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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초회왕(楚懷王) : 항우와 유방에 묻혀버린 인물

by 중은우시 2008. 8. 27.

글: 신유천하(神遊天下)

 

초한의 풍운은 군웅들이 각축을 벌여,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게 만드는 시기였다. 당시를 회고하자면 사람들은 항상 호기가 하늘을 찌르는 항우, 교활하지만 대범한 깡패황제 유방, 백전백승의 전신 한신, 장막에 앉아서 천하를 요리하며 천리밖의 전투를 결정짓는 장량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역사무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한때를 풍미했던 인물은 잊혀져 버렸다.

 

그 사람은 바로 초회왕 웅심(熊心)이다. 나중에 항우가 의제(義帝)로 올리는 인물이다. 웅심의 일생은 변화가 많고 기구했다. 만일 역사의 기회가 닿지 않았다면 아마도 일생동안 양이나 기르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풍운변환은 그를 역사무대로 끌어냈다. 그는 짧은 기간동안 담량과 지모를 선보였고, 짧기는 했지만 역사의 무대를 빛냈다.

 

진나라말기, 군웅이 들고 일어나 천하를 서로 가지고자 했다. 항량(項梁)이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초나라를 회복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자기가족이 대대로 초나라의 장군을 지냈다는 점을 내세워서 많은 병사들과 의군을 모집했다. 이때 기인 범증(范增)이 그에게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초왕을 세워서 민심을 수습하자. 이때 웅심은 혈통 하나를 가지고 초회왕에 오른다. 그런데, 이때는 그저 왕으로 세워지기는 했지만 허수아비였다. 사기의 기재에 의하면, "진영(陳)을 초나라의 상주국(上柱國)으로 삼아, 다섯 현을 봉지로 주고, 회왕과 우태(台)에 있었다.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초회왕은 전장터에서 멀리 떨어진 남방에 보내어져 있었으며 항량이 대권을 혼자서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진영으로 하여금 초회왕을 보좌하게 한 것은 첫째, 진영은 야심이 없고, 둘째 진영의 병권은 모조리 항량이 거두어 갔기 때문이다.

 

상황이 계속 이러했다면, 웅심은 아마 평생 허수아비로 지내다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항량이 병사를 이끌고 진나라군대와 싸웠는데, 잘못해서 궤멸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 자신도 전사한다. 이제 우리의 초회왕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먼저, "초나라병사가 정도에서 격파당하였다. 회왕은 두려웠다. 우대의 팽성에서 항우(項羽)와 여신(呂臣)의 병사를 거두어 스스로 통솔했다. 여신을 사도로 삼고, 그의 부친 여청을 영윤으로 삼았다. 패공(유방)을 탕군장으로 하며 무안후에 봉하였고, 탕군의 병사를 이끌게 하였다"

 

항량의 죽음은 전체 초나라군대에 큰 타격이었다. 회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바로 상황을 수습한다. 그의 담량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는 권모술수와 수단이 아주 뛰어남을 드러낸다. 즉시 항우와 여신의 병권을 빼앗는다. 그리고 여씨가족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유방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이것은 음미할만한 부분이다. 왜 유방의 병권은 빼앗지 않았을까? 왜 항우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이것이 바로 초회왕의 권모술수인 것이다. 초회왕은 원래 항씨집안에서 허수아비로 세웠으므로 초회왕은 가급적 항씨집안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하물며 항우는 항씨집안의 실력파인 대표이므로 먼저 타격을 가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여씨가종은 병권을 빠앗긴 후에 다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항씨집안과 대항하는 대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그는 항우는 제후에 봉하지 않고, 나중에 겨우 허명뿐인 노공에 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 유방의 병권은 빼앗지 않았는가? 그리고 나중에 그로 하여금 일방의 패주가 되도록 허용했는가? 내 생각에 이것은 바로 초회왕의 항우에 대한 독랄한 조치로 보인다. 유방은 첫째 군대가 적어서 빼앗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유방의 신분은 특별한데, 그는 항우의 아래에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의 소독립집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유방의 신분을 끌어올려 항우와 동등한 위치로 만들어 주는 것은 항우와 유방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좋은 방법이다. 유방은 항씨집단의 직계인물이 아니었으므로 항씨집단과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방을 끌어내서 항우와 맞서게 한 것이다.

 

회왕의 이 수법은 정말 뛰어났다. 권모술수의 대가라고 하여도 모자라지 않다.

 

당연히 여기에서 회왕이 병권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첫째, 초나라군대는 구성이 복잡했다. 항량의 수하에 각 세력은 모두 자기의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항량이 살아있을 때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항량이 죽자, 그의 지위를 계승할 실권인물이 없었다. 이때 바로 명의상의 군주인 초회왕의 역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항량이 죽었으므로, 항우가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항우는 비록 당시 전공이 혁혁했지만, 항우는 항량이 총애하는 장수로 독립부대를 이끌고 제 역할을 다 해왔다. 그러나, 전군을 통솔하지는 않았다. 용차(龍且), 영포(英布), 오예(吳芮), 여신등의 실권파들은 항우를 후계자로 반드시 인정하지는 않았다. 항우는 항씨집안에서는 배분이 낮다. 항량이 살아있을 때는 존중을 받았지만, 죽고나서까지 반드시 모든 항씨들이 그를 받드는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항백(項伯)과 같은 배분이 높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사기에는 항우전기를 썼는데, 다른 항씨의 활동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항씨들중에 실력자가 없었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항씨중에서 항량이 살아있을 때에도 일부 병권을 장악했던 기록이 있다. 즉, 장한이 위나라를 공격할 때 어떤 항씨장수가 병사를 이끌고 구원을 갔다. 이것은 항후가 가족중에 유일하게 병권을 장악했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나중에 초회왕이 항씨집안을 탄압하자, 항우는 자신의 능력으로 초회왕에 대항하는 항씨집안의 대표가 된다.

 

초회왕의 당시 상황은 한편으로 진나라의 위협, 다른 한편으로 항씨집안의 위협으로부터 버텨야 했다. 이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자기의 정치수명은 끝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유명한 정치선언을 발표한다: "먼저 관중에 들어간 자를 왕으로 한다(先入關者爲王)". 각 제후들로 하여금 함께 진나라에 반기를 들게 하고, 다시 유방을 보내어 관중으로 진공하게 한다. 항우도 진나라를 치고 싶었다. 그리하여 유방과 같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초회왕은 항우가 병권을 장악하는 것을 꺼렸고, 항우에 대하여는 일찌감치 계책을 마련해 두었다.

 

후세사람들이 항우가 유방을 진왕(관중왕)에 봉하지 않은 것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것은 모두 권력투쟁이었다. 항우는 초회왕마저도 갈아치울 수 있었으므로, 자연히 초회왕의 말을 지킬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이 정치선언은 항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병권은 항우가 나중에 스스로 빼앗은 것이다. 초회왕의 뜻대로라면 항우는 그저 희생의 대상일 뿐이었다.

 

진나라가 거록을 포위했을 때, 항우에 대한 초회왕의 처리방안은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송의(宋義)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병권을 확립하고, 병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해주러 간다. 도중에 항우를 죽여버리고, 다시 제나라와 결맹하여 함께 진나라를 친다.

 

우리는 송의의 행위를 볼 수 있다. 안양에서 전혀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항우를 참한다는 명만 내렸다. 그리고 아들을 제나라로 보냈다. 자신은 술을 마시고 놀았다. 당시 날은 춥고 큰 비가 내려서 병사들은 춥고 배고팠다. 송의가 처음에 항량에게 권했던 내용이나, 나중에 초회왕이 그를 무척이나 신임한 것을 보면, 이 자는 병법을 알고 어느 정도 수단도 있는 자였다. 그렇지 않다면, 초회왕이 똑똑한데 이런 중요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을 리가 없다. 그런데, 송의는 이때 아주 멍청한 짓을 하고, 그의 의도를 전혀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내 생각으로 이것은 고의로 항우를 자극한 것이다. 항우에게서 핑계거리를 찾아내어 죽여버리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송의의 계획일까? 아니면 초회왕의 계획일까? 나는 아무래도 초회왕의 아이디어로 보인다. 먼저 송의는 뿌리가 깊은 장수가 아니었다. 앞에 진나라의 대군이 있다는 점 이외에도 부하병사들 사이에서도 그는 뿌리가 없었다. 만일 그가 항우를 죽인다면 그에게 무슨 이점이 있는가? 군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회왕은 항우를 죽임으로써 당당하게 항씨집안의 병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초나라군대를 장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진나라군대에 대하여는 초회왕도 그다지 자신이 없었던 것같다. 그래서 제나라와 결맹한 후에 진나라와 전투를 벌이려고 한 것이다. 송의가 안양에서 46일간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동안, 초회왕은 아무런 의사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로써 볼 때 그의 행동은 초회왕의 의사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송의가 아들을 제나라에 보낸 것을 보면 제나라와의 결맹은 기정방침임을 알 수 있다. 당연하 한가지 언급할 것은 송의가 초회왕의 총애를 받기는 해도, 그는 실력자가 아니었으므로 군대를 장악하기 쉽지 않았다.

 

당연히 초회왕도 항우를 가볍게 보지는 않았다. 항우가 이번 음모의 판에서 송의를 죽이고 승리하고, 다시 초회왕의 명령을 위조하게 된다. 아마도 송의가 항우를 죽였다면 초회왕의 명령을 직접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모든 장수들은 항우에 굴복하다. 그들은 모두, "먼저 초나라를 세운 것은 장군의 집안입니다. 장군께서 난적을 주살해주십시오" 이 말을 의미심장하다. 여러 장수들은 사실을 얘기한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 집안일이다. 우리와 관계없다. 이로써 보면 여러 장수들은 항씨집안과 초회왕과의 권력투쟁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우의 거록에서의 대승리는 초회왕의 항씨집안에 대한 모든 계획을 헛되게 만들어 버렸다. 항우의 실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초회왕은 다시 한번 위대한 전략을 짠다. 그것은 바로 조고(趙高)와 관중을 나누기로 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사기의 <<진시황본기>>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패공(유방)이 수만명을 무관에서 도살한 후, 사람을 몰래 조고에게 보낸다. 조고는 진이세가 노하여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자영은 그 아들 둘에게 말했다: '승상 조고가 진이세를 망이궁에서 죽이고, 여러 신하가 그를 죽일까 두려워하여, 나를 세웠다. 내가 듣기로 조고는 초나라와 약속을 하였는데, 진나라 종실을 멸하고 관중의 왕이 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고조본기>>에는 "위나라 사람 영창을 사신으로 진나라에 보냈는데, 사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장한이 군대를 이끌고 조에서 항우에게 항복했다." "조고가 이미 진이세를 죽였고, 사람을 보내어 관중을 나누어 왕이 되고자 하였다. 패공은 이를 속임수라고 생각했고, 장량의 계책을 써서, 여생, 육가를 보내어 진나라장수들에게 이로운 점을 말하였고, 무관을 급습하여 격파했다"

 

여기에서 핵심은 조고와 합의한 것이 유방인지 초회왕인지 하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초회왕이 주모자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본다. 당연히 사료에서는 그가 주모자라는 증거를 찾아볼 수도 없고, 그가 주모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볼 수도 없다.

 

원인은 아래와 같다.

 

1. 당시 왜 연락을 했고, 누가 먼저 연락하자고 하였을까? 전백찬은 책에서 초회왕은 진나라군대의 승리에 놀라서 화의를 하고자 했다고 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적당하지 않은 것같다. 초회왕은 똑똑한데, 자신과 진나라는 서로간에 해결될 수 없는 갈등과 모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화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당시 진나라가 우세한 상황하에서 어찌 관중을 나누겠다고 동의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생각에 이번 연락은 분명히 항우가 왕리를 무찌른 다음에 제후들이 우세를 점한 상황하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공동이익이라고 할 것이 있다. 서로 얻을 것이 있으므로 연락이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고대의 사람들은 멍청했다는 설명으로 불합리한 현상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내 생각에 어떤 일이든 반드시 원인이 있다. 그리고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멍청이가 아니다. 많은 경우 형세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항우가 왕리를 격파했을 때, 쌍방간에 뭘 협상할 것이 있을까? 진나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진나라의 대세는 이미 기울었고, 제후들에게 조만간 질 것이 분명해 졌다. 당연히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관중을 나누어갖는 것이 그로서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그는 진나라황실의 사람도 아니고, 제후들과도 무슨 해결하지 못할 모순이나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연히 매국의 조건으로 천하를 나누는데 참여하자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초회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방이 주모자인가 아니면 초회왕이 주모자인가? 유방이 조고에게 연락한 것은 일찌감치 관중에 들어가고 싶어서였고, 병력을 지나치게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조고와 연락하는 이유가 충분하다. 그런데, 이후의 약속에 대하여는 해석이 쉽지 않다. 유방이 만일 그러한 약정을 했다면 그것은 그냥 임시방편으로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초회왕에게는 화의를 할 이유가 더욱 충분하다. 항우는 진나라군대를 대파한 공로를 내세워 상장군에 오르고, 공개적으로 초나라는 우리 집안에서 세웠다고 말하고 다녔다. 일찌감치 초회왕과 맞설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초회왕으로서는 항우에 대적할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했다. 조고와 협력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중의 하나이다. 만일 조고가 관중을 들고 투항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정치적인 패를 하나 더 얹어주는 것이 된다. 항우의 전공도 어느 정도 효과를 감쇄시킬 수 있다. 관중을 유방에게 주나, 조고에게 주나 그의 입장에서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항우가 통제하지 않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중에 유방과 조고에게 나누어가지라고 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유방과 조고도 찬성할 뿐아니라, 이후 권력투장에서도 더 큰 실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3. 초회왕이나 유방은 모두 조고와 화의를 하는 것이 이로웠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제안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명확한 일이다. 어쨌든 유방은 초회왕의 부하가 아닌가? 조고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방은 그와 협상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방은 그에게 관중을 나누어줄 권한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약정중에는 관중은 유방을 왕으로 한다는 것인데, 조고가 어찌 유방이 그에게 땅을 나눠줄 것이라고 믿을 것인가. 유방이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항우가 동의할 것인가? 초회왕이라는 유방과 항우의 명목상의 윗사람의 말이라야 조고가 믿을 것이다. 초회왕은 초에 있고, 조고는 진에 있으므로 서로 이해충돌이 없다. 그러므로 동맹을 맺어서 항우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4. 당시의 반응을 보자. 유방은 사신을 보내어 조고를 만나게 했다. 조고는 즉시 진이세를 죽여서 유방의 요구에 응했다. 보기에 조고는 이번 약속을 아주 믿었던 것같다. 그리고 조건도 다 얘기된 것같다. 그런데, 유방은 이것을 속임수라고 생각했고, 약속을 휴지조각으로 생각했다. 그저 하루빨리 관중에 들어가 점령하고자 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보자면 유방이 약속의 주모자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는 약정에 대하여 믿음이 없었고, 실력이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방이 당시 파견한 사자는 위나라 사람인데, 왜 유방의 심복을 보내지 않았을까? 이런 일을 외부사람에게 시킬 수 있을까? 이는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초회왕이 담보될 사람을 찾은 것이고, 다른 나라의 사람을 담보로 해서, 조고를 믿게 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5. 한단이 패배한 후, 조고는 왜 한단을 관중으로 불러서 지키게 하지 않았을까? 만일 그랬다면 유방이 그렇게 쉽게 관중으로 들어와서 점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일 평화협상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쉽게 설명이 된다. 조고는 뒷일을 보장받았으므로, 자연히 실력파를 불러들여서 골치아프느니, 그와 항우가 서로 싸워서 양패구상하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장한이 항복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마도 관중의 장수들은 이러한 평화협정에 대하여 귀로 들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관문을 수비하는데 그다지 열심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래서 유방이 쉽게 관중으로 치고 들어간 것이고, 나중에 자영이 조고를 죽였지만, 저항할 방법이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전략계획은 비록 역사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어서, 역사학자들이 그다지 주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영향은 적지 않다. 이렇지 않았다면, 유방이 그렇게 가볍게 관중을 점령할 수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기 힘들다. 진왕조도 이렇게 빨리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진나라가 죽기살기로 저항했다면, 장한을 불러들였다면, 아마도 진나라의 멸망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이 나중에 물거품이 되기는 했지만, 영향은 적지 않았고, 역사를 앞으로 나가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진나라의 내분이후, 초회왕이 관중을 나누어 항우에 대항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된다. 항우의 진나라군대에 대한 승리 및 이익분배를 통해서 많은 제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 관중으로 들어가서 천하를 나누어주게 된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라면 초회왕이 세운 유방으로서는 그저 한켠에 비켜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항우가 팽성을 수도로 정한 것이 잘못된 의사결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잊은 것이 있다. 항우는 관중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수하의 각 세력들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가장 핵심은 바로 그 본거지에 명의상의 군주인 초회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회왕의 세력을 소멸시킬 필요가 있었다. 초회왕의 세력을 없애는 것이 항우로서는 급선무였다. 그렇지 않으면 초나라는 분열된다. 항우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고자 했다. 초회왕이 계속 허수아비로 남아있어주기를 바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항우의 지모가 부족했던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전체 과정을 보면 항우가 지모가 부족했던 것은 아니고, 초회왕이 죽어라 항우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항우도 천자를 끼고 제후에 명령하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초회왕이 말을 듣지 않았고, 천하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었다.

 

항우가 초회왕을 남쪽으로 쫓아보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항우는 일찌기 강도를 수도로 정한 적이 있었고, 친히 손을 써서 초회왕을 남방으로 쫓아보낸다. 초회왕은 병력도 없고 권력도 없다. 당시 팽성의 각 제후들은 모두 항우나 유방을 따라간 것이 아니므로 아직도 많은 제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항우가 제후들을 힘으로 밀어부치자 하나 둘 입장을 바꾼다. 여기에는 여씨가족과 진영이 포함된다. 물론 일부는 초회왕을 따라 남쪽으로 가기도 한다.

 

초회왕은 권력을 모두 잃은 상황하에서, 여전히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기에 따르면, "여러 군신들이 그를 배신했다. 그리하여 형산, 임강왕으로 하여금 초회왕을 강중에서 죽이게 몰래 명령한다".

 

이리하여 일대의 권모술수의 대가이며 초한의 중요한 정책결정을 하였으나, 후세에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인물인 초회왕은 역사무대에서 물러나게 된다.

 

[후기]

 

초회왕의 죽음에도 약간의 의문이 있다. 사기에는 항우가 명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초회왕을 죽인 자는 형산왕, 임강왕 그리고 영포라는 것이다. 거의 남방의 3대왕이 모두 나서서 회왕을 죽이는데 참가한 것같다. 그렇지만 영포가 초회왕을 죽인 진짜 인물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초회왕을 죽이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가? 이로써 보면 초회왕의 실력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세 왕이 합공을 한 것이 아닐까?

 

또 하나의 문제는 사기에서는 항우가 시킨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 뒤에서 시켰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이처럼 대담하게 공격해서 죽였는데, 왜 암중으로 뒤에서 시켜야 했을까? 게다가 영포는 항우와 사이가 좋지 않다. 항우가 그에게 제나라를 공격하라고 했는데, 가지 않았고, 항우와 유방이 싸울 때도 먼산의 불구경하듯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가 어찌 그에게 초회왕을 죽이는 일을 몰래 지시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영포가 유방에게 투항한 후에 아무도 초회왕살해사건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이외에 초회왕이 먼저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피살되는데, 항우가 밀명을 내릴 필요가 있었을까?

 

항우가 초회왕을 암살했다는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유방이 항우를 토벌하러 갔을 때이다. 낙양일대에서 한 노인이 계책을 내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유방이 항우의 10가지 죄를 면전에서 언급할 때, 초회왕을 죽인 것은 아홉번째였다. 첫번째는 그를 관중왕에 봉하지 않은 것이고, 두번째는 송의를 죽인 것이다. 송의를 죽인 것이 초회왕을 죽인 것보다 더 큰 죄인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방도 초회왕이 죽은 것에 대하여 항우가 시켰다고 보거나, 항우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초회왕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이 삼왕의 근거지에서였으므로, 삼왕이 그를 죽여버린 것이다. 그리고 유방은 이 일의 책임을 항우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다만, 자료가 너무 적다보니 이것도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