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타 묘에서 나온 봉황무늬옥장식
글: 수은하(水銀河)
중국의 황제릉은 일반적으로 모두 위치를 부음포양(負陰抱陽), 장풍득수(藏風得水)의 풍수길지에 두고 있다. 조상의 유골이 이런 곳에서 기운을 얻으면, 즉 조상묘의 풍수가 좋으면 자손들이 음덕을 더 많이 볼 수 있어 소위 "신령안, 자손성(神靈安, 子孫盛)"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논리에 따라, 황제릉은 단순히 분묘일 뿐아니라, 왕조의 흥성을 위한 보험료였다. 그리하여 황제릉은 일단 자리를 잡으면 쉽게 이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의 기나긴 역사에서는 여러가지 예외가 있었다. 황제릉의 이장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금나라의 창립자인 완안아구타의 능묘는 3번이나 이장하였다. 머나먼 북방에서 남하하여 북경의 대방산에 이르기까지...이는 역사상 독특한 경우라 아니할 수 없다.
완안 아구타의 한자이름은 완안민(完顔旻)이다. 오늘날의 흑룡강 하르빈 동남쪽의 아스하 유역에 거주하던 여진족 완안부의 수령이었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말타고 활쏘는데 아주 능했다고 하며,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1113년 10월, 형인 완안 우야(烏雅)가 죽은 후,여진 각부락연맹장을 이어받아서 도발극렬(都勃極烈)이라 칭했다. 당시의 여진민족은 요나라의 부속민족이었으며, 대대로 진공을 바치고 핍박을 받았다. 완안아구타는 이런 불평등한 국면을 바꾸겠다고 결심한다. 그리하여 다음해 즉, 요나라 천경4년에 2500명을 이끌고 요나라에 항거하는 깃발을 든다. 첫번째전투는 대파영강주(大破寧江州, 지금의 길림성 부여 동남)였다. 1115년 정월, 완안아구타는 회녕(會寧,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남백성)에서 황제에 오르고 정식으로 금나라를 세운다. 동시에 한자명을 완안민으로 한다. 1122년, 다시 요나라의 중경을 함락시키고, 연말에 연경, 즉 지금의 북경을 함락시킨다.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 병사를 일으켜 승리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죽는다)라고..곧 요나라를 함락시킬 때쯤에 완안아구타는 돌연 1123년 8월 상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병사한다. 그가 금태조(金太祖)이다.
완안아구타가 병사할 때 금나라의 활동구역은 아직 역사상의 전성기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금나라는 아직 야만적인 분위기가 남아있었고, 머릿속에 무슨 풍수길지의 개념도 없었다. 그리하여 어디서 죽으면 거기에 묻는다는 원칙에 따라 아구타의 유골은 상경 회녕부 북성바깥에 묻힌다. 구체적인 장소는 오늘날 흑룡강성 아성시 서남 2킬로미터지점이며, 예릉(睿陵)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바로 아구타가 죽은 후에 첫번째 묻힌 곳이다. 봉분위에는 원래 영신전(寧神殿)인데, 영신전은 태조묘라고도 불렀다. 금나라말기 완안태평이 상경회녕부를 불태울 때, 능묘도 불태워진다. 오늘날 볼 수 있는 예릉공원은 5.1에이커에 달하는데, 그중 건축면적이 1000여평방미터이다. 영신전은 일찌감치 무너졌다. 그러나 대량의 건축자재는 남아있다. 예를 들면 기둥기초, 녹유유리기와, 회색조각무늬벽돌, 베무니기와등이다. 이 능은 1949년이후 대규모의 수선을 거쳤다. 현재의 배치는 옛제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현존하는 능대유적지를 중심으로 남북의 축선을 줌�으로 전도공간, 신도공간, 능묘와 영신전의 네개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관광객이 구경할 수 있는 곳으로는 작대, 유대, 옥대교, 화표석상생, 영신전, 능대와 지궁등이 있다. 영신전내에는 아구타와 그의 6명의 공신의 신상이 서 있다. 일찌기 여진인들이 천백년동안 가장 숭상하던 곳이며, 많은 여진죽 후손들이 와서 참배한 곳이다. 지궁내에는 금태조 완안아구타의 관과 병기, 마필등 순장품을 놓아두고 있으며, 소박하고 단아한 아구타의 생전벽화도 있다.
이후의 사실에 의하면, 이 묘는 완안아구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여관이었다. 1135년(천회13년) 2월, 금태종 완안 오걸매(吳乞買)의 유언에 따라, 그의 능묘는 호개산(胡凱山)으로 옮겨져 금태조와 합장해서 각각 공릉(恭陵), 예릉이라고 불렀다. 역사에서는 합릉(合陵)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금나라는 마침내 풍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호개산을 그들의 용맥으로 확정한다. 이 호개산은 도대체 어디인가? 학술계에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원인은 아마도 <<금사>>의 작가가 호개산이 금나라라는 이름과 함께 영원히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정확한 위치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사람의 생각은 하늘의 생각을 따르지 못해서, 황제의 능침이 중도(북경)의 대방산으로 이장하면서, 호개산이라는 이름은 사료에서 사라진다. 사관이 잠시 게으름을 피워 위치를 명확히 언급하지 않은 바람에, 후세인들은 어디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 전설상의 호개산이 어디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중국의 학술계는 설전을 벌이고 머리를 굴렸다. 최근들어 제3차 시급문물보호단위명단이 공포되면서, 호개산은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왜냐하면 명단중에 "금대초기황릉구"라는 것이 나타났으며, 이 능구의 각종 데이타는 사서중의 호개산에 대한 기재와 아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아성구 송봉산진 삼청둔 서북 1.5킬로미터의 노모저정자산 남록이다. 산위에는 두 개의 신비한 무덤이 있는데, 천재인재등 사서에서 기록하지 아니한 원인으로 현재는 그저 능묘의 주위에 커다랗고 소박한 석귀부, 석인, 석양, 석향로, 석고등의 문물이 남아 있다.
이 두 개의 능묘는 1961년에 발견되었다. 산위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아십하의 강물이 산 아래로 흐른다. 두 개의 묘는 50미터가 떨어져 있다. 능앞에는 완벽한 문무관 옹중상이 있는데, 그중 문관상은 175센티미터이고, 머리높이는 36센티미터, 이마너비가 18센티미터, 어깨너비가 60센티미터이다. 무관상은 191센티미터로, 머리높이가 40센티미터, 이마너비가 32센티미터, 어깨너비가 60센티미터이다. 이 문물은 바로 이 능묘의 주인이 아주 존귀하고 높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왕이 아니면 적어도 제후이고, 무를 숭상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료의 기재에 의하면, 이 두개의 금나라능묘가 위치한 장소는 현지인들이 "노모저정자"라고 한다. 노인들에 따르면 이는 노올술정자(老兀術頂子)와 같은 것인데, 역사상 금올술(金兀術)이 아주 유명하고, 완안아구카는 그의 부친이므로 "노올술"이라는 명칭을 얻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노모저정자"가 금나라상경 황궁과 가까이 있고, 금나라때 황가의 용맥의 습관이나 능묘앞의 설치물을 볼 때 이 능묘는 '황릉'의 규격이므로, 바로 '노모저정자'가 바로 호개산이라고 보고 있다.
아쉬운 것은, 완안아구타는 오개산에서 20년간 안정되게 자리압은 후에, 1155년에 다시 파내어져서 다시 남으로 이전한다. 개장된 곳은 바로 북경의 대방산(大房山)이다. 대방산에 금나라황릉은 모두 17개가 있다. 원래는 아주 화려하며, 기세가 대단했으나, 명나람말기에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화가난 천계제가 살아있는 누르하치를 이기지 못하자, 누르하치의 조상묘를 파헤치게 함으로써, 애신각라씨의 풍수를 망가뜨리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여진족인 완안일가의 황제묘가 그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대방산의 황릉은 폐허로 변해버렸다. 청나라에 이르러, 강희제는 일찌기 금태조와 금세종의 능전을 수리하고자 하였고, 석비를 세워 대방산의 금릉이 홰손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 비문을 보면, 대방산의 금나라황릉이 대규모로 파괴된 것은 명나라말기 통치자들이 청나라의 공세를 막아내고자 음양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방산의 금나라황릉을 부숴버린 것이다. 강희제는 비록 약간 수리하기는 하였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이었고, 규모는 예전만 훨씬 못했다.
완안아구타의 능묘가 발견된 것도 우연한 일이었다. 1980년대말, 고고전문가들이 대방산의 금나라황릉유적지에 대하여 조사할 때, 주릉구역내에 현존하는 청나라 대보정유적앞 약 15미터지점에, 거대한 석갱(石坑)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다. 당시에는 그냥 제사갱(祭祀坑)이라고 명명했다. 2002년 봄, 북경시문물연구소는 유적지를 정리하다가 이 대석갱이 일찌기 방산구 주구점 진룡문촌 촌민의 녹화용 저수지로 쓰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도 아래에 옛날 금나라의 창시자인 완안아구타가 묻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정리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정리를 시작하자 깜짝 놀란다. 대석갱안에서 200여개의 약1톤짜리 거석들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 거석들은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옮겼는데, 갱저에서 석관묘가 점차 모습을 드러냈다. 이 능묘에는 모두 4개의 석관이 발견되는데, 그중에는 용무늬, 봉황무늬의 한백옥석관이 황실전용이라고 인정받았다. 관련문헌의 기재에 따라, 금나라황릉의 주릉구내에 5대의 제왕이 묻혀 있다. 즉, 태조, 태종, 덕종, 예종, 세종이다. 이 능묘의 묘갱은 전체 금릉유적지의 중축선상에 있어서, 전문가들은 금태조 완안아구타의 예릉으로 판단했다.
늠요에는 완안아구타의 용관이 이미 부서졌고, 겨우 관뚜껑과 동쪽판이 남아있지만, 위에는 용무늬(團龍紋)와 구름무늬(流雲紋)가 있었다. 봉관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데, 용관의 북쪽에 있다. 전체는 한백옥석을 파내서 만들었다. 두껑과 관에는 쌍봉문을 조작하고 안에는 금가루를 넣었다. 사벽에는 송향을 채워넣었다. 석관내에는 목관을 넣고, 바깥에는 홍칠을 발랐다. 사각과 정중앙에는 마름모형의 도금은장식이 있었다. 위에는 봉황새무늬가 있다. 남북양쪽의 은장식위에는 대칭형의 두개의 철환이 있다. 관내에는 머리뼈와 다리뼈가 남아 있고, 금사봉관이 하나 부장되어 있었다. 무늬가 아름다울 뿐아니라, 보존도 아주 완전했다. 800여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금빛이 휘황했다. 옛날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남으로 북송을 멸한 금나라가 일찌기 역사서상의 한 페이지로 되었다. 완안아구타의 이 유물만이 이 제국의 옛 풍채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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