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양가장(楊家將): 역사와 소설

중은우시 2008. 10. 6. 15:56

글: 문재봉(文裁縫)

 

양업(楊業), 양연소(楊延昭), 양문광(楊文廣)의 조손 3대는 모두 북송때 요나라와 싸운 명장이다.<<양가장연의(楊家將演義)>>는 그들의 용맹함과 전쟁사실을 가지고, "양가장" 이야기를 만들어 냈으며, 이는 나중에 널리 유포되어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재미를 위하여, 실제의 양가장에는 없는 많은 인물과 사건을 허구로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목계영(穆桂英)이 천문진(天門陣)을 대파한 이야기, 양육랑이 유주성을 함락시킨 이야기, 열두과부가 서쪽정벌에 나선 이야기등등이 그것이다. 많은 황당한 스토리도 추가되었는데, 팔선(八仙)중의 한종리(漢鍾離)와 여동빈(呂洞賓)이 싸우는 것등이 그것이다. 역사상 확실히 양가장이라는 사람과 사건은 있었다. 그중 양업, 양연소, 양문광의 세 사람이 가장 유명하다. 다만, 그들의 사적은 소설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신기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최근들어 사학자들이 이 방면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다만 아직도 여전히 이견은 남아 있다.

 

첫째, 양업이 초기에 송나라에 항거한 것이 잘못된 일인가 아닌가?

 

역사상 양업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다. 양업(楊業, 楊이라고 하기도 한다)은 본명이 중귀(重貴)이고, 병주 태원(幷州 太原) 사람이다. 산서 대현 양충무사에 보존되어 있는 <<양씨족보>>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양업은 한나라때의 태위(太尉) 양진(楊震)의 막내아들 양봉(楊奉)의 후손이다. 양업은 20여세때 태원으로 와서 북한(北漢)정권에 중용되어, 보위지휘사, 건웅절도사를 맡는다. 그는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여 여러번 공로를 세웠고, 북한사람들은 그를 '무적'이라고 불렀다. 북한의 황제인 유승균(劉承鈞)은 그에게 유(劉)씨성을 사성으로 내리고, 이름을 계업(繼業)으로 하였다. 그리고 시위 신군도우후(5대시대의 군사최고직위)에 임명한다. 이때 조광윤은 천하통일을 도모하고 있었는데, 양업은 북한의 황제인 유계원에게 송나라에 귀순할 것을 권하였다. 처음에는 유계원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거란의 지원을 받아 조광윤과 맞싸우고자 하였다. 여러번 전투를 벌였지만, 조광윤은 태원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송태종이 즉위한 후 친히 북한으로 진공했다. 유계원은 국력이 받쳐주지 못하여 태평흥국 4년(979년) 오월 육일 송태종에게 항복했다. 조광의와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양업은 여러차례 전공을 세웠고, 이때도 여전히 성의 남쪽을 굳게 지키면서 힘들게 싸우고 있었다. 조광의는 양업이 용장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유계원으로 하여금 심복을 보내어 투항하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양업은 송나라에 귀순하게 된 것이다. 송태종은 즉시 그에게 상을 내리고 양씨성을 회복시키며, 이름을 업이라고 하였다. 오래지 않아 양업에 중임을 맡기는데, 그를 우령군위대장군, 정주방어사에 임명한다. 같은 해 십일월, 송태종은 양업이 변방에 오래 있고, 적군(요나라)의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하여 양업를 지대주겸삼교주박병마부서에 임명한다. 이렇게 그에게 거란을 방어하는 중임을 맡기고 두터운 하사품도 내린다.

 

양업이 초기에 송나라에 항거한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양업의 일생에서 자랑스럽지 못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유는 수십년의 전란을 거쳐 당시 사람들이 통일을 갈망했는데, 북송이 출병하여 북한을 토벌할 때가 바로 좋은 시기였는데, 양업은 군대를 이끌고 북송에 저항하여, 천하통일에 불리한 작용을 하였고,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는 통일이 당시 역사의 대세라고 하더라도, 누가 통일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아직 북송이 천하통일대국의 주역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대말기에 병존하던 몇개의 정권은 모두 통일을 할 자격이 있었는데, 관건은 결국 그들간의 힘대결이었다. 게다가, 양업은 청년시대부터 북한정권에서 직책을 맡아 있었고, 당시 조광윤은 아직 군림천하를 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양업이 더 일찍 송나라에 투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 병사를 이끌고 송나라에 저항한 것도 각자 섬기는 주인이 다르기 때문이니 그 점에 대하여 가혹하게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다고 본다.

 

둘째, 양업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소설에서 쓴 바에 의하면, 양업을 해친 원흉은 반미(潘美)이다. 옹희3년 송나라군대가 북벌할 때, 반미는 서로군의 총사령관이고, 양업은 부사령관이었다. 반미는 양업의 재능에 대하여 질투하였고, 그리하여 양업이 승리를 틈타 추격하고자 할 때, 고의를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양초(糧草, 사람이 먹을 양식과 말이 먹을 풀)를 공급해주지 않았다. 결국 양업은 패배하여 죽게 된 것이다. <<송사 양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총사령관으로 변방을 지키던 장수는 그를 싫어 하였다. 몰래 황제에 글을 올려 그의 단점을 비난하였다. 황제는 이를 읽고는 일체 책임을 묻지 않고, 그 상소글을 봉하여 양업에게 보냈다" 당시 양업은 아직 요나라를 공격하지 않았을 때이고 아직 안문관을 지키고 있었으며, 지대주겸삼교주박병마도부서의 직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면 양업의 상사인 총사령관은 누구인가? 양업이 비록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찌만, 바로 반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송사. 양업전>>에 따르면, "반미는 그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반미는 이 사건에서 주요한 지휘책임자이다. 책임은 바로 그가 총사령관이면서 왕선의 경거망동을 제지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이외에는 더 이상 그의 책임이라 할 것이 없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더더구나 당시 왕신(王)이 감군(監軍)인데, 송태종시절에 감군의 권한은 매우 컸고, 반미가 비록 외척이며 총사령관이고 명신이지만, 역시 왕신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양업을 해친 절반의 책임은 당연히 왕신이 져야지 반미에게 지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상의 반미는 노련하고 전투에서 숱하게 승리한 명장이며, 양업과 7년이나 함께 싸웠고, 서로 뜻이 잘 맞았다. 이번 전투에 하필 양업을 사지로 몰아넣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왕신이 모함하였다는 견해를 지니는 사람들이 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송나라군대가 대주에서 패퇴할 때, 양업은 처음으로 요나라군과 정면으로 부닥치지 말 것을 주장하였으며, 샛길로 삭주를 기습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왕선이 이를 거부하고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양업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의 주력부대와 맞부닥치도록 핍박하면서, 자신은 원래의 전략대로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리하여 양업의 전군이 전멸하게 된 것이다. 이 주장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래도 약간의 결함은 있다. 먼저, 사서상에는 왕신과 양업의 갈등에 대하여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송사. 왕신>>에서는 그저 간단하게, "왕신은 성격이 강퍅하여, 말로써 양업을 자극했다. 양업이 힘껏 싸웠으나 적에게 함몰당하여, 왕신은 삭탈관직당하고 금주에 유배되었다"라고 적었을 뿐이다. 역사전적에도 왕신이 적과 내통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왕신의 잘못이라면 그저 지휘실책일 뿐이다. 이외에, <<송사. 양업전>>에는 명확히 기재하고 있다: "서상각문사, 울주자사 왕신과 군기고사, 순주단련사 유문유가 그 군대를 호위하였다" 즉, 당시 동시에 감군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왕신 이외에 유문유도 있는 것이다. 유문유의 관직은 왕신보다 위이다(단련사는 자사보다 높은 직위이다). 또한 유문유는 외척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쟁터의 경험도 상당했다. 즉, 유문유의 군대내에서의 권력은 절대 왕선보다 낮지 않았다. 반미는 충무절도사, 한국공인데, 외척신분에 개국공신이다. 왕신 감군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한손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셋째, 양문여장(楊門女將)의 진상은 어떠한가?

 

사노태군(老太君)의 원 이름은 사새화(賽花)이며, 양업의 처이다. 양씨집안의 웃어른이다. 후대의 희곡에서 그녀를 백세노인으로 그리고 있고, 요나라병사들이 송나라국경을 침범할 때, 여전히 장수로 병사를 거느리고, 거란병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와서 감탄할 수밖에 없다. 다만, 많은 관련 사료에 사태군에 관한 사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사상 사태군이라는 여인이 존재하기는 했던가? 어떤 학자는 고증을 거쳐, 역사상 확실히 사태군이라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고증한 바 있다. 그러나 사태군의 성은 사()가 아니라 절(折)인데, 나중에 와전되어, 사씨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양업이 젊었을 때, 이석, 임현 일대의 칠성묘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 때 부주 절씨집안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다. 절씨집안은 대대로 섬서 부곡(府谷)에 거주하던 집안이고, 절씨는 증조부이래로 대대로 군직을 세습했으며 여러차례 요나라와의 전투에 참전했다. 양씨집안도 이 땅에 대대로 거주하고 대대로 무관직을 맡았으니, 양집안은 문벌이 비슷한 편이고, 천생배필이었다. 그렇다면 사태군의 칭호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송나라제도에 따르면, 공신의 처, 모친은 모두 추증을 해줌으로써, 장려하는 것을 표시한다. 송태조 조광윤이 처음에 제도를 만들 때, 문무 여러 신하의 모친과 처의 봉호에 대하여 조서를 내린다. 그중 서자(庶子), 소경(少卿), 자사(刺史)등의 모친을 현태군(縣太君)에 봉하였고, 처는 현군(縣君)에 봉하였다. 절씨의 아들인 양연소등이 자사의 직에 머물렀으므로, 그의 모친은 당연히 모현태군(某縣太君)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세인들은 그녀를 사태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사태군은 무예에 정통하고, 기마와 궁술에 능하며, 비녀들을 위주로 한 가병(家兵)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남편을 도와서 공을 세운다.

 

양문여장중에 사태군이외에, 또 다른 눈에 뛰는 여장군이 있다. 바로 목계영이다. 희곡에서 여러번 목계영이 장수가 되어 병사를 이끌고 나가서 대장역을 맡아, 전쟁의 국면을 전환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목계영에 대하여 정사에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목계영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목계영이 허구일 뿐아니라, 양종보(楊宗保)라는 사람도 아예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또 어떤 사람은 목계영이라는 사람은 허구이지만, 양씨의 가족들 중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양연소의 아들인 양문광에게는 양기(楊琪)라는 당형(堂兄)이 있는데, 이 사람이 일찌기 모용씨(慕容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므로 목계영은 아마도 "모용"이라는 성이 와전된 것이며, "계영"도 아마 민간의 통속명칭일 것이라고 본다. 희곡소설은 개편이 허용되므로 이 모용씨를 가지고 목계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서 널리 퍼졌을 것으로 본다. 하물며, 모용씨는 선비족의 대성이고, 대대로 무관을 지내는 집안이므로 양씨와 통혼한다고 하여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넷째, 양업은 도대체 몇 명의 아들을 두었는가?

 

전통희곡에서는 양노령공(양업)과 사태군은 모두 9명의 자식, 칠남이녀를 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송사. 양업전>>에는 양업에게 모두 일곱아들이 있다는 기록만 있다. 남송의 이도가 저술한 <<속자치통감장편>> 권27에는 양업에게 아들 다섯만 있다고 적었다. 남송 왕칭의 <<동도사략>>에는 양연소라는 아들 1명만 기록하고 있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여보면, 도대체 양업은 몇명의 아들을 두었을지에 대하여 지금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양업의 아들중 이름을 떨친 사람은 양연소이다. 그의 본명은 연랑(延郞)인데, 송나라황실의 "성조(聖祖)"인 조현랑(趙玄郞, 조씨의 시조라고 함)의 이름을 피휘하여 '연소'로 개명한 것이다. 북한 천회원년에 태원에서 태어나고, 송 대중상부 7년에 천고양관의 술소에서 사망한다. 향년 57세이다. 양연소는 원나라때 나엽의 <<취옹담록>>에서 말하는 오랑(五郞)이다. <<보덕부지>>와 <<양가부연의>>에서는 사랑(四郞)으로 나온다. 다만 청나라때 강기의 <<진승수략>>에서는 육랑(六郞)이라고 한다. 민간희곡중에서는 모두 양업의 여섯째 아들로 나온다. 세월이 흐르면서, 양연소는 삼관에 위세를 떨친 양육랑(楊六郞)이 되어, 부하장수와 변방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거란인들이 두려워하는 인물이 된다.

 

양업의 넷째아들은 후세인들간에 논쟁이 많은 인물이다. 양사랑(楊四郞)은 정사에 이름을 연환(延環)이라고 적고 있다. 민간희곡에서는 연휘(延輝)로 나온다. 원곡에서는 양사랑이 양낭산전투에서 실종된 것으로 나오는데, 명나라때의 <<양가부연의>>에서는 양사랑이 전쟁중에 실종되지 않고, 요나라군에 포로로 잡혀서 소태후가 그에게 투항을 권하지만, 양사랑은 죽어도 굴하지 않고, 대의늠름하게 말했다고 나온다. 소태후는 양사랑의 무공을 좋아하고, 양사람의 모습이 뛰어나서, 경아공주(瓊娥公主)를 그와 결혼시킨다. 이리하여 양사랑은 거란국의 부마가 된다. 후세인들이 보기에 그는 거란에 무릎을 꿇고, 군주와 부친을 배신한 나쁜인물이 된다. <<송사. 양업전>>에는 양업이 전사한 후, 양사랑은 조정에서 전직관(殿直官)을 지냈고, 변절한 적이 없다고 나온다.

 

역사상 확실히 양가삼대의 혈전보국의 일은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구도 많이 섞여 들어갔다. 봉건조정에서는 양가장을 선전함으로써 충효사상을 보급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민간에서 유행한 것은 일반대중의 영웅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