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호극우(胡克禹)
손사막은 당나라시대의 위대한 의약가이다. 그런데, 그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에 대하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여러가지 주장이 있고, 논쟁이 그치지를 않고 있다. CCTV 채널10의 <<주근과학>> 프로그램에서는 손사막이 141살까지 살았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방영한 바 있다. 필자는 역사사료를 뒤져보고, 관련인사를 만나고, 역사근거를 찾아보았다. 아래에는 손사막의 향년에 대한 6가지 견해의 원천과 필자가 수집한 손사막의 나이가 141살이라는 사료의 근거를 검토해보기로 한다.
손사막의 출생년도에 대한 6가지 주장과 유래
첫째, 101살이라는 설의 유래.
이 설은 청나라때 기효람등이 편찬한 <<사고전서총목>>의 제요를 그 근거로 한다. 추단방법은 손사막과 노조린이 의학을 논한 것이 '계유지세(癸酉之歲)' 즉 고종 함형4년으로 서력기원673년이다. 이를 기준으로 노조린이 <<병리수부서>>에서 "손사막은 스스로 개황신유년에 태어났다고 했다. 지금은 93세이다"(구당서 권191 손사막전)라고 했는데, 기효람은 노조린이 산사막의 제자로 그 스승의 말을 기록한 것이므로 헛되지 안을 것이고, 분명히 맞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로서 93세를 추산하면, 그 해가 바로 개황원년이 된다. 즉 581년인 것이다. 다만, 이 해는 '신축(辛丑)'년이다. 그래서 '신유'는 '신축'의 오기로 본 것이다. 왜냐하면 '개황'의 연호가 사용된 20년간 '신유'년은 없었기 때문이다. 개황의 다음 연호인 인수를 쓸 때가 바로 신유년이었다. 그리하여, 581년에 태어나고, 682년에 죽은 것으로 본 것이다.
둘째, 120세이상이라는 설의 유래
이 설은 <<중국의학사략>>에서 손사막이 북주 주선제가 재위할 때, 왕실의 연고로 태백산에 은거하고 양견이 보정을 할 때 손사막이 국자감박사로 삼았는데, 손사막이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 이로써 손사막은 578년에서 579년 사이에 최소한 약관(20세)의 나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사막은 560년이전에 태어났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향년은 120세 이상이 되는 것이다.
셋째, 141세라는 설의 유래
이 설은 노조린의 <<병리수부서>>에서 손사막이 스스로 "개황신유"년에 태어났다고 했다는 것은 기본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문구에 대한 이해를 첫째 설과 다르게 한다. 손사막이 말한 것은 일종의 게어(偈語)로서, 그 뜻은 그와 개황황제는 같은 해인 서위 대동7년 '신유'년에 태어났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직접 얘기하지 않고, 노조린으로 하여금 추단해보게 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손사막이 말실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실수'라는 것은 손사막이 평생동안 신중하게 학문을 해왔던 태도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은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그는 수문제 양견과 같은 해에 출생하였다. 바로 541년 서위 대동7년이며, 마침 신유년이다. 그렇다면 향년 141세가 되는 것이다.
넷째, 165세라는 설의 유래
이 설은 북주의 낙주총관 독고신이 손사막을 "성동(聖童)"이라고 칭찬하였다는 데서 추론한 것이다. 청나라의 학자 유육송은 <<통의당문집. 천금방고>>에서 독고신이 손사막을 '성동'이라고 평가한 시간을 양나라 대동3년(537년)에서 대동4년(538년) 사이로 본다. 즉, 독고신이 제2차입관시기이다. 당시 손사막은 당연히 만20세는 되었을 것으로보고, 이때부터 2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위신구원년에서 2년사이가 된다(518년-519년). 이렇게 보면 손사막의 향년은 164세-165세가 된다.
다섯째, 168세라는 설의 유래
이 설도 북주 낙주총관 독고신이 손사막을 '성동'이라고 칭찬하였다는 기록에서 추론한 것이다. 기원534년(양중대통6년)에 독고신이 제1차로 입관하는데, 하발승의 명을 받아 그의 동생 하발악의 부하를 다독거린 시기를 좌표로 한다. 이 때 손사막의 나이가 이미 약관(20세이상)에 이르렀다는 것이므로 이때부터 19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손사막은 515년에 출생하였다는 결론을 얻었다. 바로 양나라 천감14년이 된다. 그렇다면 향년 168세가 된다.
여섯째, 173세라는 설의 유래
이 설은 조원우의 <<손사막의 출생연대에 관하여>>라는 글을 근거로 한다. 손사막은 스스로 "개황신유생으로 지금 구십삼세이다"라고 한 말에서 작자는 스스로의 이해에 따라 '개황'을 '인수'로 보고, "인수신유년에 이미 나이 93세이다"로 해석한다. 이렇게 하여 인수원년이 601년이므로 이때부터 93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따르면, 손사막은 509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북위 영평2년, 혹은 양무제 천감8년). 이렇게 하면 손사막의 향년은 73세이다.
손사막의 나이에 관한 이상의 6가시 주장중 가장 주요한 것은 141살설과 101살설의 다툼이다. 청나라건륭년간에 편찬된 <<사고전서>>의 대학자 기효람은 노조린의 <<병리수부서>>의 기재와 개황 '신유'의 간지로 추산하여, '신유'는 '신축'의 오기라고 단정하고, 손사막의 향년이 101살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결론을 '사고전서'에 기록하여 그 영향은 아주 크다. 다만, 101살설의 주장으로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자료들이 신당서, 구당서에 많다. 수나라이전에 손사막이 활동한 것에 관한 기록이 적지 않은 것이다. 아래에서는 그에 관해 8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기로 한다.
(1) 북주 낙주총관 독고신이 손사막을 보고 '성동'이라고 감탄하였다는 최초의 사료를 가지고 추단하는 설이 141세, 165세, 168세의 세 가지로 나뉜다. 모두 독고신이 손사막을 만났다는 최초의 자료를 가지고 추단하는 것이다. 이 사료는 북송때 만든 <<당서>>에 들어있을 뿐아니라, 일찌감치 당나라때의 유후가 편찬한 <<대당신서>>라는 책에도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독고신은 북위에서 태어나, 북주때 죽었다. <<북사>> 및 <<주서>>에 모두 전기가 남아 있다. 수문제 양견의 독고황후는 바로 독고신의 딸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독고신은 섬서에서 활동하였는데, 모두 4번 입관하였고 만년에는 장안에 거주했다. 처음 입관은 534년이다. 북위의 대장군 하발악이 관중에서 후막, 진열에게 해침을 당하여, 그의 형인 하발승이 독고신에게 입관하여 하발악의 남은 무리를 안정시키라는 명을 받고 들어온다. 두번째는 537년이다. 이때는 관동에서 패배하여 장안에 죄를 청하러 간 것이다. 세번째 입관은 541년이다. 이때는 명을 받아 장안의 포위를 풀어주기 위해 간 것이다. 네번째는 546년으로, 양주에서 포로로 잡은 자들을 장안까지 호송하기 위해서이다. 이 네번의 입관은 모두 군사적인 목적으로 갔고, 바쁘게 가서 업무를 처리했으므로 머물수가 없었다. 게다가 손사막은 아직 나이도 어렸다. 그러므로 화원(華原, 손사막이 살던 곳)에서 손사막을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 4년후인 550년에 독고신은 상서령이 되고, 557년에 다시 위국공이 되어 만호를 받고, 장안에 거주한다. 이때 독고신의 여섯째 아들인 독고타가 이미 화원의 근처인 건중현에서 관리를 지낸다. 이러한 기록을 근거로 보면, 독고신이 만년에 위국공에 봉해진 후, 장안에 살았는데, 할일이 없이 유유자적했다. 아들이 건중군에서 관리를 지내므로, 이때 시간이 있으면 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잠시 머물거나 이웃해 있는 화원현에 유람을 갔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성동' 손사막을 봤을 것이다. <<구당서>>에는: "손사막. 경조 화원 사람이다. 7세때부터 학문을 하여, 하루에 천마디를 외우고, 약관에 노장 및 백가의 설을 논하길 좋아하였다. 낙주총관 독고신이 그를 보고 감탄하여 '이 사람은 성동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정자통>>에 따르면, "남자 15세이상을 동(童)이라 한다"고 되어 있고, <<시. 위풍. 구난서소>>에서는 "동이라 함은 미성년을 말한다. 나이19세이하를 모두 말한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손사막의 나이는 16세정도일 것이다. 이는 141세설과 부합한다. 541년에 태어났다고 본다는 역사적 논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고신이 534년 혹은 537년의 제1차, 제2차 입관시에 그를 만났다고 보는 것은 가능성이 너무나 적다. 다만, 손사막이 581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구당서>>에 기록된 독고신이 일찌감치 557년에 손사막에 대하여 칭찬한 말이 있다는 것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 기효람은 이에 대하여 '오기이다'라는 한마디로 덮어 버렸다.
(2) 노조린의 <<병리수부서>>에 손사막이 자신의 생년에 대하여 애매하게 말한다. 원래 당초사걸의 하나인 노조린은 함형4년 '계유지세' 즉 673년에 <<병리수부서>>라는 글을 쓴다. 손사막이 스스로 '개황신유세생, 지금구십삼의(開皇辛酉歲生, 至今九十三矣)'라고 하였다. 노조린은 당시 당태종 이세민의 17째아들인 등왕 이원유의 왕부전첨을 지내고 있어, 이원유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러나, 생활이 방탕하여 병이 들어 장안 광덕방의 파양공주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광덕방의 집에는 병리수가 있었는데, 노조린은 이를 보고 감흥이 일어, 이 서정적인 작품을 남긴 것이다. 손사막이 그와 의학을 논할 때, 질병의 도리에 대하여 말한 것을 읊었다. 목적은 노조린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다. 노조린이 스승의 나이를 물었을 때, 손사막은 그저 간지만 말하고, 수수께끼처럼 남겨두었다. '개황신유생' 그 원래 뜻은 개황 수문제와 같은 해인 신유년에 출생했다는 것이다. 즉, 북위 대통7년이다. 손사막은 너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을 꺼려서, 말이 나오는대로 93세라고 해버린다. 원인은 아마도 사회에서 나이많은 사람의 나이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노조린의 이 글에 따르면, '계유지세"인 673년에 그의 나이는 이미 132세가 되어야 한다. 만일 나이가 그렇게 많다고 하면 의심과 질투를 불러올 것이기 때문일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사막은 쓸데없는 논쟁거리를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간지만 정확하게 말하고, 연호, 나이는 그저 나오는대로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추산하자니 모순이 백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황년간의 신유년으로 계산하면 581년이 되므로, 손사막의 나이는 74세에 불과해진다. 만일 93세로 본다면, 간지는 신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노조린 조차도 그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덧붙여 놓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백세노인이라고 했다. 주나라 제나라의 일을 같이 얘기하는데 눈으로 본 것같으므로 이를 참고로 하면 절대 백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아니다"
(3) <<구당서>>의 '손사막전'에는 "주선제때, 관리를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아서, 태백산에 은거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다. 북주의 다섯 황제는 모두 24년간 존속했는데, 주선제 우문빈은 북주의 네번째 황제이다. 아주 음탕한 황제였다. 그는 579년에 즉위하여, <<형경요훈>>을 제정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한다. 그리하여 조야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실제로 일찌기 577년 주무제 우문옹이 재위할 때, 이미 <<조제구조>>를 반포하였는데, 그 안에 제8조는 이런 내용이다: "주에서 재주가 뛰어난 학자를 추천하면 수재로 삼고, 군에서 경전에 밝고 수행하는 자를 천거하면 효렴으로 삼는다. 상주상군은 1명, 하주하군은 3년에 1명을 추천한다" 이 명령이 내려져서 아마도 현지의 관리는 손사막을 추천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손사막은 집에 머물수가 없어서 태백산으로 들어간다. "주선제때, 손사막은 왕실의 일로 태백산에 은거한다". 기원579년에 손사막은 이미 40세에 가까운 사람이다.
(4) 수문제 양견이 북주 대사마를 지낼 때, 손사막을 국자감박사로 추천한다. <<구당서. 손사막전>>에는 "수문제가 보정을 할 때, 국자감박사로 모셨는데,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 일은 수문제 양견이 수왕조가 건립되기 전에 손사막을 관료로 추천하였던 일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손사막이 개황원년(581년)에 태어났다는 주장의 잘못을 방증한다.
수문제 양견은 서위 대통7년에 태어나서 손사막과 같은 나이이다. 그는 섬서의 화음 양씨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사족중에서도 명문거족이다. 부친 양충은 서위때 장수를 지냈고, 북주에서는 주국대장군, 대사마의 직위에 올랐고, 수국공에 봉해진다. 사후 양견은 부친의 작위를 세습받아 수국공이 된다. 그는 또한 주선제의 장인이기도 하다. 주선제가 즉위하면서 상주국, 대사마로 삼았다. 그는 선조의 공덕과 자신의 지위로 이때 북주정권을 빼앗을 생각을 하게 된다. 잔혹한 주선제가 재위할 때, 이미 이 점을 눈치챘고, 좌우에 양견을 감시하라고 시켰다. 주선제는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죽고, 황위를 나이 겨우 9살인 아들 주정제 우문찬에게 넘겨준다. 어린 황제는 양견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다. 이때 관직은 대승상에 이른다. 그는 자연히 북주정권을 농단한다. 이 시기 즉 579년-580년의 사이가 '손사막전'에서 나오는 수문제의 보정시기이다. 양견이 북주정권을 하루빨리 빼앗기 위하여, 많은 개혁정책을 실시하는데, 먼저 주선제의 <<형경요제>>를 <<형서요제>>로 바꾸고, 주선제시 조야를 불안하게 했던 가혹한 법들을 폐지한다. 다음으로 한인들에게 원래의 성을 회복하도록 한다. 북주에서 사성으로 내린 선비성씨를 폐지한다. 북주의 관제를 취소하고, 한,위의 관제를 회복시킨다. 이 모든 것은 그가 한족의 정권과 문화를 회복시키겠다는 취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때 그는 한족 사족의 지지가 필요했고, 세력을 키워야 했다. 그리하여, 양견은 손사막과 같은 명망있는 한족 관서학자들을 등용했다. 이는 모두 정권탈취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또다른 측면에서 손사막이 수문제가 황제를 지낸 개황원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만일 손사막이 581년에 태어났다면, 양견이 북주의 보정으로 있을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손사막을 국자감박사로 추천했다는 괴이한 결과가 된다.
(5) <<천금방>>에는 손사막이 교룡병을 치료한 사례가 명확히 기재되어 있는데, 시기가 개황6년이다. 손사막은 의약에 정통하여 사람들을 많이 구했다. 그는 무수한 의학의 난제를 해결해주었다. <<천금방>>의 기록에 의하면 개황6년, 즉 586년, 어떤 사람이 미나리를 먹은 후 간질병과 유사한 사례가 나타났다. 얼굴색은 청황색이고 교룡을 뱉어내는데 머리와 꼬리가 있었다(아마도 오늘날의 기생충일 것이다). 당시에 이는 교룡병이라고 불렀다. 이 병의 사례에서 손사막은 사람들에게 사람이 이 병에 걸리면 한식탕 삼두를 먹고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재는 손사막이 절대 581년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절대 101살만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581년에 태어났다면, 5살에 글자도 몇개 모를 그가 어찌 이처럼 골치아픈 의학의 난제를 해결해줄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수문제와 같은 나이라면 이때 이미45세이다. 중년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의학상 상당한 성취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
(6) 당태종 이세민이 손사막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627년이다. 즉 정관원년이다. 당태조잉 즉위하고 손사막을 경성으로 부른다. 이세민은 손사막의 나이가 많이 든 것을 보고, 선문, 광성과 같은 신선으로 생각하여 작위를 내리나, 손사막은 고사하고 받지 않는다. 손사막의 나이는 많아도 신체는 건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581년 출생이라면 이때 손사막은 겨우 46세인데, 이세민도 당시 이미 29살이었으므로, 손사막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건강하다고 찬탄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때 손사막은 최소한 고희를 넘어선 노인이라고 보아야 적당할 것이다.
(7) 위징, 영호득분이 <<남북조사>>, <<수사>>를 편찬할 때 손사막에게 물어본 바 있다. <<구당서. 손사막전>>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 위징등이 제, 량, 진, 주, 수등 오가의 역사를 편찬할 때 손사막이 구두로 전수하는데 마치 눈으로 본 것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손사막은 당나라때 위징등이 남북조역사를 편찬할 때 여러차례 자문을 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위징이 46세, 영호덕분이 47세였다. 만일 수나라 개황원년 출생이라면 손사막도 겨우 48세에 불과하다. 두 사람이 손사막에게 오대의 역사를 물어보고, 그가 본 것처럼 말했다면 적어도 손사막이 이들 두 사람보다는 훨씬 이전에 살아서 많은 것을 겪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8) 현지 민간전설과 <<요주지>>의 기록에 따르면 손사막은 141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때 요주학정 오진이 지은 <<북오대부병서>>에서도 손사막을 북주시대의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이외에 손사막의 고향인 요현의 현지와 인근 각현의 백성들도 손사막이 141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을 전해준다. 요현횬지에는 손사막의 연보가 541년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요현은 손사막의 성지인 약왕산을 기념하기 위하여 약왕대전으로 올라가는 '일천문'에 군중들이 만든 계단이 141개이다. 이는 약왕 손사막이 141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만 합양현의 약왕묘에 있는 대련도 "고희를 두번이나 넘긴"이라고 하여 141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상의 8가지 고증에 의하면 필자는 <<사고전서>>에서 손사막이 101살까지 살았다는 결론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신당서, 구당서의 기록을 완전히 부정하고, <<천금방>>의 내용과 모순되며, 역사논리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41세까지 살았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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