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나라 환관중의 충신

중은우시 2008. 6. 18. 00:22

글: 사지동(謝志東)

 

당나라 궁중의 정치투쟁은 두 가지 특색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전기에는 여인의 정치간여이고, 후기는 환관의 권력장악이다. 여인의 정치간여는 당나라의 국운이 상승하던 시기이므로 역사적인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나, 환관의 정치장악은 당나라의 쇠락시기에 나타났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에 의하여 당나라가 멸망한 2대원인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다른 하나의 원인은 번진할거(藩鎭割據)이다. 사실, 당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환관과 번진에 모두 돌리는 것은 불공평하다. 황제의 무능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생각해보라. 황제가 웅재대략을 지니고 있다면, 환관이 어찌 권력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중국의 수천년이래의 정통사상은 모두 왕권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환관의 권력장악은 역대 이래로 사람들이 미워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환관은 그 자체가 생리적으로 결함을 가진 자들이므로, 많은 사람들은 멸시의 눈빛으로 이들 무리를 대하곤 했다. 실제로 역대왕조에서 간신들이 정권을 농단한 현상이 환관들이 정권을 농단한 현상보다 훨씬 엄중했고, 해악도 컸다. 단지, 환관의 농단은 더 쉽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생리적인 결함은 아마도 많은 환관들의 심리상의 굴절을 가져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환관의 무리중에서도 충신양장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동한시대에 종이를 만든 채륜, 명나라의 항해가 정화등도 모두 환관이었다. 환관의 정권농단이 극심했다고 일컬어지는 당나라후기에도 조일승(曹日昇), 양복광(楊復光), 장승업(張承業)과 같은 충신인 환관들이 나타났다.

 

조일승은 안사의 난(安史之亂)때의 환관이다. 남양이 반군에 포위되었을 때, 당숙종은 조일승을 남양으로 보내어 장사들을 위로한다. 그러나, 조일승이 남양에 도착했을 때는 남양이 이미 반군에 포위되어 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조일승은 물러나지 않고, 단창필마로 성으로 뚫고 들어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의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양양태수 위중서는 응락하지 않았다. 만일 조일승이 반군에 붙잡히면 황제가 자신에게 책임을 추궁할 것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마침 감찰어사였던 안진경(顔眞卿)이 그 자리에 있어서 이렇게 말한다: "조장군이 생명위험을 무릅쓰고 황상의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데, 왜 그를 가로막는가? 설령 그가 도착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자(使者)를 하나 잃은 것일 뿐이고, 만일 도착한다면 성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훨씬 강화될 것이다" 이 때, 또 다른 환관인 풍정환(馮廷環)이 두 명의 기병을 이끌고 돕겠다고 말한다. 조일승도 몇 명의 수행원이 있어서 합쳐서 10명의 기병을 모은다. 조일승은 이 10명의 기병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간다. 그들이 아주 용맹하였으므로, 반군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조일승은 성공적으로 남양성에 들어간다. 이때 남양성의 수비군들은 화살과 양식이 떨어져 거의 절망상태였는데, 조일승을 보게 되자 사기가 고양되었다. 이후 조일승은 양양으로 가서 남양의 수비병사들에게 양식과 풀을 조달해서, 1천명을 이끌고 성으로 양식과 풀을 운반하는데, 반군들이 막지를 못했다. 환관 조일승은 비록 정사에 전(傳)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용기는 반군이 오기도 전에 소문만 듣고 도망쳤던 다른 당나라의 관리들이 죽을만큼 수치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양복광은 당나라말기에 족지다모(足智多謀)의 환관이었다. 여러번 번진의 감군(監軍)을 맡는다. 왕선지(王仙芝)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기적 안목을 가진 양복광은 전란의 확대를 피하기 위하여 왕선지로부터 투항을 받아낸다. 왕선지는 수하장수인 상군장(尙君長)을 약속대로 보내여 투항하게 한다. 그런데, 마음이 편협했던 당나라장수 송위(宋威)가 그를 죽여버린다. 그리하여 왕선지는 다시 병사를 이끌고 반란의 기치를 든다. 황소의 난때 황소의 반란군이 장안을 점령한 후, 충무절도사 주급가 반란군에 항복한다. 어느 날 밤, 주급은 양복광을 만나자고 청한다. 양복광의 주변사람들은 "주급은 이미 반란군에 항복하였으니, 반드시 당신을 해할 것이니, 절대 가지 말라"고 권한다. 양복광은 그래도 그를 만나러 간다. 주급을 만나서는 양복광이 아주 당당하게 주급에게 "대장부는 은혜를 알고 의리를 알아야 한다. 너는 일개 평민출신에서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18대를 내려온 천자를 버리고, 도적에게 투항해서 주인으로 모시다니, 무슨 사내대장부이냐" 주급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힘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들과는 겉으로는 하나인 것같지만 마음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을 불러서 상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급은 다시 당나라에 귀순한다. 이후 양복광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형양을 평정하고, 등주를 수복한다. 전공이 혁혁하였으므로 천하병마도감에 임명된다. 황소의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복광은 다시 사타장군 이극용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오게 한다. 황소의 반란군은 할 수없이 장안을 떠난다. 그리하여 황제는 양복광을 홍농군공(弘農郡公)에 임명한다. 왕선지, 황소의 난을 진압한데에는 양복광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다.

 

장승업은 당나라말기에 가장 충성스러웠던 환관이다. 당나라가 번진장수인 주온(朱溫)에게 멸망된 후, 환관 장승업은 여전히 당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는 근왕공신 이극용과 관계가 좋았으므로 당나라부흥의 희망을 이극용과 그의 아들 이존훈(李存勛)에게 걸고, 일생을 이극용부자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보좌한다. 이극용부자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장승업은 비범한 모략과 재주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존훈은 주씨의 후량(後梁)을 멸망시킨 후 후당(後唐)을 건립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한 마음으로 당나라를 부흥시키려던 장승업은 절망한다. 그는 이존훈에게 "제후들이 피를 흘린 것은 이당왕조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우리 왕이 스스로 그것을 취하였으니, 늙은 신하를 망쳤구나"라고 하고는 곡기를 끊고 죽음을 택한다. 일개 환관이 이미 멸망한 당나라를 위하여 이 정도까지 충성한 것을 보면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눈물을 흘릴 정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비록 환관의 권력농단이 당나라후기의 큰 고질이었지만, 환관이 모두 나빴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당숙종때로부터, 매번 장안에 변란이 있을 때마다 목숨을 내걸고 황제를 보호한 것은 항상 궁중의 환관들이었다. 예를 들면, 당덕종때 장안에서 경사의 변이 일어났는데, 평소에 말끝마다 충군애국을 외치던 문무대신은 하나같이 토끼보다 빨리 도망쳤다. 당덕종이 도망칠 때 신변을 따른 사람들은 자기가 동궁때부터 따르던 한 무리의 환관들 뿐이었다. 감로지변후에, 당문종이 일찌기 자신이 '가노(家奴)에게 제약당하고 있다'면서 괴뢰황제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만일 환관들이 없었다면, 당나라는 이미 100년전에 일찌감치 망해버리고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