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북송시대에 축구를 축국(蹴鞠)이라고 불렀고, 아주 인기있는 스포츠였다. 당시 축구는 외형적으로 현대의 축구와 상당히 비슷했다. <<송조사실류원>>의 기록에 따르면, 공은 동물의 태반에 공기를 불어넣었고, 바깥에는 6조각 혹은 8조각의 뾰족한 모양의 가죽을 붙여서 만들었다. 외형상으로는 현대의 농구공과 비슷하였다.
당시에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축구운동에 빠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당시에 축구팀을 잘 관리하고, 경기를 규범화하고 규모와 수준있는 경기내용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축구를 하는 무리들의 단체인 "원사(圓社)"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회원들은 "원우(圓友)"라고 불렀다. 이 단체의 진용은 강대했다. 사람도 많았고, 영향력도 지금의 축구협회에 못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런 말이 유행했다: 원사에 들어가지 못하면, 늙을 때까지 풍류를 즐길 수 없다. 경기시스템과 사람수에 있어서 송나라의 축구는 신축성이 있었다. 수백명이 함께 참가하는 대형경기에서부터, 가정식의 몇 사람이 하는 소형경기까지 다 있었다. 만일 나중에 금나라와 몽골이 평민문화가 고도로 발달했던 송나라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현재의 축구계가 어떤 모습일지도 상당히 궁금하다.
이처럼 높은 수준의 스포츠활동에 스타가 없을 수 없다. 북송의 역사를 개관해보면, 높은 수준의 축구선수가 적지 않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래의 네 사람이다
첫째: 송태조 조광윤(趙匡胤)
역사상 전해지는 그의 화상을 보면, 조광윤은 몸이 뚱뚱하고 약간은 뚱뚱한 호나우두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상 그는 말타는 재주가 뛰어났을 뿐아니라, 축구실력에 있어서도 일류였다. 현존하는 <<송태조축국도>>(원작자는 북송의 소한신, 원나라때의 임모품이 현재 북경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음)를 보면, 송태조 조광윤과 그의 동생인 조광의, 재상인 조보등 6명이 백타식(白打式) 축국놀이를 즐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조광윤의 공차기는 당시에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백타(현재의 방식으로 하자면 '묘기축구')를 잘했다. 공을 찰 때, 머리, 어깨, 배, 무릎, 발등의 부위로 공을 차고, 변화가 풍부하고 다양했으며, 하고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둘째, 소술(蘇述)
그는 당시 수도인 개봉에서 이름을 날렸다. 황상까지도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의 경기장에서의 표현은 <<동경몽화록>>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남송의 <<무림구사>>에도 일부 축구스타가 열거되어 있다. '축구삼십이인(築球三十二人)"의 이름이 있는데, 당시 경기참가인원은 팀별 12명에서 4명이 증가하여 16명으로 늘어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때 두 팀의 명단과 위치를 적고 있는데, "좌군 16명. 구두(球頭) 장준, 교구(蹺球) 왕련, 정협(正挾) 주선, 두협(頭挾) 시택, 좌간망(左竿網) 정전, 우간망 장림, 산립(散立) 호춘등; 우군 16명, 구두 이정, 교구 주진, 정협, 주선, 부협, 장녕, 간망 서빈, 우간망 왕용, 산립 진준등"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나오는 축구선수출전명단이 아닌가 싶다.
셋째, 정위(丁謂)
이 사람은 역사상 평가가 별로이다. 왜냐하면, 유명한 재상인 구준(寇準)을 모함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축구실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축국을 좋아했고, 축국을 주제로 시를 몇 편 쓴 적도 있다. 사마광은 <<사마온공시화>>에서 정위의 축국시를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그는 시도 잘 지을줄 아는 축구스타였음을 알 수 있다. 문무를 겸비하였다. 당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정위에 관한 또 다른 기록으로는 송나라사람 유분이 쓴 <<중산시화>>에 나와 있다. 정위와 축구로 함께 이름을 날리던 사람인 수재 유삼복(柳三復)의 축구기술이 출중했다. 그는 재상인 정위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승진을 위하여, 매일 재상부의 축구장의 담장 바깥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축구장안에서 공이 날아왔다. 유삼복은 공을 주워들고는 공을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재상부에 들어간다. 정위를 만나자마자 그는 공을 하늘 높이 던지고, 한편으로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한편으로 머리, 어깨, 등의 부위를 통하여 공을 튕겼는데, 공이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이런 기술은 요즘도 보기 힘든 고급기술이다). 정위는 그를 보고는 아주 기뻐하면서 유삼복에게 관직을 내렸다고 한다.
넷째, 고구(高俅)
고구 및 그의 축구기술에 대하여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수호지에 나옴). 그러나, 도대체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을까? 책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공이 마치 아교처럼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고구는 원래 부마집의 문인이었다. 한번은 당시에 아직 단왕의 지위에 있던 송휘종의 집으로 일때문에 방문했다. 휘종은 마침 하인들과 축국을 즐기고 있었다. 공이 고구의 앞에 떨어졌는데, 고구는 바로 멋진 "원앙괴(鴛鴦拐)"를 시전하여, 공을 단왕에게 돌려보낸다. 고수의 한 수는 바로 알아보기 마련이다. 고구는 이 원앙괴 한 수로 즉석에서 모든 사람을 압도해버린다. 송휘종은 부마에게 고구를 달라고 한다. 나중에 그가 황제가 된 후에는 고구를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 조광윤이 황제가 되기 전에 맡았던 직책)를 맡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가장(楊家將): 역사와 소설 (0) | 2008.10.06 |
---|---|
주자(朱子)와 두부(豆腐) (0) | 2008.09.17 |
전연지맹(澶淵之盟)의 진실 (0) | 2008.07.16 |
아구타릉(阿骨打陵): 이장을 가장 많이 한 황제릉 (0) | 2008.07.06 |
아구타의 요나라에 대한 3대대첩 (0) | 2008.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