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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상해 이야기

상해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 10채

by 중은우시 2007. 8. 1.

1. 백공관(白公館)

 

상해에는 "백공관"이라고 부르는 집이 있는데, 상해 서구 분양로(汾陽路)에 위치하고 있다. 분양로는 키큰 나무들이 있어서 환경이 우아하며 길가의 작은 서양식건물들은 모두 역사가 오래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조계지역의 공동국총동사관저, 유태인클럽, 정귀당구거(鄭貴堂舊居), 반징파구거(潘澄波舊居)등이있다.

 

백공관은 상해 분양로 150호의 흰색 서양식주택이다. 예전에 백숭희(白崇熙), 백선용(白先勇) 부자가 거주하여 유명해졌다. 사실, 백씨부자가 이 집에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이 입주하기 전의 수십년동안 이 서양식건물에서는 여러가지 진기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아마도 백씨부자의 명성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이 집을 "백공관"으로 부르고 있는 것하다.

 

지금 이 집은 "선자헌(仙炙軒)"이라는 고급불고기집으로 되어 있다. 식당은 예전의 모습을 가급적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고 있으며, 매일 세계 각국에서 오는 미식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예전의 장군집은 지금도 여전히 유명인사들을 많이 끌어모으고 있다.

 

 

2. 왕공관(汪公館)

 

왕백군(王伯群)의 주택인데, 그는 하응흠(何應欽)의 내종사촌동생이다. 중화민국시절의 정계요인이며, 교통부장을 지낸 왕백군(당시는 대하대학 동사장, 총장을 겸직)이 1931년에 우원로(愚園路) 1136농(弄) 31호(號)에  당시 대하대학의 유명한 미녀인 보지녕(保志寧)과 재혼하면서, 그녀를 위하여 만든 집이다. 4년이 걸려 1934년에 완공되었고, 이탈리아의 고딕건축물이다. 10.78무의 면적에 주건축면적이 2158.8평방미터이고, 30만은원이 소요되어�.

 

4층짜리 콘크리트구조이며 크고작은 방이 모두 32간이다. 1935년에 왕백군은 보지녕과 이 곳에서 혼례를 치른다.

 

1937년 항전이 발발하자 왕백군은 대하대학을 귀양으로 이전한다. 상해에서 철수한 후 이 건축물은 보지녕의 숙부인 보군건이 대리관리한다. 보지녕은 이 곳에서 주인으로 2년반을 머물렀다.

 

상해가 함락된 후, 민국28년(1939년) 이 건축은 왕정위(汪精衛)의 상해연락사무소로 사용된다. 그리하여 "왕공관"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이 기간동안 이 집에는 진벽군(왕정위의 처), 주불해, 이사군, 제민의, 매사평, 진춘보, 나군강등 친일정치인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이 거리의 10여개의 다른 건물들도 왕정위가 점유했고, 일본의 무장군인 100여명이 보초를 섰다. 민국29년(1940년) 3월 30일, 남경국민정부가 정식 시작되면서 왕정위가 상해로 올 때면 이 집에 머물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이 건축물은 한때 국민정부 군통조직의 초대소로 쓰였다. 1946년 보지녕이 상해로 되돌아오면서 이 집은 영국 주상해영사관 문화선전처에 임대해주고, 자신은 3층에 거주한다. 1948년 하반기에 보지녕은 미국으로 떠나서 미국국적을 가진 화교가 되고, 뉴욕에 머문다.

 

1949년초, 인민해방군 화동군정위원회가 이 건물을 접수하고, 중공 장녕구위원회와 구문화국을 이 곳에 설치한다. 1960년 장녕구위는 소년지가에서 사용하도록 결정하고 장녕구 소년궁을 만든다.

 

 

 

3. 카두리주택(嘉道里住宅, Kadoorie house)

 

연안서로24호, 상해인들이 모두 알다시시 상해시 소년궁이 있다. 그러나 이 곳은 예전에 가도리주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집의 원 주인은 알리 카두리라는 영국국적의 유태인이다. 그는 장사꾼의 기질을 타고났고, 500홍콩달러를 가지고 홍콩상해에서 돈많은 상인으로 성장했다.

 

카두리주택은 하나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1919년 카두리의 원래 집이 불에 탔다. 그의 처는 급히 보모를 도망치게 하고는 그녀 자신은 화를 당한다. 비통한 카두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으로 돌아가서 마음을 달랜다. 그리고는 친구인 프랑크에게 상해에 새로 집을 지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프랑크는 술을 좋아하고 방탕하여 아예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짓게 한다. 도급을 맡은 자는 일부러 아주 호화스럽게 만들어 4년의 시간을 들여서 다 짓게 된다. 카두리는 100만냥은자의 건설비용청구서를 받고는 깜짝 놀란다. 그렇지만, 새로 지은 집은 확실히 멋있었고, 카두리가 가장 좋아하는 주택이 되었다.

 

카두리주택은 기세가 대단하고 점유면적이 14000평방미터이다. 땅값이 비싼 상해에서는 독보적으로 넓었다. 넓은 잔디밭은 탁트인 시야를 제공해주고, 중간에는 대칭의 단정한 주택이 놓여있다. 건축면적은 3300평방미터이다. 1929년에 1층을 추가하였다.

 

4. 장송주택(蔣宋住宅)

 

장개석은 송미령과 결혼하기 전에, 상해에서 머물던 곳은 대부분 임시적인 것이었다. 1927년이 되어 장개석은 송미령과 결혼하고, 비로소 상해에 집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주택은 장개석이 돈을 내서 산 것이 아니라, 그의 처남인 송미령의 오빠 송자문이 송미령을 위하여 사준 것이다. 이 프랑스식 가든형 서양주택은 프랑스조계지역인 동평로에 위치하고 있다. 1개의 주루와 2개의 부속건물로 나뉜다.

 

현재 이 건축과 화원은 이미 상해음악학원 부속학교의 일부분이 되었다. 동쪽 부속건물은 학교 행정사무실이고, 주루의 동쪽은 송미령과 장개석의 침실과 화장실이 있는데, 비밀통로도 있어, 긴급상황에는 빠져나갈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이 건물에는 장개석이 친히 쓴 "애려(愛廬)"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장개석은 여산 호령의 별장에는 "미려(美廬)"라는 이름을, 항주서호의 별장에는 "징려(澄廬)"라는 이름을, 그리고 상해의 이 집에는 "애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애려"의 주위에는 10여 동의 가든식 건축물이 있는데, 모두 송씨, 공씨, 진입부, 진과부가 남긴 것이다.

 

5. 사손별장(沙遜別墅, Sasoon Villa)

 

루비콘빌라라고도 부른다. 1930년대 상해부동산왕인 사순이 만든 휴가용 별장이다. 이 오래된 서양식 별장은 현재 외자기업이 사용하고 있다. 루비콘빌라를 만든 사람인 사순은 영국계 유태인이다. 그는 일찌기 상해로 온 외국모험가로 1930년대에 상해부동산대왕이라고 불리웠다. 그는 상해탄의 여러 건물들을 지었는데, 남경로 외탄의 13층짜리 사손빌딩(현재의 화평반점 북루), 소주하 북안의 하빈대루, 강서로상의 도성대하(신성반점), 한미등대하(복주대하), 무명로상의 13층 화우공우(금강반점 남루)와 19층 격립문납공우(무명공우), 섬서남로의 이농방옥과 범이등화원등등이 그것이다. "루비콘빌라"는 일찌기 사순의 개인별장이었는데, 건축면적은 900평방미터가량이다.

 

6. 흥국빈관(興國賓館)

 

미국계인 중국영업공사는 옛날 상해에서 최대의 부동산기업의 하나였다. 일반주택을 짓는 외에, 많은 고급주택과 가든빌라를 지었다. 지금의 흥국로상의 흥국빈관내의 별장 여러채도 이 회사가 지은 것이다.

 

이 회사의 경영방식은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사들인 후 설계사로 하여금 토지계획에 따라 몇 개의 필지를 나눈 후에 중개인을 통하여 큰 회사들에 접촉하여 회사들로 하여금 주택을 구매하도록 권유한다. 주택은 고객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지어주었다. 물론 중국영업공사가 설계를 대신해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건물은 모두 중국영업공사가 지었지만, 설계품격은 모두 다랐다. 이 곳의 제1호주택은 태고양행의 오너 집이었다.

 

7. 동호빈관(東湖賓館)

 

회해중로와 동호로가 꺽이는 곳, 즉 지금의 동호로 7호 안에 큰 잔디밭으로 둘러싸인 2층 양옥집이 있다. 이 가든식 서양주택은 영국상인인 R. M Joseph가 1925년에 지은 건물이다. 조셉은 영국계 유태인으로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에 체포되어 수용소로 들어갔다. 이 아름다운 주택은 일본군이 점용하여 사용했다. 항전승리후에는 조셉의 향방이 불명하여, 중국정부가 접수한 후 미국대사관에 빌려주었다.

 

 

8. 마륵별장(馬勒別墅)

 

연안중로 섬서남로가 만나는 곳에 북유럽풍의 가든식 빌라가 있다. 마륵별장이다. 이는 1936년에 완공되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집의 설계자는 당시 집주인이던 마륵이 가장 아끼던 딸이 꿈속에 본 것을 그대로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당소 소녀는 꿈속에서 자신이 안데르센동화에 나오는 것같은 집을 보았는데, 마륵은 설계사를 초빙하여, 섬서남로 30호에 이 북유럽 노르웨이풍의 건물을 설계한 후 7년에 걸쳐 완공하였다.

 

 

9. 정향화원(丁香花園) 

 

상해는 만국건축의 박물관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도시에는 서로 품격이 다른 여러 옛날 서양건축물이 많기 때문이다. 화산로에 있는 정향화원은 상해탄에서 가장 유명하고, 보존이 잘 된 서양주택의 하나이다. 정향화원이 유명하게 된 것은 건축물 자체 때문도 있지만, 이 집 주인의 전설적인 색채때문이기도 하다.

 

정향화원의 주인의 이홍장이다. 당시 이홍장은 상해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군사, 항해, 방직등에도 손을 댔다. 나이가 들어 젊은 정향(丁香)을 첩으로 들였는데, 정향은 첩살이를 싫어했고, 정실부인 및 다른 첩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홍장은 정향을 위하여 가든식 별장을 하나 구매해서 정향이 머물도록 해주었다. 이것이 정향화원의 유래이다.

 

이홍장은 정향화원에 많은 진귀한 서적과 골동품을 보관했다. 이홍장은 수장가였고, 정향화원내에 2동의 별장을 지어서 1호루에는 정향이 머물고 다른 건물에는 서적을 수장하는 곳이었다.

 

10. 장학량공관(張學良公館)

 

9.18사변을 전후하여, 장학량은 풍운아였다. 그러나 그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1933년이후 그가 상해에 머물던 곳은 모두 세 군데이다. 

 

1933년 3월로 그는 전국에 하야를 선포하고 해외시찰을 나가겠다고 발표한다. 나중에 북경에서 상해로 들어오는데, 송자문은 그를 위하여 복조로(지금의 연안중로) 181호의 집을 어레인지해준다. 바로 이 곳에서 그는 아편을 끊었다. 1개월후 그는 유럽으로 떠난다.

 

1934년에 귀국하면서 상해로 온 후에 막리애로(향산로)의 2호 서양주택에서 임시로 머문다. 그 동안에, 그의 시종부관장인 담해는 고내의로(고란로) 1호의 서양주택을 물색한 후 빌리게 된다. 조사 소저는 북경에서 남하하여 이곳에서 장학량과 같이 머물게 된다. 오래지 않아, 장학량은 무창행영주임이 되어 상해를 떠나지만, 조사소저는 이 곳에 계속 머물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 곳을 "장학량공관"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