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무종(唐武宗): 기녀의 도움으로 오른 황제

중은우시 2008. 9. 26. 00:49

글: 수은하(水銀河)

 

모든 성공한 남자의 뒤에는 비범한 여인이 있다. 이 말을 당무종 이염(李炎)에게 쓴다면 더 이상 적절할 수 없다. 그는 태감들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중당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당문종의 다섯째 동생으로 원래 그저 보통의 왕에 불과하며, 황위와는 북경과 뉴욕만큼이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한 우연한 착오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기녀는 자신의 담량과 이러한 착오를 이용하여 그를 황제자리에 올리고, 당나라의 잠깐동안의 중흥이 일어난다.

 

당무종은 원화9년(814년) 육월 십일일에 태어난다. 원래의 이름은 이전(李)이다. 27살이전에 그는 조심스럽게 왕야로 살았다. 황위가 부친인 당목종에서 형님들인 당경종과 당문종으로 여러차례 옮겨갈 때, 그는 그저 말이나 타고 놀면서, 신선이 되고자 연단에 열중하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한번은 바깥에 나가 놀다가 한단에서 왕(王)씨성의 기녀를 알게 된다. 이 기녀는 미모가 뛰어날 뿐아니라, 가무도 모두 잘하여 그가 한눈에 반한다. 이전은 그자리에서 돈을 내고 그녀를 산다. 그 후에 자기의 왕부로 데려온다. 두 사람은 이후 서로간에 사랑의 감정이 깊었다. 나중에 당무종이 황제가 된 이후까지도.

 

바로 그들이 왕부에서 즐겁게 살고 있을 때, 대당제국의 시국은 후계자 문제로 곡절을 겪고 있었다. 당시 재위하고 있던 당문종은 아주 근면한 황제였다. 태감의 정치간여에 대하여 대신들의 힘을 빌어 그들을 제거하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감로지변에서 철저히 실패를 하고 만다. 이후 환관 구사량(仇士良), 어홍지(魚弘志)등이 당나라의 중앙정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당문종이 태자를 세우는 일도 이들에게 물어야 했다. 처음에, 당문종은 형인 당경종의 아들인 진왕(晋王) 이보(李普)를 후계자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명이 짧았다. 태화2년(828년) 6월 5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어쩔 수 없이, 당문종은 자기의 아들인 노왕(魯王) 이영(李永)을 태자로 한다. 그런데 이때 총애를 받던 양비(楊妃)는 이영에 불만이었다. 그리하여 어떡하든 핑계를 잡아 그를 폐위하려고 하였다. 아마도 그녀의 이런 마음이 너무 강하였는지, 그녀가 손을 쓰기도 전에 이영은 돌연 죽어버리고, 사인이 무엇인지도 찾아내지 못한다. 양비는 극력 당문종에게 안왕(安王) 이용(李溶)을 천거한다. 당문종은 이때 망설이고 있었다. 재상인 이각(李珏)은 극력 당경종의 여섯째 아들인 진왕(陳王) 이성미(李成美)를 태자로 세우도록 권했다. 이 싸움에서 재상이 결국 황비를 이겼다. 이성미는 순조롭게 태자가 된다.

 

전태자 이영이 급사한 사건 이후, 당문종의 신체는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다. 아들을 "장격태자"로 추존하는 외에, 태자의 신변에 있던 궁녀들에게 화를 풀었다. 그는 원래 이성미를 위하여 융중한 태자책봉의식을 해주고자 했지만, 그는 병석에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임종전에, 당문종은 환관추밀사인 유홍일(劉弘逸)과 재상 이각(李珏)등에게 태자가 감국을 하도록 밀지를 내린다. 다만, 또 다른 환관인 구사량, 어홍기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만일 진왕이 등극하면, 옹립의 공은 바로 유홍일과 이각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 두 사람은 찬밥신세가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성지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태자가 나이도 어리고 병이 많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황태자를 교체하자고 제기한다. 당문종은 싸우고 싶었지만,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재상 이각이 하루종일 반대했지만, 수중에 병권도 없고 그저 주둥이로 싸울 뿐이었다. 구사량은 당문종의 명령을 위조한 후, 안왕 이용을 황태제(皇太弟)로 삼는다고 하고, 신책군(神策軍)을 십육왕택으로 보내어 안왕을 모셔오도록 시켰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진다. <<당궐사>>에 따르면, 당시 안왕 이용과 영왕(潁王) 이전(즉, 당무종)은 모두 형인 문종의 사랑을 받았고, 모두 왕들이 사는 지역 - 십육왕택(十六王宅)에 살았다. 구사량이 파견한 신책군은 무지렁이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뜻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황급히 십육왕택까지 왔는데, 어느 왕을 모셔가야할지를 잘 알지 못하여, 문앞에서 멍하니 있었다. 궁중의 구사량은 즉시 믿을만한 수하를 보내어 뒤따르게 했다. 그러나, 이 자는 머리는 잘 돌아가나, 말은 잘 못하는 멍청이였다. 왕부의 문앞에서 겨우 말을 꺼낸 것이: "큰 것을 데려와라. 큰 것을 데려와라" 그 뜻은 안왕이 영왕보다 나이가 많으니 안왕 이용을 데려오란 뜻이었다. 신책군은 이 말을 듣고 나서도 아직 명확히 누구를 데려오라는 것인지 잘 몰랐다. 왕부에 살고 있던 안왕과 영왕은 모두 바깥에서 소동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확실해지기 전에는 감히 먼저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두 남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영왕이 한단에서 데리고 온 기녀출신의 왕씨는 참지를 못했다.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왕부의 문앞으로 걸어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신책군의 앞에 서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크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말하는 '큰 것'은 바로 영왕 전하이다. 영왕은 몸이 크고, 당금황제도 그를 '대왕'이라고 칭하지 않느냐. 영왕은 너희 구중위와도 생사지교이다. 이런 큰일은 너희가 조심해서 처리해야 한다. 일단 잘못되면 온 집안이 거덜날 것이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눈을 멍하니 뜨고 눈앞의 이 여인이 하는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왕씨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몸을 돌려 왕부로 돌아온 후에 병풍의 뒤에 숨어있던 영왕 이전을 앞으로 밀어냈다. 과연 이전은 키가 컸다. 그녀의 말이 틀리질 않았다. 신책군은 두말도 하지 않고, 즉시 영왕을 모셔서 말에 태우고 소양원으로 호송했다. 나중에 환관들이 보니 사람을 잘못 데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할 수 없이 영왕을 황태제로 책봉한다. 며칠 후 당문종이 병사하고 이전이 즉위하니 바로 당무종이다.

 

당무종이 즉위한 후, 이전에 말타고 놀던 취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자주 그가 총애하는 왕씨를 데리고 궁을 나가 기방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예인들과 어울려 놀았다. 마치 일반백성의 연회와 같았다. 그러나, 그는 당경종의 무절제한 놀이와는 달랐다. 그리고 거기에 빠지지도 않았다. 놀면서도 자신의 머리는 맑게 유지했다. 이것때문에 국가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았다. 그의 독서는 비록 당문종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잘 쓸 줄 알았고, 서생의 성격이나 우매함이 없고, 현실을 직면하고 많은 경우 재상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덕유를 신임하고 중용했다. 그리하여 군신은 회창연간에 내우외환이 겹친 시기에도 잘 대응하여 난관을 넘겼다. 다만, 후기에 그는 지나치게 장생불로를 추구했고, 점차 멍청해 졌다. 회창6년(846년), 당무종의 병이 위중해진다. 그의 곁에 있는 도사들이 병이 생긴 원인을 황제의 이름이 "전()"으로 "수(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나라가 "토(土)"의 덕을 숭상하는 것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생수(土生水, 토가 수를 낳는다)"이므로 불리하니, "염(炎)"으로 개명하면, "화(火)"의 기운을 얻어 "토"덕과 맞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해 삼월 이십삼일 즉, 개명후 12일만에, 무종은 서거한다. 왕씨는 목을 매어 순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