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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이 보유한 4가지 세계기록

by 중은우시 2008. 7. 25.

글: 수은하(水銀河)

 

세계기록은 경기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각양각색의 세계기록이 존재한다. 중국통치자중 특수한 경우인 무측천은 혼자서 4가지 황제중의 네가지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의 다른 어떤 황제도 따라갈 수 없을 뿐아니라, 세계적인 범위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임명한 재상이 가장 많다.

 

당나라는 재상으로 불리는 관직이 아주 많았다. 좌우복야 및 문하, 상서, 중서 삼성의 장관은 모두 재상으로 불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당나라재상의 수량은 전체적으로 다른 어느 왕조보다 많다. 예를 들어, 당태종은 23년간 재위하였는데, 재상을 25명이나 임명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무측천과 비교하면 공자앞에서 문자를 쓰는 겻이다. 무측천은 인재를 아낀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를 크게 벌인 것이외에, 지방각급관리에게 우수한 인재를 천거하도록 독려했다. 비록 이러했지만, 그녀는 인재를 빠트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여, 나중에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천거하도록 장려했다. 인재가 많아지자, 빈 자리만 생기면 그들을 심어두었다. 만일 놀린다면 그것은 바로 낭비였다. 결국 그녀 통치하의 제국관료기구가 팽창한다. 재상이라는 직위만 보더라도 전후로 73명에 이른다. <<수당사>>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 "무측천은 일을 즉흥저으로 했다. 좋고 싫은 것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녀의 정권이 마감될 때까지, 재상을 맡았던 사람이 모두 73명이나 된다"

 

여기에서는 무측천이 재상을 임명한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기로 한다. 시기는 대주(大周)를 건립하기 전이었다. 무측천이 대주를 건립하기 전에 부유예(傅遊藝)라는 9품관이 투기를 좋아했다. 그는 무측천이 황제를 칭할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사람을 모아서 상소를 올린다. 무측천에게 국호를 "주"로 고치도록 요청한 것이다. 무측천은 아주 기뻐했다. 1년만에 부유예는 말단관직인 9품에서 졸지에 3품관리에 올라, 재상의 반열에 오른다. (당나라의 일품관, 이품관은 아주 적었다. 재장은 왕왕 모두 3품관이었다) 다행히 무측천은 정무를 성실히 했고, 국가를 잘 다스렸다. 빈번하게 재상을 임명했지만, 제국이 혼란에 빠지도록 하지는 않았다. 역사상 무측천 다음으로 많은 재상을 임명한 황제는 숭정제이다. 명나라의 마지막황제인 그는 일생동안 사람을 쓰고는 의심이 많았다. 재위7년간, 앞뒤로 합쳐서 50명의 재상을 갈아치웠다. 명나라는 원래 이미 병이 뼛속까지 곪았는데, 그녀가 이렇게 한번 뒤흔들어놓자, 더이상 약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2. 재위시 연령이 가장 많다.

 

무측천 이전에 즉위시 연령이 가장 낳았던 황제는 바로 유비였다. 한소열제인 그는 전반생동안 사방을 다니며 유격활동을 하였다. 다행이 늙어서 복이 있어, 형주, 익주라는 당시 가장 큰 두개의 주를 확보할 수 있었고, 60세가 되어 마침내 영광스럽게 등극하고, 촉한정권을 건립한다. 무측천은 그보다 훨씬 힘들었다. 당태종의 재인, 당고종의 소의에서 황후, 천후, 그리고 이후에 태후로 성장하였는데, 나이 67세에 이르러 비로소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다.

 

 무측천은 국호를 '주'로 바꾸고, 스스로 '신성황제(神聖皇帝)'로 칭한다. 14살때부터 그녀는 이미 53년간을 궁중에서 분투한 것이다. 오대십국시대에 마은(馬殷)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당나라말기에 호남에 할거하고 있었다. 927년이 되어서야 후당은 그를 초국왕으로 봉한다. 그는 75세의 고령으로 대기만성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직책은 왕이지, 황제가 아니었다. 그가 죽은 후의 묘호는 초무목왕이었다. 그리고, 이 왕은 중앙이 할거세력이 내린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의 반열에 들지는 않는다.

 

3. 능묘의 규모가 최대이다.

 

무측천이 살던 시대는 당나라의 번영기이다. 충분한 국력은 그녀의 능묘를 조성하는데 견실한 재산적 기초가 되었다. 그녀의 능묘인 건릉(乾陵)은 684년에 착공하여, 23년간의 건축을 거쳐, 1기공사를 완공한다. 건릉은 거의 수도 장안성을 본떴다. 외곽성, 황성, 궁성의 3중 성곽구조를 만들었다. 내성에는 동쪽의 청룡문, 남쪽의 주작문, 서쪽의 백호문 그리고 북쪽의 현무문이 있었다. 남북중축선은 4.9킬로미터에 달하고, 남북의 성벽길이는 1450미터였다. 동쪽성벽은 1562미터였고, 서쪽성벽의 길이는 1,438미터, 총면적은 230만평방미터에 달한다.

 

역사문헌에 기재된 "주위가 팔십리(周八十里)"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규모면 당태종의 소릉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감히 "역대제황릉중 최고"라고 할만하다. 이외에 성내에는 헌전, 편방, 회랑, 궐루와 적인걸등 60여명의 중신들의 사당이 있었다. 아예 또 하나의 자안성이라고 부를 만했다. 아쉬운 것은 "안사의 난" 과정에, 건릉의 휘황하고 장관인 지면건축은 상당히 크게 파괴되었다. 정원14년(79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새로 건축을 마무리한다. 만일 무측천의 건릉이 결국 열린다면, 그것은 진시황릉과 동등한 중요성을 지닌 고고학적인 큰 사례가 될 것이다.

 

4. 사용한 연호가 가장 많다.

 

연호(年號)는 한무제의 발명작이다. 제왕기년법의 계속인 셈이다. 무측천 이전에, 이 종목의 세계기록 보유자는 바로 한무제였다. 그는 재위기간 55년동안 연호로 모두 11개를 썼다. 평균 5년에 1번씩 바꾼 것이다. 이들 연호는 각각: 건원(建元, 기원전140 - 기원전135), 원광(元光, 기원전 134년 - 기원전 129년), 원삭(元朔, 기원전128년 - 기원전123년), 원수(元狩, 기원전122 - 기원전 117), 원정(元鼎, 기원전116 - 기원전 111), 원봉(元封, 기원전110-기원전105), 태초(太初. 기원전104-기원전 101). 천한(天漢, 기원전97), 천한(天漢, 기원전96-기원전93년), 태시(太始, 기원전96 - 기원전93), 정화(鄭和), 후원(기원전88-기원전87). 무측천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는 황제를 칭한 때로부터 핍박을 받아 물러날 때까지의 21년중에 모두17개가량의 연호를 바꾸었다. 생활품질에 대하여 아주 관심이 많은 여자강자, 무측천의 연호도 당연히 개성을 지닌다. 이들 연호는 각각 光澤), 추공(垂拱), 영창(永昌), 재초(載初), 천수(天授), 여의(如意)등이다. 무측천의 연호를 아주 개성이 있다. 각각의 연호명칭은 다음과 같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측천은 생활품질을 따지지 않는 강한 여인이다. 무측천이 사용한 연호는 자연히 개성이 있다. 이들 연호는 각각 광택, 수공, 영창, 재초, 천수, 여의, 장수, 연재, 증성, 천책만세, 신공, 성력, 구시, 대족, 장안에 이르렀다. 무측천은 기사의 자동차고장으로 두번이나 제대로 달리지 못했다. 천수3년은 특히 무측천이 2번이나 연호를 바꾼 해이다. 천수삼년은 여의원년도 되고, 장수원년도 된다. 이 해는 서력기원으로 692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