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설인귀(薛仁貴) : 당나라의 명장

중은우시 2008. 2. 20. 13:21

 

 

작자: 미상(*중국측 자료이므로 시각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고 있음)

 

설인귀(614 - 683)의 이름은 예(禮)이고, 자가 인귀이다. 산서 강주 용문수촌 사람이다(지금의 산서성 하진시 수촌). 설인귀는 남북조시대의 명장 설안도(薛安都)의 후손이니, 하동 설씨집안이다. 그러나,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몰락하여 어려서 집안은 빈한했다. 다만 타고는 팔힘은 뛰어났다. 젊어서 특별한 일없이 농사를 짓다가 유씨(柳氏)를 처로 맞이한다. 그는 원래 밥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희망이 없자, 조상을 묘를 이전하는 것도 생각했다. 그때 그의 처인 유씨가 "능력있는 사람이라면,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지금 황제가 친히 요동을 치러가고자 하니, 바로 맹장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당신은 재주가 있으니, 군에 들어가서 공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 나중에 공명을 얻은 후에 고향에 돌아와서 이장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설인귀는 처의 말을 듣고는 도리에 맞다고 생각하여, 처자와 이별하고 군에 들어간다.

 

고구려정벌에서 공을 세우다.

 

그는 군에 들어가자마자 자신의 용맹함을 드러내며 공을 세우게 된다. 정관19년(645년) 2월 12일, 당태종은 낙양을 출발하여 고구려를 정벌하러 떠난다. 요동의 전쟁터에서 당나라의 장수인 유군공(劉君?)이 고구려군에 겹겹이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시기에 설인귀는 단창필마로 뛰어들어가 고구려군의 장수 한명의 목을 잘라 말에 걸었다. 고구려군이 뒤로 물러나고, 유군공은 구조된다. 그는 일개 졸병으로서 장수가 해야 할 일을 해낸 것이다. 이 전투이후 설인귀의 명성은 군중에 떨치게 된다.

 

그 후 안시성전투에서 다시 자기의 무예를 드러낸다. 이 전투로 그는 당나라제일맹장이라는 칭호를 듣게 된다. 645년 4월, 당나라군의 선봉대는 고구려로 쳐들어가고 계속 고구려수비를 무너뜨렸다. 6월에 안시성에 도착한다. 안시성에는 고구려의 막리지가 보낸 고연수, 고혜진이 25만의 군대를 이끌고 산을 등지고 군영을 차렸으며, 당나라군을 막으려 하였다. 당태종은 지형을 시찰한 후, 여러 장군들에게 군대를 나누어 돌격하게 명령한다. 이 전투에서 설인귀는 기회를 잡아 이름을 날리려고 생각했던지, 괴상한 복장을 하고 전투에 참가한다. 그는 다른 사병들과 달리 흰 옷을 입고, 손에는 방천화극을 든다. 허리에는 활 두 자루를 차고, 단기필마로 고구려군에 뛰어들었다. 그의 활약은 아주 돋보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계속 진형을 가다듬었지만, 설인귀가 한번 치고 들어가면 진형이 무너저 버렸다. 당태종은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흰옷을 입은 설인귀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 전투가 끝난 후 당태종이 그를 만나보니 졸병신분이었다. 그리하여 말 2필, 비단 40필, 노비 10명을 주었고, 유격장군, 운천부과의로 승진시켜준다. 아무런 관직도 없던 말단 병사에서 졸지에 황제가 직접 친견하고 장군의 직위를 내려주게 된 것이다.

 

나중에 당나라군대는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황제가 친히 전투에 나섰으므로 우회해서 진격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겨울을 만나고, 군수물자의 조달이 어려워지자, 철수하게 된다. 돌아와서 당태종은 설인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짐의 옛 장수들은 모두 나이가 들었다. 이미 전쟁과 같은 중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젊고 능력있는 장수를 발탁하고자 하는데, 너만한 자가 없다. 이번 정벌에서 요동을 얻었더라도 나는 기쁘지 않았을텐데, 너같은 인재를 얻었으니 아주 기쁘다" 당태종이 말한 "짐은 요동을 얻은 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그대를 얻은 것이 기쁘다"는 말은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되고, 설인귀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는 다시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한다.

 

12년간 현무문을 지키다.

 

요동에서 돌아온 후에, 설인귀는 중요한 직위에 오르지 못한다. 농민출신의 사병인데다, 가족배경이나 인간관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어찌 중요한 직위를 맡을 수 있겠는가? 그는 현무문을 지키는 업무를 맡게 된다. 현무문은 당태종과 관계가 깊다. 당태종은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지 않았던가. 설인귀는 12년반동안 현무문을 지키는 일을 한다.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영휘5년(654년) 3월, 윤5월초삼일,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산사태가 나고, 물이 현무문까지 들이닥쳤다. 설인귀는 죽음을 무릅쓰고 황궁내로 들어가 당고종을 구조한다. 당고종은 그의 행동에 크게 감격하고, 어마 1필을 내려준다. 황제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발탁될 날도 머지 않았다.

 

불혹의 나이에 사방을 평정하다.

 

현경2년(657년) 우둔위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서돌궐로 진격한다. 설인귀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서, 소정방이 서돌궐을 멸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적의 세력을 분리시켜, 한곳에 잘대해주어 내부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구체적인 계획은 더 상세했다. 소정방은 당나라의 명장으로 이정(李靖)의 적통제자였다. 즉, 이정병법의 승계자이며, 설인귀보다 20살정도 많았다. 이런 대장이 현문을 지키는 장군에 불과한 설인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그도 설인귀를 존중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58년에 설인귀는 자기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의 전설적인 지휘생애가 시작되는데, 이미 44세에 이르렀다. 658년 6월, 설인귀는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 정명진과 함께 고구려를 교란시킨다. 설인귀는 일거에 적봉진을 함락시키고 400명을 참수하고 100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658년 6월, 고구려는 대장 두방루(豆方婁)에게 3만의 병사를 붙여 파견하여 당나라군에 대적하게 한다. 그러나, 설인귀에 대패한다. 수급3000급이 잘린다.

 

659년 11월, 설인귀는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횡산(요양부근의 화표산)에서 전투를 한다. 설인귀는 앞장서서 돌격하고, 고구려군이 당해내지 못해서, 패주했다.

 

659년 11월, 당나라군은 고구려군과 석성에서 전투를 한다. 설인귀는 단기로 진격하여 고구려군의 궁사를 생포한다. 이 전투가 시작되자 마자, 고구려군의 한 신궁(神弓)이 연속하여 당나라군의 병사 10여명을 사살하자, 설인귀는 노기충천하여 활을 맞쏜 것이 아니라 말을 몰고 달려들어가서 그 신궁을 생포해 온 것이다.

 

659년 12월 설인귀와 신문릉은 흑산에서 거란을 격파한다. 그리고 거란왕 아복고(阿卜固)와 여러 수령을 포로로 잡아 낙양으로 압송한다.

 

설인귀는 공로를 인정받아 좌무위장군으로 승진하고, 하동현남(河東縣男)에 봉해진다.

 

삼전정천산(三箭定天山)

 

용삭원년(661년) 10월 철륵(鐵勒)이 당나라의 변방을 침범했다. 설인귀는 철륵도행군부총관이 된다. 출발전에 당고종은 병사들을 환송하는 자리에서, 설인귀에게 옛날에 활을 잘 쏘는 사람들은 갑옷 5개도 뚫는다는 말을 하면서 설인귀에게 한번 쏘아보도록 한다. 설인귀는 황명에 따라 화살을 쏘고, 화살은 갑옷5개를 꿰뚫는다. 당고종은 먹적어하며, 그에게 튼튼한 갑옷을 상으로 하사한다.

 

662년 2월, 회흘의 철륵9성돌궐(아홉부락)은 당나라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10여만명을 모은다. 그리고 천산(몽고 항애산)의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당나라군대를 저지한다. 662년 3월 초하루, 당나라군대와 철륵은 천산에서 교전을 시작한다. 철륵이 수십명의 대장을 보내어 도전을 하고, 설인귀가 출전해서 홀로 수십명을 막아낸다. 그리고, 화살을 연속 3발 쏘아서, 3명의 장수를 말에서 떨어뜨린다. 적군은 혼란에 빠졌고, 설인귀가 기회를 틈타 명을 내린다. 적군 13만은 즉석에서 투항한다. 철륵은 수십년간 당나라의 변방을 교란시켰으므로, 설인귀는 조정의 명에 따라 항복한 철륵군사를 갱살(坑殺)한다. 그리고 계속 북진하여 철륵의 수령인 섭호(葉護) 3형제를 생포한다. 그로써는 두번째로 적군의 군주를 생포한 기록이다. 이후 회흘의 구성돌궐은 쇠락한다. 이후로 "장군삼전정천산 장사장가입한관(將軍三箭定天山, 壯士長歌入漢關, 장군의 화살 세 대가 천산을 평정하고, 장사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한나라로 되돌아오다)"는 말이 유전된다. 그런데, 이번 전투에서 주장은 정인태였고, 설인귀는 부장이었다. 비록 설인귀가 공을 크게 세우기는 했지만, 정인태는 철륵의 사결, 다람갈들 부족이 투항하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노략질했다. 그러자 그들은 도망쳤고, 정인태는 추격했지만, 병사들만 잃었다. 설인귀도 이번 전투에서 철륵의 여자를 첩으로 취한다. 조정에 돌아오자, 정인태와 설인귀를 탄핵하는 소리가 높았다. 다만, 공이 있었으므로 죄는 묻지 않고 지나가게 된다.

 

고구려멸망

 

건봉원년(666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사망하고, 장남 연남생이 막리지를 승계한다. 그의 동생 연남건, 연남산은 막리지를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남생을 공격한다. 연남생은 아들인 연헌성(淵獻誠)을 당나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한다. 666년 6월 7일, 우효위대장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임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천남생을 지원한다. 천헌성을 우무위장군으로 임명하여 길안내를 맡게 한다. 666년, 좌금오위장군 방동선(龐同善), 영주도독 고간(高侃)이 행군총관이 되어 함께 고구려를 토벌하러 떠난다. 666년 9월 방동선은 고구려군을 대파한다.

 

666년 9월, 설인귀가 병사를 이끌고 출병한다. 666년 12월, 이적(李績)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사례소상백 학처준(?處俊)을 부대총관으로 임명한다. 계필하력, 방동선도 부대총관 겸 안무대사가 된다. 수륙제군총관과 운량사인 두의적(竇義積), 독고경운(獨孤卿雲), 곽대봉(郭待封)등은 이적의 지휘를 받아서 함께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북의 모든 세금을 끌어모아 요동전투에 쏟아붓는다. 667년 9월 14일, 이적은 고구려의 군사요지 신성(新城, 지금의 요동성 무순의 북쪽에 있는 고이산성)을 차지하고, 계필하력에게 지키게 한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주변 16개 성을 모두 함락시킨다.

 

신성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적은 금방 얻은 신성의 방어에 소홀하였다. 과연 667년 9월, 고구려의 우두머리 천남건이 대군을 이끌고 군영을 야습하였다. 신성이 위기에 처하지 설인귀가 병사를 이끌고 미친듯이 달려갔다. 그리하여 열세에 있던 당나라군은 졸지에 우세로 바뀌어 수백명을 사살하게 되고, 신성을 위기에서 구해낸다.

 

667년 10월, 방동선은 계속 진공한다. 금산로에서 고구려의 대군 20만과 부닥쳐서 패하고 도망친다. 고구려군이 추격해오자, 설인귀의 군대가 반격에 나섰고,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진다. 결국 설인귀의 군대가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5만명을 참수한다. 667년 10월, 당나라군은 승리를 틈타 남소(/南蘇, 지금의 요동 무순 동쪽 소자하와 혼하가 만나는 곳), 목저(木底, 요녕 신빈 서목기진), 창암(蒼巖, 길림 집안 서쪽)의 3성을 점령하고, 천남생의 군대와 회합한다. 그리고 금산(金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당고종은 친필서신을 써서 설인귀를 위로한다. 금산전투는 당나라초기에 드물게 보는 대규모 전투였고, 고구려와 싸운 4대전투중 가장 중요한 전투였고, 최대의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하여 기본적으로 고구려군의 정예부대는 소멸되며, 승리의 기초를 닦았다. 이 전투는 설인귀가 직접 지휘하였으니, 그의 공이 적다하지 않을 수 없다.

 

667년 11월 하순, 설인귀는 2000명의 현갑기(당나라의 정예병)병을 데리고, 전진하여 부여성으로 향한다. 어떤 장수들은 극력 반대했다. 인원이 너무 적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설인귀는 "병사는 많아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써야하는 것이 중요하다"로 하고 병사를 데리고 신속히 이동했다. 고구려군은 10만에 가까운 군대를 신성으로 보내어 주동권을 되찾아오고자 했다. 다만, 고구려군은 당나라군이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다. 겨울인데다 동북이어 하얀 눈이 내린 곳에서 갑자기 설인귀의 2000명 현갑기병은 모두 흰 옷을 입고 고구려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고구려군은 백색의 옷을 입은 당나라군이 쳐들어오자 혼란에 빠졌고, 결국 2만여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 7만여의 병사들은 부여성으로 되돌아가서 수비를 하게 된다. 2000명을 이끌고 계속 전진한 설인귀는 668년 2월 20일 부여성을 점령한 이후, 연속하여 40여개 성을 함락시킨다. 설인귀의 명성은 요동지방을 울리게 되었고, 고구려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장수가 되었다.

 

이처럼 설인귀의 부대는 수도인 평양성으로 직진했다. 방어가 박약한 해변으로 가던 온 이적등의 대군과 평양에서 만나서, 함께 평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설인귀는 고구려국왕의 투항을 받아내니, 고구려가 이때 멸망한다. 고구려는 수양제 양광의 3차에 걸친 공격, 당태종의  제4차정벌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는데, 설인귀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다.

 

이후 당고종은 설인귀에게 병사를 이끌고 평양을 지키도록 한다. 설인귀는 우위위대장군이 되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지고, 안동도호을 겸직한다. 그가 안동도호를 지낼 때도 뛰어난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669년에 설인귀가 편찬한 <<주역신본주의>>는 군사관련 저작이다. 이 시기는 설인귀에게 있어서 최전성기이다. 이후 그는 인생의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게 된다.

 

청해호의 한

 

청해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그는 패배한다.

 

토번이 서역으로 진군할 때, 설인귀는 이미 56세였다. 대비천전투의 주장은 설인귀이고 부장은 곽대봉이었다. 곽대봉은 원래 명장 곽효각의 둘째 아들로, 처음에는 설인귀보다 관직이 높았고, 명문가 출신이다. 그러다보니, 설인귀의 지휘에 불복하는 일이 잦았다. 어쨌든, 설인귀의 7만부대는 토번의 40만부대와 맞부딛쳐서 전멸당하고 만다.

 

대비천전투의 패배원인중 하나는 당나라의 설인귀, 배행검의 뒤를 잇는 제3대 장수가 끊겼다는데 있다. 나중의 장수규, 설납, 아사나충과 같은 장수들은 설인귀가 죽은 후 20년뒤에나 두각을 나타낸다. 대비천전투때 누구를 내보내느냐가 가장 골치아픈 문제였다. 당시의 상황으로 주장을 설인귀로 하는 것은 부득이했다. 문제는 부장이었는데, 곽대봉은 고구려와의 전투에도 참전했는데, 이적의 부장이었다. 곽대봉을 부장을 딸려보낸 것은 그를 배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유인궤는 설인귀의 아들인 설납을 부장으로 발탁해서 보내자고 주장하였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비천전투의 패배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 당나라군의 안서도호는 오랫동안 전투를 하지 않아 실전경험이 없고, 안서병의 전투력이 약했다. 둘째, 당나라정부는 황급히 응전하여 사전준비가 불충분했다. 셋째, 당나라의 부병제도의 폐단이 노출되어, 장수가 부족했다. 넷째, 곽대봉은 군기를 어겼다. 다섯째, 토번의 주장인 걸. 친링은 토번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전신이다. 여섯째, 설인귀는 곽대봉의 행동에 대하여 적시에 조치하지 못했다. 일곱째, 토곡혼은 토번과 친해서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번 패전으로 설인귀는 평민으로 되돌아간다. 다만, 설인귀가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고구려에서는 다시 반란이 일어나고, 할 수 없이 당나라조정은 평민인 설인귀를 기용하여 난을 평정하고자 한다. 그는 다시 한반도로 간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살인사건으로 그는 다시 상주(象州)로 유배된다.

 

상주유배기간

 

상주에 유배가 있는 동안의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동설씨의 가족지 및 기타 일부 사서에서는 그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지방관리를 도와서 비적들을 토벌했고, 이재민을 구조하고, 농민을 이끌고 관개사업도 하며, 농민간 분쟁을 조정해주었다. 현지인들은 모두 그에게 감격했고, 그가 떠날 때는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그가 죽자 사당을 만들었다.

 

노장의 최후

 

조정에서는 대사면령을 내려, 그는 다시 조정으로 되돌아온다. 당고종은 그를 다시 기용하면서 과주장사, 우령군위장군, 검교대주도독의 직을 내린다.

 

개요원년(681년) 이미 68세가 된 고령의 설인귀는 생애 마지막 전쟁을 시작한다. 과주장사로 있을 때, 동돌궐이 자주 당나라의 북방을 침범했다. 682년 돌궐의 추장인 아사나골독록은 돌궐의 유랑인들을 모아 세력을 확장하고 스스로 칸이라 칭했다. 영순원년에는 흑사성(내몽고 후허하오터 동북쪽)을 점거하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682년, 아사덕원진이 당나라에서 도망쳐 아사나골돌록과 힘을 합치며, 남주자사 왕덕무를 사살한다.

 

682년 겨울, 69세의 고령인 설인귀는 병든 몸을 이끌고 군대를 지휘한다. 대동일대에서 아사덕원진과 싸운다. 아사덕원진은 설인귀가 당나라의 주장이라는 것을 듣고는 바로 도망친다. 당나라군은 즉시 추격하여 1만의 수급을 베고, 3만여를 포로로 잡았다.

 

영순2년(683년) 2월 21일, 설인귀는 안문관에서 병사한다. 향년 70세이다. 당고종은 그를 좌효위대장군, 유주도독으로 추증한다.

 

설인귀는 평생 백포(白袍)를 즐겨 입었다. 그는 40년간 당나라의 장수로 있으면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 아들인 설납은 관직이 대원수, 재상에 오른다; 손자인 설숭(薛嵩)은 육주절도사, 평양왕에 이른다; 증손자인 설평(薛平)은 관직이 태자태보, 한국공에 이른다; 현손자인 설종(薛從)은 상장군, 하동현자에 이른다. 설인귀의 후예중 12대 47명, 그리고 하동설씨의 330여명이 당나라 289년동안 나라에 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