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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정명수(鄭命壽): 조선 '태상왕'역할을 한 조선통역

by 중은우시 2008. 6. 25.

발췌: 양매영(楊梅英)

 

청나라가 굴기한 후, 중원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귀순한 한인들 특히 팔기(八旗)에 들어간 한인들은 순수한 만주인들이 할 수 없는 역할을 해냈다는 것이 학계의 컨센서스를 이루고 있다. 사실상 한인외에 조선인, 몽골인들도 유사한 역할을 했다. 본문에서 언급한 조선통역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집단이었는데, 거의 중시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스스로 귀순하기도 하여 만주팔기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통역의 지위를 활용하여, 후금(청)과 조선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굴마훈(Gulmahun, 古爾馬渾)은 가장 돋보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통하여, 조선통역이라는 이 특수한 집단을 깊이 파고들면, 청나라초기의 정치에서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굴마훈의 본명은 정명수

 

<<팔기만주씨족통보>>에는 만주팔기안의 고려성씨를 언급하고 있는데, 정홍기의 포의인 중에서 "굴마훈, 대대로 은산현 지방에 거주, 국초에 귀의함. 원래 통역관을 맡음. 아들 백진괴는 원래 호군교를 맡음. 손자 망동의, 피점구는 원래 호군교를 맡음"이라고 되어 있다.

 

"굴마훈"은 만주어로 '토끼'를 의미한다. 만주족은 동물이름으로 사람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이 조선통역도 자주보는 만주족의 이름을 채용했다. 종실인 아민의 셋째아들과 이름이 같다. 사료를 찾아보니, 이 통역 굴마훈은 조선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로, 원래 이름이 "정명수"였다. 한자로 '고아마홍(孤兒馬紅)' 혹은 '곡아마홍(谷兒馬洪)'이라고도 쓴다. 인조, 효종의 양 임금때 활약했는데, 현종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중국자료에서는 아민의 아들 굴마혼을 제외하고, 이 만주에 귀의한 조선인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조선 인조 23년(1644년) 윤6월 갑신일에 청나라조정은 공부상서 흥능, 예부계심랑 오흑, 통역관 고아마홍(정명수이다)을 파견했다.

 

조선 효종 3년(1652년) 12월 병진일에 청나라 사신은 오늘 내원학사 소납해, 매륵장경 호사, 이사관 곡아마홍을 보냈다고 보고하였다.

 

조선 <<인조실록>>은 고아마홍이 바로 정명수라고 적고 있다. 처음에는 <<심양장계>>에 나온다.

 

조선인조 21년(1642년) 9월초 2일의 장계에, "...대통역관 고아마홍은 정명수..."라고 되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원시증빙일 것이다.

 

확실히 정명수의 만주이름은 Gulmahun이고, 음역을 하여, 여러가지로 쓰고 있다. 조선실록에서 정명수에 관한 기록은 많다.

 

조선 <<인조실록>>은 "(정)명수, 평안도 은산(殷山)의 천한 노예이다. 어려서 누르하치에 포로로 붙잡혀갔다. 성격이 교활하여, 몰래 본국의 사정을 알려주니, 칸(누르하치, 청태종)이 그를 믿고 아꼈다"

 

조선 <<효종실록>>은 "영의정 정태화가 말하기를 '듣기로 정명수는 죄를 받아 쫓겨났다고 하니, 이는 아주 다행입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는 '그 올린 글을 보니, (정)명수의 그와 같음에도 죽음을 면한 것을 보면, 그곳의 형법이 어지러움을 알 수 있겠다. (정)명수가 간교하고 교활하니, 죽지 않으면 혹시 다시 살아나서 우환이 될까 걱정이다'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실록>>은 "(정)명수는 서관 사람이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통역관으로 일했는데, 우리나라에 포악하게 하였고, 기강을 무너뜨림이 극에 달하였다"

 

전체적으로 정명수는 원래 조선 평안도 은산 사람이다. 원래 어려서 포로로 잡혀가 만주이름인 굴마훈으로 개명하고, 후금 및 청나라 칸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하여 영향력있는 통역관이 된다. 특히 인조후기에 정명수는 크게 활약하는데, 조선의 태상황 역할을 한다. 효종조에 마침내 청나라에서 처벌받고 그의 통역생애를 끝낸다. 그러나 현종조에 이르기까지도 정명수에 대한 원한은 가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천명연간에 "바크시(巴克什)"로 집안을 일으킴

 

만주기록에는 '나라초기'에 왔다고 되어 있고, 조선의 기록에는 '병자년(즉, 1636년)'에 포로로 잡힌 후 오랑캐의 통역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도대체 그는 언제 만주에 포로로 잡힌 것일까?

 

<<만문노당>>을 보면, gulmahun에 대한 기재에서 천명8년 4월에는 직함이 적혀 있지 않고; 천명7년(1622년) 6월 11일의 기록에 gulmahun의 직함이 비관(備官, beiguwan)으로 적혀 있다. 이는 우록액진에 해당하며 지위는 유격이하 천총이상이다.

 

주의할 것은 이 부분이다. 천명9년 6월의 논공행상에서 "gulmahun be baksi seme beyei teile"라고 적혀 있는데, '바크시(baksi)'는 몽고어로 원래 의미는 선생 사부라는 뜻이다. 누르하치가 '서방(書房)'에 근무하는 문인을 바크시 혹은 수재(秀才)라고 불렀다. 중용받는 자에게는 '바크시'라는 칭호를 내렸다. 예를 들어 몽고문자를 가지고 여진문자를 창제한 '어얼더니바크시' 만,몽,한문에 능통했던 '시푸바크시' 그리고 몽골인인 '우나거바크시'등등이 그들이다. 굴마훈이 바로 이런 바크시에 들어갔던 것이다. 천총5년에 청태종은 '문신으로 바크시라고 부르는 것을 금한다. 모두 필첩식(筆帖式)으로 부른다. 원래 바크시의 칭호를 받았던 자들은 그대로 쓴다" 이로써 볼 때 누르하치 시절에 바크시의 칭호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명년간에 바크시는 무관들 중에서 뛰어난 자들을 부르는 칭호로 바뀌었다. 천명9년의 바크시를 받은 굴마훈과 천명7년의 비관을 받은 굴마훈이 동일인인지 여부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아래에서는 일단 비관 굴마훈은 차치하고, 바크시 굴마훈을 좀 더 알아보자.

 

천총3년(1629년) 4월, 청태종은 서방을 문관으로 고치면서, "바크시 다하이를 필첩식 강림, 소개, 굴마훈, 투부치등 4명과 함께 한문서적을 번역시켰다; 바크시 쿠르찬은 필첩식 우바시, 차수카, 후추, 첨바등 4명과 본조의 정사를 기록하게 하여 역사의 귀감으로 삼았다" 여기서의 호칭은 천총5년의 규정과 일치한다. 천명연간의 '바크시 굴마훈'은 여기서는 '필첩식 굴마훈'이 된 것이다.

 

천총10년, '문관'은 다시 '내삼원'으로 바뀐다. 문서번역을 담당하던 필첩식 굴마훈은 다시 내국사원에 편입된다.

 

숭덕원년(1636년) 11월, 태조무황제실록이 완성된다. 예부에서는 국사원에서 연회를 베풀고, "한족 학사 나수금, 왕문규, 원외랑 의성격, 돈배, 양만흥, 굴마훈, 석대, 고식에게 각 은 40냥을 내렸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굴마훈은 '원외랑'으로 표시된다. 이것은 아마도 청나라조정에서 실록을 고친 결과일 것이다. 순치연간에 처음 나온 <<태종실록>>에서는 '부리필첩식(副理筆帖式)"으로 되어 있고, 더욱 원시의 <<만주노당>>에서는 "ashan i bithesi"(의역하면 부필첩식)으로 되어 있어 천총연간의 호칭과 일맥상통한다.

 

이외에 국사원 숭덕5년의 자료중에서 5ㅐ에 '굴마훈이 쓰다'라고 되어 있는 우록장경승습칙서가 있다. 비록 직함을 쓰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나오는 다른 국사원 구성원들이 칭호를 보면, '승정' '참정' '이사관' '부이사관' '주사' '필첩식'등으로 원래의 칭호를 보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굴마훈은 부이사관 직함이었을 것이다.

 

내국사원의 직책중에는 '인근 국가에서 오는 왕래서찰"을 역사책에 편입시키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온 굴마훈이 후금과 조선간에 오가는 통역을 맡았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숭덕7년(1642년) 정월, '통역 굴마훈은 성유를 전하여 김상헌등을 너희나라 의주에 구치하라고 하였다' 10월에는 '황상께서 내원학사 나석, 병부계심랑 파파, 통역 굴마훈을 조선으로 보내어" 도망친 병사 임경업의 일을 추궁하도록 하여다. 굴마훈은 통역의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순치연간에 굴마훈은 여전히 이사관 및 통역이었다. 순치2년(1645년) 6월 초1일, 조선국왕은 셋째아들등을 북경으로 보내어 축하했다. 청나라에서 보낸 하사품은 '계심랑 옥혁, 낭중 기뢰, 장경 굴마훈 등이 역관으로 보내줬다' 11월 11일 '내원학사 기윤격, 예부랑중 주세기, 통역 굴마훈은 조선왕의 둘째아들 이호를 세자로 책봉"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갔다.

 

천명, 천총, 숭덕, 순치의 4시기의 중국사료와 조선사료를 종합해보면, 천명연간의 바크시 굴마훈은 바로 천총시기의 문관의 필첩식 굴마훈임을 알 수 있고, 숭덕연간의 내국사원 '부리' 및 '통역' 굴마훈은 순치때에도 바뀌지 않는다. 이는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 언급한 정홍기 포의통역 굴마훈과 일치한다. 즉, 조선 의주 은산에서 온 천리(賤吏) 정명수이다.

 

정명수는 천명연간에 이미 후금에 들어와 바크시가 되었다. 아마도 천명4년(1619년) 살이허 전투후에 포로로 잡힌 조선병사일 수 있다. 즉, 조선실록을 보면, '무오, 정묘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자가 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일 수 있다. 그의 원적은 평안도 의주 은산현인데, 이 곳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선이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한어를 알았을 것이다. 포로로 잡힌 후에 금방 만주어를 배우고 만주이름 굴마훈으로 개명한다. 누르하치가 좋아하여 서방에서 일하게 하고 바크시중의 하나가 된다. 나아가 청태종때의 문관, 내원의 부이사관 통역을 지낸다. 조선통역의 자격으로 후금(청)과 조건간의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선에 힘을 쓴" 통역

 

정명수는 점차 조선과의 교류에 관여한다. 여러번 사신단을 따라와서 외교적인 역할을 해낸다.

 

후금 천총7년(1633년)에 정명수는 이미 통역으로 조선에 온다. 그러나 지위는 높지 않았다.

 

숭덕원년 청나라가 조선에 진군한다. 화의조약을 맺는 과정에서 정명수의 역할이 드러난다. 다음 해, 협상이 시작되는데, 조선측의 통역원은 "정명수에게 뇌물을 바치면 일을 평화롭게 끝맺는데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은 은1천냥을 정명수에게 주고, 은3천냥을 각각 용, 마 두 만주귀족에게 준다.  용은 당시 청나라 호부승정인 잉어얼다이(英俄爾垈, 조선에서는 龍骨大라 부름)를 말하고, 마는 호부참정 마푸타(馬福塔, 조선에서는 馬夫大라 부름)를 말한다. 이때 정명수는 잉어얼다이, 마푸타와 함께 조선에 머물며 거중조정역할을 한다. 심지어 조선세자에게 엄히 타이르기도 하여 조선인들이 경악해 마지 않는다. 이후 쌍방간의 외교사무에서 정명수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숭덕 4년 11월 청나라의 칙사가 오믈 조선은 준비하였다. "이번에 칙사가 오는데, 속은도 면해주고, 기병도 감해주었다. 양식을 도와주는 일은 역시 세공미의 수에 따라 납부하게 되었다. 마사(馬使)는 주선을 했다고 하니, 별도로 돈을 주어 감사의 뜻을 표하고, 정역(鄭譯)에게도 역시 재물을 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고, 상께서 그 말을 따랐다" 마푸타가 사신으로 오는데 따라와서 통역을 담당했던 정명수는 다시 조선정부로부터 중시받았다.

 

숭덕8년 5월 14일, 조선은 청나라조정과의 협상에서 가을에 보내는 식량과 기녀를 줄이는 문제를 논의했다. 여기서도 '정역이 주선을 많이 해주었다'고 적고 있다.

 

순치 2년 2월, 청나라가 중원에 진입한다. 남방의 조운이 열리지 않아, 양식위기가 발생한다. 청나라조정은 정명수등 3명을 칙사로 보내어 조선에서 쌀 20만석을 급히 마련하여 북경으로 보내라고 한다. 담판은 정명수가 주재했다. 여러번 교섭한 후, 정명수는 조선이 제출한 10만석을 보낸다는데 동의한다. 그리하여 조선은 은3천냥을 감사의 표시로 세 사신에게 보냈다. 황상은 여기에 2천냥을 더 얹어 5천냥을 맞추어 주었다. 며칠 후 조선국왕은 다시 은1천6백냥을 사신 2명에게 보내고, 3천5백냥을 정명수에게 보냈다. 세자는 별도로 두 사신에게 1200냥을 보내고, 정명수에게 1천냥을 보냈다. 정명수가 얻은 뇌물은 다른 두 사신보다 2배이상이었다. 그 한 사람만 6천냥 이상을 받았다. 호조의 사례금외에 황제와 세자의 사례금까지 직접 받았다. 이로써 정명수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명수에게 뇌물을 바침으로써 조선은 10만냥 양식의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순치 3년 정월, 정명수는 세자를 책봉하고 청나라로 돌아간다. 조선은 칙사 3사람에게 각각 은1천냥, 주 2백필, 세마포 60필, 면포 300필을 준다. 그중 정명수에게는 은700냥에 몰래 3천냥을 주고, 세자가 800냥을 준다" 정명수 1인이 얻은 것은 칙사 3사람이 얻은 것보다 많았다. 조선에 갈 때마다 정명수는 통상적인 선물외에 몰래 주는 뇌물까지 얻었다.

 

순치 4년 8월, 청나라가 조선의 세폐대미 900석, 목면 2100필, 궁각 200통, 순도 10병, 호초 10두 및 방물중 흑주 마포대 백세저포등을 감면해주자, 조선국왕은 비국당상관과 토론하여 '이번의 감면에는 정명수의 공이 크다'고 하고 '11월에 정명수에게 은 2300냥을 보낸다.

 

이로써 볼 때, 청나라조정과 조선의 외교사무를 처리하는 중에, 정명수는 주선에 역할을 많이 했고, 조선으로부터 대량의 뇌물을 받았다. 청나라와 변방의 무역을 연구한 장존무 선생은 "청나라사신, 특히 통역관은 매번 상국의 위세를 드러내며 거드름을 피웠고, 속국을 괴롭혔다. 조선은 일을 잘 처리하기 위하여 혹은 인정에 호ㅗ하기 위하여 매번 몰래 뇌물을 주고 몰래 은냥을 건냈다"

 

조선군신의 "태상황"

 

외교사무외에, 정명수는 조선의 내정에도 간섭했다. 조선군신의 "태상황"노릇을 한 것이다.

 

숭덕6년 5월, 정명수는 이조참판 이식이 '김판서등 여러 사람을 옹호한다고 보고 이직을 당상관에서 당하관으로 쫓아낸다. 김판서는 바로 김상헌으로 척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찌기 심양에 끌려가서 6년간 갇혀 있었다. 순치2년에야 풀려나 조선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뜻을 꺽지 않아, 청나라에 항복한 한인 경중명도 높이 평가했다. '동국에는 김상서가 있을 뿐이로다"라고 하였다. 효종조에 이르러서도 김상헌에 대하여는 거리낌이 있었다. 일찌기 정명수를 파견하여, "나를 속이고자 하여도, 우리는 귀와 눈이 많다.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라고 질책한 적도 있다.

 

숭덕 8년 3월, 정명수가 파직시키라고 하여, 형조판서 원두표의 직위를 박탈한 적이 있다. 그는 조선의 항청총병 임경업을 보낼 때의 비국 당상관이었다. 순치2년 11월, 정명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조선의 호조판서 민성휘는 스스로 직책을 사직하고자 청했다. 왜냐하며 이전에 사신을 맞이할 때 정씨에게 빌붙어 횡행하는 소리를 장살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정명수는 도착한 다음 이를 듣고 웃으면서, '호판 나라의 중임을 어쩨 이전의 자잘한 일로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동시에 이조는 원리 이식이 칙사를 접대해야 하는데, 정명수가 이식을 무시하는 바람에 김육이 대신했다. 순치 4년 3월, 평안감사등이 정명수가 말해서 파직되었다.

 

내정을 처리하는 측면에서도, 조선군신은 힐책을 받지 않으려고 계속 조심했다. 순치원년 4월, 정명수가 말을 전해서 '덕인을 처단하라'고 하여, 조선은 종실의 회은군 이덕인을 대정현에 안치했다. 순치2년 6월, 조선에서 정명수에게 물었다. '청나라에 죄를 지은 조선의 신하들 중, 이경여, 이명한, 신익성, 신익전 형제(동양위, 조선세자의 고모부)를 이미 기용해도 좋다고 허락받았는데, 또 어떤 사람을 기용해도 좋겠습니까?" 그러자, 정명수는 '청나라는 이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은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지 않다. 본국에서 알아서 하면 된다."라고 하였다.

 

순치7년 2,3월에, '6사신힐책"사건이 벌어진다. 주로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 도르곤의 청혼문제이다. 정명수는 호부상서 바하나등 6사신과 함께 들어와 조선에서 김상헌, 조형, 김집등 3인을 기용한 것을 힐책했고, 그리고 6경, 양사승지등을 불러서 일본과 교류한 상황을 문책했다. 그리고 조선에서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시킨 일을 물어보았다. 결국, 조건은 할 수 없이 영상 이경호, 조형을 의주 백마성으로 귀양보내고, 김상헌, 김집등도 물러났다. 그리고 종실녀인 의순공주를 보내기로 한다. 6사신중 정명수는 다섯번째였는데, 가장 활약을 많이 한다.

 

종합하면, 정명수는 조선의 정치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적지 않았다. 위로는 종실에서 비국의 당상의 핵심 고급관리부터 지방각도감사장관의 임명, 처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군신은 모두 그의 눈치를 보며 처리했다. 정명수가 한동안 (특히 인조시기)에 조선내정에 많이 간섭했다. 심지어 정명수가 쫓겨난 후인 효종조에도 조선세자의 동궁찬선 송준길이 '전날 이셩장, 정명수등과 사이가 좋지 않아 불안하니' 나중에 청나라 사신이 오면 고향에 내려가 있겠다고 한다. 정명수는 떠났지만 그의 위세는 남아 있었다. 이는 그의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단기간내에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직접 조선의 내정에 간여하는 외에, 자기의 특수한 지위를 활용하여 사익을 많이 챙겼다. 숭전4년(인조 17년) 6월, 정명수에게 잘보이기 위하여, 조선의 영상 최명길은 조선 관서의 정명수의 모친을 공양하기로 하고, 정명수에게 관직을 내렸다. 정명수는 아주 기뻐하였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속이기 위하여 날짜를 앞당겨 달라고 하여, 명나라 천계8년(1628)에 '동지중추부사'를 받은 것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정명수의 모친이 죽었을 때, '정부인'의 칭호를 받는다. 숭덕8년(인조21년) 10월, 정명수의 고향인 조선 평안도 의주 은산현은 부(府)로 승격된다. 다음 해에 그의 부모의 장지가 있는 곳인 성천부 동면을 은산부에 귀속시킨다.

 

정명수는 원래 '천한 노비'출신이다. 사회적 지위가 아주 낮았다. 그의 친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정명수가 득세하자, 그들도 함께 날뛰었다. 정명수의 동생의 딸인 사생은 원래 숙천의 관비였는데, 나중에 관비를 면한다; 매부인 임복창은 성천의 정병이었는데, 정명수가 요청하여, 군역을 면한다; 정명수는 그의 족속들을 천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데, 조선의 비국은 어쩔 수 없이 따른다.

 

정면수는 다시 관계망을 넓힌다(특히 관서지역). 그의 처제인 봉영운은 원래 정주관노인데, 정씨의 압력으로 '본도수령'을 받는다. 그 자신이 부임하고자 하지 않아 자리가 비어있게 된다. 정명수는 다시 청하여, 영원군수직을 받는다. 족질 이옥련은 원래 은산공생인데, 문화현령의 자리를 받는다 오래지 않아 '통정'으로 다시 승진한다. 양자인 정선은 사도사 주부직을 받는다. 심지어 예전에 은혜를 베풀었던 의주의 한득련도 대길호리권관을 받는다. 정명수는 의주에 또 다른 심복 최득남이 있는데, 그도 '천한 노예로 의주에 살았는데 정명수에 아부하여 국가의 기밀을 많이 누설하였고, 명수가 아꼈다. 조정은 정명수의 뜻에 따라 그에게 군수직을 내렸다.

 

조선의 관서지방의 일부 관직은 심지어 정명수의 친족이 세습했다. 인조 26년 3월, 정명수가 족질 장계우를 의주 방산만호직에 해달라고 요청하고, 다음 해 정월에 안주변장 노강첨사직을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 원래의 '방산만호'직은 동생의 사위인 박천교생 김전에게 넘겨주게 한다.

 

조선의 효종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청나라 사람들이 어찌 우리나라 일을 이렇게 상세히 아는가? 전후의 힐책은 모두 정명수가 조종하는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도 말했다: "서로인이 정명수와 친밀한 자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세세한 일들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이로써 볼 때 정명수는 심복들을 활용하여 아주 뛰어난 정보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대소사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리하여 조선의 군신들이 아주 꺼려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정명수는 조선의 대신들과 잘 사귀어 상층관계망을 형성했다. 인조때의 이민구는 원래 재상의 아들이고, 문재가 뛰어났는데, 강도에서 실직하여 서로에 귀양가 있었따. 정명수의 처제를 첩으로 들이면서 정명수의 힘을 믿고 조정에서 발호했으니,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 "고금천하에 신하로서 다른 나라와 결탁하여, 군주를 협박하다니, 어찌 민구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라고 한탄하였다. 또 인조때 좌의정을 지낸 신경신은 정명수와 관계가 좋았다. 영상 최명길도 그런 혐의가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매번 명길이 공로가 있다고 서로 말합니다' 인조도 '청나라에서 영상을 다른 사람과는 달리 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멸길 본인은 아주 재능이 있었고, 일찌기 구시지상(求時之相)으로 불린다. 그러나 척화파 대신을 붙잡아 보내어 사림에서는 '소인'으로 평가했다. 이민구와 마찬가지로, 모두 조선의 주화파 대표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청의(淸議)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민구, 신경식, 최명길과 같은 조선의 재상들은 정명수의 인척, 혹은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정명수가 조선의 정치에 영향을 깊이 끼칠 수 있었던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극이쇠(盛極而衰)의 결말

 

정명수가 어떻게 조선의 '태상황'이 될 수 있었는가? 그가 청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으로 왔기 때문이고, 청나라의 대변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정명수의 방자함과 담대망위(膽大妄爲)를 설명하기 힘들다. 이는 그의 조선통역집단에서의 지위를 생각해야 한다.

 

천명시기의 바크시에서 천총, 숭덕연간의 통역, 필첩식까지 지냈지만 순치제때만은 못했다. 특히 황부섭정왕 도르곤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가 최전성기였다. 그 연유를 따져보면, 정명수는 도르곤의 기에 속한 인물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첫째, 청나라에서 조선사무를 주관하는 대신은 잉어얼다이(英俄爾垈)로 정명수를 심복으로 생각해서 극력 보호했다. 이는 숭덕연간부터 나타났다.

 

숭덕4년(인조17년, 1639년) 정월 21일, 심천로가 심양에 와서, '조선이 2600냥 및 잡물 7마리분을 정명수, 금석을미에게 뇌물로 바쳤다"고 고발했다. 청나라 형부에서 사람을 조선에 보내어 조사했는데 고발한 주모자는 조선세자관의 정뢰경, 강원사서 김종일등이라고 밝혀낸다.  그러나, 잉어얼다이 마푸타등이 극력 보호해주어서 정명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뇌물을 받고 장난을 친 일도 묻혀진다. 정뢰경, 강효원등은 오히려 두 통역을 모해했다고 하여 교살당한다. 다른 관련인원들도 모두 청나라감옥에 갇힌다. 이 사건은 정명수와 잉어얼다이는 심복관계라는 것이고, 이러한 사건으로 갈라질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명수는 잉어얼다이의 사인(私人)이다. 숭덕 7년 10월, 잉어얼다이는 조선의 한윤과 통혼한다. 조선은 많은 예물을 보내어 잉어얼다이의 혼사를 축하한다. 정명수는 잉어얼다이의 사사로운 일을 처리하는것을 도와주었는데, 바로 정홍기의 속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잉어얼다이와 도르곤의 영속관계도 분명하다. 도르곤은 일찌기 '호부는 잉어얼다이게 맡기면 믿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같은 기의 사람을 쓰는 것은 청나라초기 정권의 본질이다. 이로써 추단할 때, 정명수는 도르곤의 속인이다. 그러므로 순치5년, 잉어얼다이가 죽은 후에는 도르곤과 정명수의 관계가 더욱 가까워진다.

 

순치7년, '구왕(즉 도르곤)이 상처를 하여, 국왕과 사돈을 맺고 싶어한다'는 일로 인하여, 2월부터 정명수는 호부상서 바하나, 내원 기충격등과 조선으로 들어간다. 계속 각종 명목으로 조선의 군신에게 압력을 가하여, 조선의 효종도 혼인을 시키면서 조선이 김상헌, 조형, 김집등을 기용한 죄를 묻지 않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효종의 딸은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으므로, 종실 금림군 이개윤의 열여섯째 딸을 의순공주에 봉하여 조선대군이 친히 호송하여, 4월에 조선을 출발하여, 북경으로 간다. 2개월간의 협상기간중에 정명수는 '황부섭정왕께서 우리를 보내어 왔다' '우리는 하루빨리 황부섭정왕께 북경으로 돌아가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국사라기보다는 사사(私事)였다. 직접 도르곤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므로, 정명수가 이 사건에서 담당한 역할은 다섯째 사신이라는 지위보다는 훨씬 컸다.

 

셋째, 정명수와 도르곤의 밀접한 관계는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 요인도 된다.

 

순치7년말, 도르곤이 돌연 세상을 떠난다. 정명수는 배경을 잃는다. 다음 해(효종3년)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조선인은 이미 "정명수의 기색이 이전와 완연히 다르다. 우울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다"라고 보고한다. 순치10년이 되어서는 굴마훈이 정식으로 형부에 붙잡혀가 심문을 받는다. 조선도 적극 참여한다. 조선국왕의 답변에 의하면: "굴마훈은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가 지나면서 그의 간악하고 월권한 행위는 한두개가 아닙니다...조정에서 통촉해주십시오...본국에서도 본인의 동생 아들과 친속들에게 내린 관직은 몰수하고, 본인의 은산, 의산 두 곳의 여인들도 원적으로 돌려보내며...."라고 썼다. 청나라 형부도 그가 '조선을 마음대로 움직이며, 성지를 위배하여 임의로 위세를 부렸다'고 한다. 죽음은 겨우 면한다. 이번에 처벌당한 굴마훈은 도르곤의 심복으로 함께 연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효종은 아주 기뻐한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다시 기용되면 어떡할 것인지'를 걱정한다.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절대 다시 기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안심한다.

 

변고가 있은 후에 굴마훈은 한직으로 물러난다. 그의 조선에서의 세력은 일망타진된다. "정명수의 친당 수십명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분을 받는다. 그의 친족은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낟. 굴마훈의 일생은 귀천영욕의 차이가 아주 컸다. 극성에서 쇠퇴까지 평범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