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의 사인은 비소중독이었다

by 중은우시 2008. 11. 3.

글: 신화망

 

100년전, 즉 광서34년 십월 이십일일(1908년 11월 14일) 저녁, 북경 중남해 영대 함원전에서 38세된 광서제는 쓸쓸히 세상을 떴다. 다음날 정오, 청말에 정권을 반세기동안 장악하고 있던 서태후도 중남해 의란전에서 죽었으니, 향년 74세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는 진동했다. 해외에 도망했던 보황당(保皇黨)은 한편으로 광서제를 위하여 조문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거 서태후와 원세개를 광서제를 살해한 주범으로 지적했다. 중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었고, 의론이 분분했다.

 

그러나, 의심은 의심일 뿐이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아무도 광서제가 피살당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그리하여, 광서의 사인은 역사상 하나의 풀어지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따.

 

시간은 21세기에 들어, 하나의 우연한 기회에 이 의문에 둘러쌓인 청나라궁중의 미스테리가 풀렸다. 광서제가 죽은지 100년만에 마침내 풀린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언급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종리만(鍾里滿)이다.

 

2003년, CCTC 청사(淸史)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하북 역현에 있는 청서릉(淸西陵)을 방문했는데, 당시 PD는 종리만이었다.

 

문화재전문가가 1980년에 광서제 및 융유황후의 관을 정리한 적이 있고, 일부 유물이 청서릉관리처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후, 여러해동안 청사의 연구 및 광서의 죽음에 흥미를 지니고 있던 그는 광서제의 진실한 사인을 규명하여, 이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CCTV가 찍은 광서사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는 광서제의 사인을 탐구하는 전과정을 촬영하게 된다.

 

그러나, 이 20부짜리 대형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막 후기제작작업에 들어갔으므로, 시청자에게 상영되기 전에 비밀유지를 하려는 생각에서 종리만은 그저 간단하게 상황을 소개만 한다.

 

당시, 아무런 근거나 자신이 없는 상황하에서, 종리만은 하북성문물국과 보정시문물관리부서 및 청서릉문물관리처의 동의를 받아, 광서의 두 가닥 머리카락을 중국원자력과학연구원 반응퇴공정연구설계소 29실에 보내어 측정을 하게 의회한다. 이때는 아무도 최종적으로 무엇이 발견될 지 몰랐다.

 

비록 종리만의 애매한 소개만으로는 취재하는 기자가 전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웠찌만, 청서릉문물관리처의 주임인 경좌거가 광서사후에 능묘가 도굴되고 유물이 보관된 상황을 설명해주어, 최소한 기자는 이번 연구기초가 진실하고 믿을만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경좌거에 따르면, 광서제가 죽은 후, 그의 시신은 흙에 묻힌 후에도 편안히 지내지를 못했다. 1938년 가을, 광서제의 숭릉은 신원불명인 무장인원에게 도굴당한다. 도굴범은 광서제의 관의 남쪽편을 깨고서 직경 1미터의 둥근 구멍을 만들었다; 융유황후의 관은 두껑이 열렸다. 관내의 부장품은 기본적으로 모두 도굴당해서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1980년, 문화재부서는 숭릉의 지궁에 대하여 보호성 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광서제의 관이 비교적 건조하여, 몸에 있고 있던 의복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며, 많이 낡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의복이나 덮개는 없었다.

 

관내외의 유물과 유골을 정리한 후, 광서와 융유의 유골은 각각 플라스틱주머니에 넣어져서 다시 특별히 만든 나무상자에 넣어진다. 그 후에 나무상자는 지궁내의 두개의 관내에 놓여지고, 최종적으로 황제와 황후의 관을 수리한다.

 

광서의 사인을 탐구하기 위하여, 이룹 광서와 융유의 유물을 업무인원들이 수거한다. 그리고 각각 표시를 한 후에 상자에 담아서 청서릉문화재창고에 보관된다.

 

1980년에서 2003년까지, 과제조가 샘플을 가져가기전의 23년간, 이들 광서제 유물은 청서릉의 창고속에 보관되어 있었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광서사인을 해결할 물증인 이들 광서제의 유물은 보존상태가 좋고, 진실이며, 믿을만 했다.

 

숭릉은 다시 밀폐되었으므로, 다시 관을 열어서 검사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연대가 오래되고, 검사재료가 부족하여 연구업무는 아주 곤란을 겪었다. 과제조는 사건해결의 사고방식을 정보의 탄생, 전파, 처리, 환원, 응용등의 원리를 이용하고, "중성자활성화" "X선형광분석" "원자형광광도" "액상색층분석/원자흡수연용"등 일련의 현대적 전문기술을 이용하여 종합분석, 모의실험, 쌍방향추리, 다차원논증등을 전개했다. 서릉에 보존된 광서의 머리카락, 의복, 유골에 대하여 검사와 연구를 했고, 결국 광서제가 사망한 수수께끼를 밝혀내게 된 것이다.

 

왜 머리카락을 검사대상으로 삼았는가?

 

원래, 머리카락은 인체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그것은 인체대사에 참여하고, 특정시기에 인체에 축적된 어떤 원소정보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머리카락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의 미량원소함량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인체의 미량원수섭취수준을 알 수 있다. 나아가서 미량원소의 인체내에서의 변화상황, 인체와 외부환경과의 관계연구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성인은 매일 0.35 내지 0.5밀리미터가 자라고, 1개월에 1센티미터가 자란다. 즉, 1센티미터의 머리카락은 인체내의 약 1개월간의 신진대사의 역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연구분석과정에서, 정확하게 광서제가 죽었을 때의 인체내의 미량원소상황을 검측, 추단하기 위하여, 연구자들은 광서제의 머리카락을 깨끗이 씻어 말린 후, 다시 1미리미터길이의 여러단계로 잘라서 각각 측정했다. 결과에 따르면, 광서제의 두 개의 머리카락의 절단부분에서 고농도의 비소(As)가 발견되었다. 가장 높은 비소함량은 2404밀리그램/그램이어서 정상인의 두발에서 볼 수 있는 비소함량인 1-10밀리그램/그램을 훨씬 넘어섰고, 각 잘린 머리카락의 단계마다 함량의 차이가 컸다.

 

비소는 자연계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유황화합물과 산소화합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웅황(雄黃, 이황화비소), 자황(雌黃, 삼황화비소), 비상(砒霜, 삼산화비소)등이 있다. 그중 비상(삼산화비소)은 극독인 비소화합물이다.

 

광서제의 머리카락에서의 비소함량을 정확히 하기 위하여  연구자들은 융유황후, 청나라때의 초료관 및 현대인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같은 시대, 같은 환경, 같은 성별의 비소측정을 했다. 결과적으로, 광서제의 몇 군데 머리카락에서는 최고함량이 현대인의 샘플에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고, 각각 융유황후의 261배, 청나라때 초료관의 132배가 되었다.

 

광서제 머리카락의 비정상적인 비소함량이 장기간 한약인 웅황등을 복용함으로 인하여 만성 비소화합물중독이 된 것인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연구자들은 현재의 만성비소화합물중독인 사람의 머리카락에서의 비소와 비교실험을 해보았다. 결과로 나타난 것은, 광서제의 머리카락에서의 최고비소함량은 만성중독환자의 최고함량보다 66배나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소의 분포곡선이 만성비소화합물중독자의 비소분포곡선과 완전히 달랐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광서제의 머리카락에서 나온 비소함양은 비정상적이고, 스스로 한약을 복용함으로 인하여 생긴 만성비소중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서제의 머리카락에서 나온 높은 비소함량은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이 문제를 확실히 해결하기 위하여, 연구자들은 먼저 광서제의 관내외의 환경에서 샘플을 뽑아 비소함량검사를 했다. 검사결과: 광서제머리카락의 최고비소함량은 그 관내의 물품에서 측정된 것의 83배였고, 묘내외에서 샘플로 채취한(관두껑의 흙 포함) 것의 97배였다. 환경샘플에서의 비소함량은 광서제머리카락의 비소함량보다 훨씬 적었다. 이로써 환경오염의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연구자들은 다시 비소물질 침포모의실험을 하게 된다. 결과로 나타난 것은, 외부의 비소화합물이 자신의 신체내의 신진대사를 거치지 않고도 머리카락내에 흡착되거나 삼투될 수 있다. 연구의 전개를 ㄱ쳐, 주위환경물질에 의하여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나니, 광서제 머리카락의 대량의 비소의 유일한 출처는 광서제의 부패한 시신밖에 없었다.

 

광서제의 유체가 바로 머리카락의 비소의 유일한 출처일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높은 비소화합물을 도대체 무엇인가? 이들 고농도의 비소는 주로 시체의 어디에 남아 있을까? 그 화합물종류와 총량은 얼마일까?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이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연구자는 검사분석범위를 확대하여 법의학업무매뉴얼에 따라 샘플조사를 실시했다.

 

먼저, 광서제의 머리카락에 붙은 잔재물에 대하여 다시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결과 잔재물의 비소함량은 머리카락보다 높았다. 이로써 볼 때 고농도의 비소 잔재물은 머리카락이 높은 비소함량을 보인 근원이었다.

 

다음, 채취한 광서제의 유골에 대하여 표면부착물을 긁어서 검사해보았는데, 결과적으로 그중 두 개의 유골(하나는 견갑골, 하나는 척추뼈)의 표면에 대량의 비소가 붙어 있었다. 이는 이들 비소는 확실히 부패한 시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후, 광서제의 부장의복에 대하여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비소분포를 검사했다.

 

광서제의 의복으로 검사를 받은 것은 모두 다섯 가지이다. 그중 4건은 상의(혹은 외투)이고, 1건은 바지이다. 연대가 오래되어, 5건의 의복은 용포가 보존상태가 좋은 것이외에 나머지 3건의 내의는 모두 심하게 썩었다.

 

시신부패가 입고 있는 의복에 침식하여 안에서 바깥으로 순서대로 침식이 적게 되는 법칙에 근거하여, 연구자는 4건의 상의를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어떻게 입었는지 순서를 확정했다. 그후 물질흡착과 정보전환환원원리에 따라, 광서제의 시신의 특수부위의 의복을 각각 샘플로 채취하여, 비소의 분포에 대하여 검사했다.

 

검사데이타에 따르면, 동일한 내의를 보면 모든 의복은 복부, 허리띠 및 어깨부위의 비소함량이 다른 곳보다 높았다. 입은 순서로 보면, 안쪽의 의복에서의 비소함량이 바깥쪽보다 훨씬 높았다; 시신의 특수부위로 보면, 의복이 떨어진 곳의 잔재물(위장내용물)의 비소함량이 아주 높았다.

 

이는 대량의 비소화합물이 일찌기 광서제의 시신의 위와 장 속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신부패과정에서 안에서 밖으로 의복을 침식했고, 이로써 위와 복부의 의복에 높은 비소함량을 보인다는 것이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대량의 비소화합물이 광서제의 체내에 있었다는 점은 이미 입증되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비소화합물인지 그리고 얼마나 먹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비소화합물의 서로 다른 종류는 서로 다른 독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연구인원은 다시 광서제의 머리카락에서 함량이 높은 비소의 형태를 분석했다. 액상색층분석/�흡수광층분석연용분석법으로 서로다른 형태의 비소의 비례관계를 조사했고, 여기에 모르모트 모의실험을 결합했다. 이렇게 하여 광서제를 중독사망에 이르게 한 비소화합물의 종류를 알아냈다.

 

동시에 의복, 두발, 부착잔재등을 통하여 광서제 시신에서의 비소화합물총량에 대하여도 자세히 추산을 해보았다.

 

실험결과, 광서젝 흡입한 비소화합물은 극독인 삼산화비소 즉 비상이었다. 그리고 시신부패의 일부의복이나 두발의 비상총량은 이미 201.5밀리그램에 달한다.

 

관련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비상(삼산화비소)을 60-200밀리그램을 마시면 중독사망한다. 광서제가 ㅊ내에 흡읍힌 비상은 확실히 치사량을 넘어선다. 이리하여 광서제의 사인은 결국 밝혀진다. 즉,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위와 복부 의복에 있는 비소는 시신부패후에 직접 침식되어 남게 되어 나타난 것이다. 목부분 및 머리카락에서의 대량의 비소는 그 시신이 부패하면서 흘러서 침식된 결과이다.

 

이번 검사와 연구의 상세한 내용, 방법, 데이타와 결론은 종리만등 13명의 전문가들이 쓴 <<청광서제사인연구공작보고>>에 나온다. 결론은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