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전연지맹(澶淵之盟)의 진실

중은우시 2008. 7. 16. 18:58

작자: 미상

 

전연지맹은 중국에서 실패한 정책으로 일관되게 지적받아온 사례이다. 기존의 역사서에서는 일치하여 송나라는 거란(요)을 소멸시키지 못했을 뿐아니라, 전연지맹에서 요나라정권을 승인하고, 또한 "세폐(歲幣)"를 지급하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양송(북송 및 남송)의 쇠약을 가져와서, 국면이 날로 악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전연지맹의 실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북송을 세웠을 때, 북쪽의 거란(요)은 이미 수십년전에 독립국가로 성립되어 있었다. 송나라가 정통국가라는 지위는 후세의 한족역사가들이 붙여준 것이다. 후진(後晋)의 황제인 석경당(石敬塘)이 936년에 "유운십육주(幽雲十六州, 일명 燕雲十六州, 幽 혹은 燕은 北京을, 雲은 大同을 가리킴)"를 거란에 할양함으로써, 법률적, 사실적으로 이 지역은 거란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는 아직 후주(後周)나 송(宋)이 건립되지 않았을 때이다.

 

후주의 세종이 북벌을 감행하여, 그중 영막이주(瀛莫二州)를 "수복"했다. 이는 실제로는 후주의 거란에 대한 침입이다. 송나라가 후주를 승계한 후, 979년에서 986년사이에 3번이나 거란으로 진공한다. 이것도 역시 거란에 대한 침입이다. 송나라군대는 3번에 걸쳐 모두 처음에는 이겼다가 나중에 패한다. 거란은 계속 방어하는 입장이었다. 명장 야율휴가, 야율사진이 송나라군대를 유인하여 식량보급선을 차단함으로써 송나라군대를 패퇴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송나라로 남하할만한 힘은 없었다. 당시의 형세는 송이 강하고 요가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요사>>에 따르면 당시 요나라군대에게는 송나라에 대하여 "깊이 들어가지 말고, 성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한족의 소위 정통역사가들은 편면적으로 거란을 무시하여, 침략자인 송을 동정받을만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후 거란은 걸출한 정치가인 소태후(요나라의 황후는 모두 소씨인데, 소씨는 원래 회흘인이다)가 나라를 잘 경영하여, 힘이 날로 커졌고, 1004년이 되어서 비로소 유일하게 한번 송나라에 대한 대규모 침입전을 펼친다. 만일 요나라와 송나라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전통사가들은 반드시 요나라가 여러번에 걸친 침략을 받은 후에, 힘을 내서 반격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당시 거란군은 송나라국경 안으로 700리를 들어왔다. 다만, 후방에는 창주등 중요도시가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송나라는 놀란 나머지, 수도를 옮길 것까지 생각한다. 마침 대신 구준이 요나라가 이미 힘이 부친다는 것을 간파해서, 진종황제와 전연으로 가거, 일거에 거란군의 선봉을 격퇴하고, 총사령관 소달름(양업을 생포한 사람)을 죽인다. 이에 이르러, 요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고, 평화협상을 갈구하게 된다.

 

당시의 북송경제는 이미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 해의 주전량(鑄錢量, 화폐발행량)이 이미 500만관에 달했다. 명나라 276년간의 총 주전량이 겨우 1000만관인 것과 비교하면 송나라의 상업이 얼마나 발달했었는지 알 수 있다. 송나라의 재정수입을 환산해보면 은견(銀絹)이 7000만냥/필이상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진종은 요나라에게 지급할 "세폐"의 금액으로 백만의 금액을 생각하고 이를 가지고 평화와 맞바꾸고자 하였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요나라가 이미 힘이 빠졌으므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서 비록 이긴다고 하더라도 장기간 싸워야 할 것이므로 전쟁을 계속하자는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협상과정에서 거란은 두 개의 조건을 제출한다: 하나는 송나라에게 매년 은10만냥과 견20만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송나라의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송나라의 연간재정수입의 0.5%에 불과하였다. 이를 보더라도 거란은 확실히 더 이상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조건은 송나라가 바로 받아들인다. 다른 하나는 송나라에게 "영막이주"(요나라에서는 관남의 땅)를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나라는 단연 거절한다. 거란은 평화협상에 대한 마음이 급하여, 이를 고집하지 않는다. 이 두개 주는 이미 거란이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나중에 달성한 협의에서 송나라는 매년 거란에 "세폐"를 보내고, 거란은 이미 점령한 화북의 수십개주의 땅에서 물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영막이주를 송나라의 영토로 인정한다. 송에 있어서,이것은 외교적 승리이다. 그 후에 쌍방은 공동으로 영원히 동맹을 맺자고 하고, 대송황제와 대거란황제가 조약에 서명한다. 이후 송과 거란은 120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

 

이상이 송나라와 거란의 전쟁시말이다. 여기서 보면, 송과 거란의 관계에서 송나라의 거란에 대한 침공이 거란의 송에 대한 침공보다 훨씬 많았다. 쌍방관계에서 평화냐 전쟁이냐의 주도권은 실제로 송나라측에 있었다. 120년이후에 평화를 깨고, 거란사람들을 도살한 것도 역시 송나라였다. 후세사가는 선입견으로 인하여, "유운십육주"가 원래 송나라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송나라가 이를 수복하지 않고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므로 송나라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유추하면 전통하학자들이 북송을 경시하는 것은 북송이 그들이 바라는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당연히 송나라에 속하여야 할" 장성이북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수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땅은 한번도 송나라의 것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수복"을 얘기한단 말인가.

 

전연지맹은 쌍방변경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경제발전을 가져오고, 민족융합을 촉진한다. 거란족들은 대량으로 한족문화를 받아들인다. 이는 이후 거란민족이 한민족에 융합, 흡수되고 최종적으로 소멸하게 되는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문화와 평화의 역량은 군사역량보다 강하다. 거란은 군사적으로 한족에게 정복되지 않았지만, 문화적으로 동화되었고, 결국 한족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