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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의 진료기록

by 중은우시 2008. 1. 10.

글: 자유주부

 

현재 남아있는 청나라궁정의 의안(醫案) 기록을 보면, 광서제의 병안(病案)기록이 가장 많고 가장 완전하다. 광서제는 23년간 재위하였고, 그중 10년간은 서태후에 의하여 연금되어 있었다. 광서제의 병안기록은 1000여개이다. 그런데, 광서제의 변법유신전의 병안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고, 겨우 76건이다. 그런데, 변법유신운동이 실패한 후, 영대에 연금되어 있는 10년동안의 병안기록은 900여건에 달한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매년 어의가 90여건이나 병을 살폈다는 것이 된다. 특히 광서34년, 그가 죽기전 1년동안 3월부터 7월까지만 보더라도 210일동안 260번의 병안기록이 있다. 그를 진맥한 어의의 숫자는 30여명이다. 그 중에서 가장 횟수가 많은 사람은 진병균(陳秉鈞)으로 그가 광서제의 병을 진맥한 기록은 100여건에 이른다.

 

광서제의 병은 병안기록으로 보면, 어의들이 많이 강조한 것은 맥침현수(脈弦數)라는 것이고 주요 증세는 간장욱열(肝臟郁熱), 간왕비약(肝旺脾弱), 심신양휴(心腎兩虧)등이다. 광서제는 스스로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고, 자주 이명(耳鳴)현상이 있다고 느꼈다. 어의들은 그가 천성적으로 허약한 체질을 타고나서 그런 것이라고 보았고, 치료는 모두 이런 증상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치료효과는 그다지 나타나지 않았다.

 

광서제의 치료에 참여한 사람과 사건중에서 몇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하나는 프랑스 주북경대사관의 의사인 다덕복(多德福)이다. 그는 광서제가 연금된지 27일후에 궁중에 들어가서 광서제를 진찰한다. 그는 광서제가 스스로 진술한 병세 및 광서제에 대한 화학검사에 근거하여 광서제가 얻은 병은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요화장증(腰火長症) 즉, 신장염(腎臟炎)이라고 진단한다. 다덕복은 신장의 기능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사람의 젖이나 우유를 먹도록 권했다. 그리고 유유에 유당을 첨가하도록 했다. 만일 약을 쓴다면, 다덕복은 외양지황말(外洋地黃末)을 쓰거나 혹은 발화관(拔火罐)을 쓰도록 했다. 다덕복은 이렇게 하면 반드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광서제의 신변에 있던 어의들은 다덕복의 의견을 채택하지 않고, 여전히 전통중국의학의 방식대로 치료를 진행한다.

 

광서제는 1년여의 치료를 통하여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서27년에서 광서33년7월까지는 의안기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병세가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자료를 유실해서인지는 현재로서 파악하기 힘들다.

 

광서33년(1907년) 7월부터, 우리는 새로운 어의가 나타나서 광서제를 위한 치료행렬에 가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역균(力鈞)이다. 이해 7월부터 8월까지는 역균이 광서제의 병을 치료한 유일한 어의이다. 다른 어의는 하나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는 광서제를 위하여 23번이나 진맥했다. 이 역균은 바로 중의와 서의를 모두 배운 사람이었다. 그는 병리를 언급할 때는 서양의학이론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그의 서양의학이론은 아주 얄팍했다. 그래도 광서제를 위하여 1개월간이나 치료하였으니, 아마도 그가 중서의학의 장점을 모두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같다. 그러나, 1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시 역균은 진병균, 조원항(曹元恒)등 전통중의들과 공동으로 진료를 했다. 그러나, 병세는 점차 위중해졌고, 어의들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광서제의 병이 오래되자, 어의들의 치료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의 어지럼증은 전혀 치료되지 않았고, 계속 재발한다. 그래서 너희는 계속 약을 먹게 하고, 각종 환산탕고등 처방을 이렇게 많이 내놓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지 않느냐. 지금은 또 다른 병세도 여러개 나타나니, 아무래도 너희가 아무렇게나 내놓은 처방약때문인 것같다" 이로써 볼 때 광서제는 어의들이 올리는 처방에 대하여 아주 고민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는 한번은 가장 많이 진맥한 진병균에게 직접 질책하며 말했다. "매번 쓰는 약은 모두 증세에 맞춘 것이 아니다. 진맥하는 것이 매일 출근하여 일하는 것같으니,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병세를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그저 처방만 내리고 끝내는 것같다. 그러면서도 명의라고 할 수 있는가? 어찌 이렇게 아무렇게나 처방을 내리는가" 진병균에게 직접적인 책망을 한 후 반달동안 그에게 자기 병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실 어의가 황제의 병을 보는데 어찌 경솔하게 하였겠는가. 광서제의 병이 호전되지 못하자, 어의들에게 화가나서 이런 말을 한 것일 것이다.

 

광서제가 임종하기전 4개월간, 각지에서 추천한 명의들도 궁중으로 와서 치료에 참가했다. 그중에는 두종준(杜鍾駿), 장팽년(張彭年), 주경도(周景濤)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다른 어의와 함께 광서제의 치료에 참가했다. 그러나, 광서제의 병세는 너무나 복잡했다. 최후의 1달여동안, 광서제의 요통은 아주 중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스스로 약을 너무 많이 먹었고, 약을 먹으면 먹을수록 병이 심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의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처방을 내릴 때는 병확하게 치료효과가 있는지 여부를 알려달라. 약을 써서 병을 시험해서는 안된다. 사실 어의들도 잘 알고 있었다. 광서제의 병은 이미 뼛속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병안기록에 이를 숨기기도 하였다. 당시 두종준은 그가 쓴 <<덕종청맥기(德宗請脈記)>>에서 그가 광서제의 진료에 참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일찌기 매일의 진료기록에 광서제의 병이 아주 위급하다는 내용을 기재하고, 대신들에게 이 병은 4일내에 위험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무대신들은 그가 이런 내용을 기록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았고, 그렇게 쓰게 되면 황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중에 두종준은 할 수 없이 당일의 의안기록에서 "이 병은 난지 4일이 되지 않아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삭제해버렸다.

 

두종준의 예측은 정확했다. 이틀이 지나지 않아, 광서제는 혼미상태에 들어간다. 두종준과 주경도, 시환(施煥)의 세 사람을 불러서 진맥하게 한다. 그들은 진맥한 후에 실제상황을 내무대신에게 보고한다. 오늘 저녁을 넘기기 히믈 것이니, 더 이상 처방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그러나, 대신들은 그들로 하여금 처방을 쓰게 한다. 뭐라고 써도 좋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몇몇의 어의는 황상을 위하여 생맥산을 처방하고 그 약을 바치기도 전에 광서제는 사망했다.

 

광서제가 죽은지 3일째 되는 날, 어의들에게 재난이 닥쳤다. 조정은 두 개의 조서를 내렸다. 첫번째는 각성에서 추천하여 궁에 들어온 어의 진병균, 주경도, 두종준, 조원항등이 모두 들어있었는데, 모조리 강급시키고 어의로는 남긴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태의원의 원사 장중원, 어의 전순, 의사 충훈등의 사람을 처벌하는 것인데, 그들의 관직은 면직시키지만 일은 계속하게 하는 것이었따. 어의들은 비록 처벌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명은 보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