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강도공주(江都公主) 유세군(劉細君): 미녀외교의 희생자

by 중은우시 2008. 7. 7.

글: 장계합(張繼合)

 

"화친(和親)"정책은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을 때 쓰는 방법이다. 군사적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가 없을 때 외교적으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특히 유방이 흉노에게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 후로 흉노를 두려워했다. 서한(西漢)은 폐해가 이익보다 큰 "화친"정책에 갈수록 매달렸는데, 문경(文景, 한문제와 한경제)시기에도 이 국책은 지속되었지만 효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한무제에 이르러, 서역에 사신으로 파견나갔던 장건이 돌아온 후에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조정에 서역의 일부국가와 연합하여, 함께 기세등등한 흉노에 대적하자고 제안했다; 그 중에는 서한의 장기인 '화친'이 들어 있었다. 한무제는 재삼 생각한 다음에 결국 승락했다. 그는 흉노라는 심복대환을 물리치기 위하여, 동맹을 만들고 최대한 정예군대를 양성할 시간을 벌고자 했다.

 

한무제는 화친에 보낼 사람을 물색했다. 그는 금방 유세군을 점찍었다. 이 아가씨는 서한조정에서 처음으로 보내어진 황실종친이었다.

 

유세군은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이다. 그녀의 가족은 내력이 만만찮다. 고조부가 한문제 유항이고, 증조부가 한경제 유계이다. 할아버지는 바로 한무제의 형님인 유비(劉非)이며, 부친인 유건은 강도왕에 책봉되었다. 즉, 당시 양주에 자리잡은 지방황제였다. 그러나, 유건은 반란을 도모했고, 원수2년(기원전121년)에 반란이 발각되어, 겁을 먹고 자살한다. 유세군의 생활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 것같았다. 고귀하게만 자라던 공주가 졸지에 주변에 아무도 없은 외로운 신세가 된 것이다. 황제가 할아버지이다보니, 그녀를 죽이지는 못하고, 그녀의 식구들은 강도에 계속 머무르게 해주었다. 그때 유세군의 나이 11살 때이다.

 

원봉6년(기원전105년), 한무제는 유세군을 주목한다. 그는 그녀를 아주 좋아했고, 공주로 봉하면서 오손(烏孫)의 국왕 엽교미(獵驕靡)에게 시집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함께 흉노를 견제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이 때 유세균의 나이 25살이었다.

 

<<한서. 외척전>>에는 "오손국, 대곤미치적곡성은 장안에서 8900리 떨어져 있고, 호(戶)는 십이만, 구(口)는 육십삼만이며, 병력은 18만8천8백명이다" 이런 일류강국이라면 반드시 끌어들여야 했다. 한무제는 골육을 희생하는 것은 기꺼이 했고, 재물은 더더구나 아끼지 않았다. 유세균의 혼수는 아주 풍성했다. 누가 알았으랴. 이 한나라의 공주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네가지의 고난이었으니...

 

첫째 고난: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속이 다르고, 생활이 적막했다. 오손은 매일 소고기를 먹고, 양유(羊乳)를 마신다. 간단한 텐트에서 생활한다. 유세군이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은 언어였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그저 눈뜬 봉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남편과도 함께하지 못하여 부득이 떨어져 거주했고, 함께 살았던 날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둘째 고난: 노부소처(老夫少妻). 유세군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그 '남편'이 백발이 성성한 노친네라는 것이다. 침상의 즐거움은 생각할수도 없지만, 행동이나 일어서고 앉는 것조차 힘들었다. 살아있는 관을 모시는 것과 같았으니, 무슨 재미가 있었겠는가?

 

셋째 고난: 모국을 위하여 '정적(情敵)'과 싸워야 했다: 정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적(政敵)이다. 한나라와 오손이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흉노의 선우도 아주 경계했다. 그리하여, 그도 공주 하나를 오손에 시집보낸다. 오손국은 어느 쪽의 미움을 살 수도 없었으므로 유세군을 '우부인'으로 봉하고, 흉노공주를 '좌부인'으로 봉했다. 평소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했다. 두 부인은 모두 자기 나라에서 오손국에 심어놓은 것이므로 각자 웃으면서 속마음을 굴려야 했고, 서로 자기의 '친정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다투었다.

 

넷째 고난: 물건처럼 먼저 할아버지에게 건네지고, 다시 할아버지는 친손자의 품으로 보내버린다: 노국왕은 한나라에 대한 존경의 뜻에서, 그리고 유세군을 아끼는 의미에서, 자기는 늙었고,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현지의 습속에 따라, 신임국왕이 순조롭게 자기의 부인들을 넘겨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하느니, 차라리 먼저 손을 써두려고 하였다. 노국왕은 솔직하게 유세군에게 자기의 후계자인 친손자 "군수미(軍須靡)"와 결혼하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유세군은 당연히 못하겠다고 한다. 한나라의 풍속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즉시 한무제에게 글을 올린다. 그런데, 한나라황실은 이미 그녀를 철저히 버렸다. 그녀에게 내려온 조서는 아주 노골적이다: "그 나라의 풍속을 따르도록 해라, 오손과 함께 호(흉노)를 멸하여야 한다" 여기의 의미는 아주 명백하다. 어떤 모욕도 참고 견뎌라. 너는 조정의 바둑돌 하나에 불과하다. 반항해도 소용없으니, 시키는대로 하라! 유세군은 어쩔 수 없이 '군수미'의 텐트로 들어간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어제까지는 할머니였는데, 오늘은 마누라이다. 오랑캐의 풍속이 이러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개략 2년이 지나서, 노국왕이 죽고, 그의 손자인 '군수미'가 왕위를 계승한다. '군수미'는 유세군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들의 혼인은 첫째는 정략결혼이고 둘째는 어른들이 짝지어준 것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으니, 1년후에 유세군은 딸을 하나 낳는다. 이름은 소부(少夫)라고 짓는다. 그녀는 처음으로 천륜의 기쁨을 맛본다. 그녀가 남편을 잘 모시고, 자식을 잘 길렀으므로, 오손과 한나라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었다. 이리하여 흉노를 아주 효과적으로 견제하였다. 그리고 한나라가 전쟁준비를 할 수 있는 고귀한 시간을 벌어주었따. 한무제가 골육을 버리는 수단을 썼는데, 그 길이 정확했던 것같다.

 

개략 한무제 후원2년(기원전87년)에 유세군은 산후조리를 잘 못하여 병을 얻고, 결국 44살의 나이고 죽고 만다. 나중에 흉노로 시집가서 이름을 날린 왕소군과 비교하자면, 그녀의 공헌이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역사학자들이 그녀를 언급하는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이고, 후세인들 중에서 공헌이 컸던 이 한나라공주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