한 군대는 강력한 국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왕이 되는 것이다. 이민은 바로 경제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진나라의 혜문제는 명령을 내리는데, 6국의 왕공귀족, 지주부자중에서 진나라와 적이 되었거나, 법규를 어기면, 온 집안이 함께 사천으로 이주해야 했다. 진나라 국내의 범죄자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진나라 혜문왕이 죽은 후, 그의 법령은 자손들에게도 이어졌고, 1세기에 걸친 이주가 계속되면서, 수만에 이르는 이민자들이 파촉역사상 제1차 대규모이민을 불러왔다.

 

진나라에서 사천지방에 첫번째로 이민을 보낸 것은 기원전314년이다. <<화양군지>>의 기재에 의하면, "오랑캐무리들이 여전히 강성하므로, 이민을 많이 보내어 사천지방을 충실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번의 이민규모는 매우 커서, 1집에 5식구가 있다고 보면 개략 5만명가량이 되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성도로 왔다. 일부는 촉으로 들어오는 길가에 자리잡기도 하였다. 사실상 이 5만명은 그저 선구자였다. 진시황제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이민행렬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대다수의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이번의 힘든 이주는 영원한 이별에 다름아니었다. 촉의 땅은 멀어서, 한번 고향과 친척을 떠나게 되면 평생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는 것이다. 촉의 땅에 대하여 그들은 잘 알지 못했다. 어디에 비옥한 경작지가 있는지도 몰랐다. 촉지방 사람들이 하는 '이상한 사투리'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토박이들의 말은 외지인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촉지방 사람들도 고향사람들처럼 순박할 것인가? 길떠난 사람들에게는 이주길의 고생을 하면서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이들을 감싸고 있었다.

 

진나라군대가 남정북벌을 하면서, 한무리 또 한무리의 이민들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지고 사천으로 왔다. 기원전235년, 이주대열에 한 큰 인물이 들어있게 된다. 그는 바로 여불위였다. 이때의 여불위는 진시황에 의하여 직위해제 당하고 유배오는 길이었다. 그는 원래 상인이었고, 젊었을 때는 단신으로 큰 부를 이루었다. 상국의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고, 문신후에 봉해졌던 여불위는 한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객이 반역을 언급하다가 진시황에게 주살당하고, 그 자신도 연루되어 촉의 땅에 유배오게 된 것이다. 여불위는 자기가 수십년 경영했던 정치사업이 허공에 뜬 것을 보고, 촉지방에서 또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몰라서, 비관끝에 음독자살하게 된다. 그리하여 촉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죽는다. 여불위는 아마도 이들 이민자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정치를 장사하듯이 했고, 파산후에는 상인의 가장 극단적인 저항방식을 선택했다.

 

여불위의 축출과 더불어, 그의 가족과 많은 문객들도 진왕조의 유배대상이 된다. 유배는 아주 독특한 형벌의 방식이다. <<한서>>의 기재에 의하면, "진나라법: 죄가 있으면 촉한의 땅에 유배보낸다" 이로 미루어볼 때, 촉의 땅에는 죄인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일부 귀족 상인들도 진나라에서 이주대상으로 삼았다.

 

부자들은 조, 위, 초등의 나라에서 왔다. 집에는 천금을 가지고 있고, 모두 현지의 명문집안들이었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킨 후, 그들은 이미 진나라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돈도 있고 세력도 있었다. 진나라사람들은 이들이 고향에 남아서 일을 저지르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이들을 사천으로 유배보낸 것이다. 그들이 고향에 남아서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전혀 진나라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이었다. 유배가는 사람들도 이를 원했다. 서남의 요지인 사천땅은 진나라의 통치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고, 오히려 이곳에서 장사에 종사하면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다. 조나라에서 온 탁씨의 말은 이들을 대변한다. "내가 듣기로 민산(사천의 산)의 아래에는 옥토가 있고, 아래에 토란도 있어, 굶지는 않는다고 한다...사람들이 시장에 모여 장사가 쉽다고 한다. 그래서 멀리 이주하기를 청했다" 조나라의 탁씨는 적극적으로 사천에 들어온 것이다. 이로써볼 때 이들은 성도로 오는 것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

 

조나라의 탁씨는 임공(지금의 공래)로 왔고, 임공산에 철광이 풍부한데 아무도 캐지 않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면서 대량으로 사천과 운남의 백성을 끌어모아 광물을 캐도록 하였고, 따라간 장인들로 하여금 철로 만들게 하였다. 탁씨는 채광을 하면서 정부에 약간의 은량을 바쳤을 뿐이므로 원가는 거의 들지 않고 이익을 많이 남기는 사업을 하였다. 전국시대때 철기는 사천에서 아직 유행하지 않았다. 그래서 탁씨의 철기는 사천백성들로부터 아주 환영을 받았다. 여러해가 지나서 조나라 탁씨의 재산은 천하제일로 성장했다. 집안의 노비만 천명에 이르렀다. 노나라의 정정(程鄭)도 임공에서 철강주조로 돈을 벌었고, 탁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화양군지>>에 의하면 이들의 재산이 전국시대 문객만 3천명을 두었다는 전문(田文) 즉, 맹상군보다 많았다고 하였으니, 이들 탁씨, 정정의 재산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백성들에게, 고향을 멀리 떠나게 되면 그들의 생활은 이전과 많이 달라진다. 사천지방으로 와서 어떤 사람들은 척박한 밭을 약간 나눠받고,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쉬는 생활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성도에서 장사를 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손재주도 고향에서는 별 것이 아니지만, 사천에 오면 아주 희귀한 재주가 된다. 점차 그들은 정착생활에 적응해갔다. 많은 사람들은 촉지방의 여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점차 촉지방사람이 되어갔다. 그 이후 다시는 사천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점점 촉지방의 사투리를 알아듣게 되고, 촉지방사람들도 이들이 가져온 문화 글자가 점차 낯설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진나라왕들이 바라는 바였다. 진나라왕이 대규모로 이민을 시킨 것은 육국에 대응하는 것 외에도 사천이 개발되어 촉인과 진인이 융합하면서 점차 적대감정이 완화되었고, 진왕조의 후방기지로서 충실히 역할을 해냈다. 효과가 괜찮은 것을 보고서, 진나라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파촉문자를 폐기하고, 촉지방에 소전(小篆)을 보급시켰다. 학자인 동은정은 파촉이 진나라가 극력 문자통일을 시행한 첫번째 지방이라고 보고 있다.

 

이민자들이 사천지방에 오는 것과 동시에 대규모의 진나라군대도 따라왔다. 촉국이 망하고 사천으로 이주해 들어간 귀족, 범죄자들은 반란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으므로 진왕이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진왕의 지시하에 진나라장수인 진장, 장약, 장의등이 대군을 이끌고 촉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사천에 투입된 부대는 분명 진나라의 정예부대일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지금까지 조사해본 진나라의 공식사료중에 이 진나라군대의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다. 진한시기에 국가를 위하여 변방을 지키는 일은 국가에서 가장 영예로운 일이었는데, 왜 진나라의 사관들은 변방을 지키는 이들 병사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설마 이것이 진왕조의 최고국가기밀이라도 된단 말인까. 전국시기에, 진나라군대는 소금과 장극을 들고 중국각지를 누볐고, 사천에 들어온 진나라군대는 분명 그중 극히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사료를 통하여 이들 신비로운 군대의 행적을 알 수는 없었다. 진나라사병은 1992년년이 되어서야 신비의 면사를 벗었다. 1992년 3월, 성도 용천역에서 수백개의 묘장이 질서정연하게 그의 만평방미터의 구역에 퍼져 있었는데, 묘의 주인의 신분이 금방 드러났다. 그들이 바로 2000여년전에 사천으로 건너온 진나라병사였던 것이다.

 

묘장은 4개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아마도 군대에서 서로 다른 병과를 표시하는 것같다. 역사적으로 묘의 방향은 죽은 자의 죽기전의 신앙과 희망을 알 수 있다. 고촉인들의 묘장은 고향인 민산을 향하고 있다. 진나라사람들은 동북방을 향하는데, 분명히 그들의 고향쪽일 것이다.

 

이들의 묘는 그다지 후하게 매장되지는 않았다. 이로 봐서 이들의 신분이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묘장에서 나온 것들은 당시 진나라사병들의 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예리한 동모(銅矛)가 그들의 무기였다. 진왕조의 화폐인 진반량이 그들의 묘에서 출토된다. 그리고 식기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도기도 나온다. 이외에 낫, 도끼등도 발굴되었다. 이들 사병들은 변방을 지킬 뿐아니라 스스로 자급자족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곳에 묻혀 있는 진나라병사들이 모두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중 한 병사의 이름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양비(楊悲)"이다.

 

묘의 발굴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은 하나의 동인(銅印)을 발굴하였는데, 도장에는 양비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이 양비라는 병사는 분명히 군내에서 문서업무를 담당하던 하급군인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군대에서 명령을 반포할 때는 공문에 도장을 찍는다. 많은 사병들과 마찬가지로 양비도 이 곳에 묻혔다. 그와 일생을 함께하였던 도장도 함께 묻힌 것이다. 2000여년이 지나서 양비의 유물은 행운스럽게도 발굴되어 후세인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