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두헌(竇憲) : 북흉노를 멸망시킨 명장

by 중은우시 2008. 7. 9.

 

한나라는 흉노와 계속 싸워왔고, 그 과정에서 곽거병, 위청, 이광등 숱한 명장을 배출했다. 그런데, 북흉노를 마지막에 몰아내는 큰 공을 세운 인물인 두헌(竇憲)은 북흉노전의 승리이후의 행적으로 인하여 후세게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두헌의 계락산 북흉노를 물리치기 위한 전쟁은 한화제 영원원년(89년) 6월에 시작하여, 영원3년(91년) 2월에 끝난다. 한나라의 최고사령관인 두헌은 남흉노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3단계작전을 통하여 북흉노에 철저한 승리를 거둔다.

 

두헌이 북흉노를 공격한 원인

 

한장제는 장화2년(88년) 2월에 병으로 사망한다. 태자인 유조(劉肇)가 즉위하니 한화제이다. 이때 한화제는 겨우 10살이었으므로, 그의 모친인 두황태후(竇皇太后)가 정권을 장악했다. 두태후는 총명하고 능력이 있었다. 동한정권은 한화제에 이르러 이미 어느 정도 쇠퇴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두태후를 중심으로 한 동한정치집단은 여전히 광무중흥이후의 위세를 지니고 있었고, 한무제시기의 강성한 국면을 회복시키려는 웅심이 있었다.

 

이때, 일부 유리한 외부적 요인이 형성된다. 그리하여 흉노를 정복할 수 있는 호기가 형성된다. 그중의 하나는 반초가 서역지역에서 이미 줄줄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둘은 북흉노통치집단에 내분이 발생하여 선우의 지위를 놓고 투쟁이 벌어졌다. 내부가 사분오열되었다. 남흉노의 돈도하선우는 북흉노의 내부에서 난이 일어난 것을 보고, 거기다 해마다 흉년이 들자, 이 기회에 북선우를 멸망시키고 흉노의 전지역을 통일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글을 올려 한나라에 함께 출병하자고 한다. 돈도하선우는 동시에 남흉노군의 정예병사를 이끌고 나가겠다고 한다. 좌곡여왕과 우오현일축왕이 기병 1만을 이끌고 삭방에서 출발하며, 좌현왕안국과 우대차거왕 교륵소가 기병 1만을 이끌고 거연새를 출발하며, 돈도하는 스스로 기병 1만을 이끌고 오원, 삭방새에 주둔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천자로 하여금 집금오 경병, 도요장군 등홍 및 서하, 운중, 오원, 삭방, 상군의 여러 태수로 하여금 동시에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도록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북지, 안정태수는 병력을 이끌고 요새를 지켜, 불측의 사태를 방비해달라고 했다. 돈도하는 한나라 조정에 각 장병이 9월에 하상에서 만나면 좋겠다고 한다.

 

동한왕조는 남흉노 돈도하선우의 글을 받아보고는 두태후는 선우의 글을 경병에게 보게 한다. 경병은 보고나서 진언하기를 "과거에 한무제가 천하를 통일했고, 흉노를 복속하고자 하였으나,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선제 시기에 호한사선우가 항복해와서 변경이 안정되고, 전국이 통일되고, 백성들이 60여년간 편안히 살았다. 왕망이 찬탈한 후, 선우의 칭호를 바구어 동란을 일으키니 선우는 다시 한나라에 배반했다. 오환, 선비가 한나라에 귀순한 후, 위엄이 사방의 오랑캐에게 떨치고 있다. 현재는 하늘이 준 기회이다. 북흉노 내부투쟁이 있고, 남흉노가 나서서 출동하겠다고 하니, 북방오랑캐를 정벌할 수 있을 때이고 이이제이할 수 있는 때이다. 국가에 이로우니 응락하시는 것이 좋겠다" 경병은 그리고 그 자신도 국가를 위하여 나서겠다고 말한다.

 

두태후는 경병의 말에 찬동한다. 그러나 상서 송의는 경병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는 "오랑캐는 반복무상하여 역량이 강하면 약자를 침략한다. 한나라이후, 국가는 여러차례 흉노를 정벌하였는데, 대량의 인력물자만 썼다. 그러나, 선비가 귀순한 이후에는 흉노만여명을 참하고 포로로 잡았는데, 오랑캐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너 한나라는 어부지리를 보았다. 병사하나 쓰지 않았다. 남흉노의 계책을 듣는다면 그가 북흉노를 병합하게 하는 것인데, 선비가 그들에게 압박을 받을 것이다. 선비는 밖으로는 흉노를 침공할 수 없고, 안으로는 한나라에 공을 청할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한나라의 국경을 침범해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태후는 양쪽 의견을 살펴본 후에 경병의 의견을 채택한다. 북흉노를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동시에 송의의 의견도 일부 받아들여, 남북흉노를 합쳐서 하나의 나라로 만들지는 못하게 한다. 나누어 통치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다. 동한의 삼공구경은 두태후가 이미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을 알고, 일치하여 태후에게 진언하여, 이번 전쟁을 저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두태후는 모두 막아내고, 두헌을 차기장군으로 하여 한나라-남흉노 연합군을 통솔해서 출정하게 한다.

 

동한, 남흉노 - 북흉노의 작전서열

 

동한군

 총사령관   차기장군    두헌

 부사령관   집금오       경병

 장군         도료장군    등홍

                부교위       염반

                사마          경기

                사마          경담

                중호군       반고

                군사마       오신

                군사마       양풍

                사마          임상

                사마          조박

 

남흉노군

  총사령관 둔도하선우

  장수       좌곡여왕     사자

               우호연일축왕 수자

               좌현왕        안국

               우대차거왕  교륵소

 

한/남흉노 연합군 총병력: 4.8만

 

북흉노군

   총사령관 북흉노선우

   장수       온독수왕

                일축왕

                온오부거왕

                우온우제왕

 

북흉노 총병력 : 미상

 

동한의 작전계획

 

한나라의 제2차흉노정벌전투는 부대의 편성부터 작전목표까지, 모두 상세한 계획과 준비에 따랐다. 한나라군은 북군오교의 군(보병, 장수, 사성, 둔기, 월기)을 보내고, 여양영, 옹영의 군을 출동하고, 연변12개군의 정예기병(운중, 정양, 안문, 대군, 삭방, 오원, 상군, 서하, 안정, 북지, 어양, 상곡군)을 이동시키고, 변경군현의 선비, 오환등 오랑캐기병을 선발하였으며, 여기에 남흉노의 정예기병을 가담시켰다. 동한은 이들 기병으로 3로의 대군을 편성하여, 각각 북흉노를 향하여 진격하게 한다. 그리고 탁사산(알타이산 동맥 및 지금의 몽고 고비 알타이산서부지역)에서 만나 일거에 북흉노군을 섬멸하기로 한다.

 

두헌의 북흉노전투경과

 

제1단계작전

 

한화제 영원원년(89년) 6월, 한나라군의 총사령관 차기장군 두헌은 3로의 대군을 이끌고 출발한다. 두헌과 집금오 경병은 각각 정예기병 4천씩을 이끌고, 남흉노 좌곡여왕 사자의 1만기병과 만난다. 합계 1.8만명의 기병이 삭방군의 계녹새(지금의 내몽고 항면후기)에서 북진한다; 남흉노의 선우 둔도하는 흉노 1만여기병을 이끌고 만이곡(내몽고 고양현)을 출방한다; 도료장군 등홍 및 변방의 의용오랑캐군 8천기병은 남퓽노 좌현왕 안국이 이끄는 1만기병을 만나 조양색(지금의 내몽고 빠오터우지역)을 출발한다. 3로의 대군은 탁사산으로 진군한다. 주력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두헌은 먼저 부교위 염반, 사마 경기, 경담으로 하여금 좌곡여왕 사자와 우호연황등 1만정예기병을 선봉으로 삼는다. 한나라군대가 계락산(지금의 몽고 길이연찰십령서북)에 이르렀을 때, 북선우가 이끄는 주력군과 격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북흉노군을 대파한다. 북흉노군은 궤멸되어 흩어진다. 북선우도 도망친다. 한나라군은 맹렬히 주격하여 사거비제해(몽고 방찰간호)에 이르러 흉노각왕이하 1.3만명을 추살한다. ?고 말, 소, 양등 백만마리를 빼앗는다. 온도수, 일축, 온오, 부거왕유제등 81부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전후로 20여만명에 이른다. 두헌, 경병등은 연연산(몽고 항애산)에 올라, 중호군 반고에게 돌에 비명을 새기게 명한다. 한나라군대의 위덕과 공덕을 기리게 하는 것이다. 두헌은 군사마 오신, 양풍을 보내어 금과 비단을 가지고 북선우에게 항복하도록 유도한다. 그 후에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간다. 오신, 양풍은 선우를 추격하는 도중에, 다시 1만여명의 항복을 받아낸다. 서해(몽골 두이격호)에 이르러 선우를 만난다. 오신등은 북선우에게 한나라의 위덕을 알리고, 선우에게 금과 비단등의 선물을 건낸다. 북선우는 항복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호한사선우를 본받아 한나라의 번속이 되어, 국가와 백성을 보호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신은 무리를 이끌고 동으로 되돌아간다.

 

제2단계 작전

 

북흉노선우의 동생이 한나라에 입시(入侍)한 후, 한나라는 북선우가 직접 한나라로 오지 않은 것이 진정으로 항복한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된다. 두헌은 그리하여 제2차 북흉노정벌을 계획한다. 한화제 영원2년(90년) 5월, 두헌은 부교위 염반으로 하여금 2천기병을 ㅇ끌고 이오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북흉노군을 공격하게 한다. 곧이어 흉노군을 격파하고 이오로지구를 점령한다. 차사전후왕은 모두 아들을 데리고 입시한다. 

 

영원2년 7월, 두헌은 군을 이끌고 양주에 주둔한다. 그리고 시중 등첩을 정서장군으로 하여 자기의 부사령관으로 삼는다. 두헌은 농서, 한양, 무도, 금성, 안정, 북지, 무위, 장액, 돈황, 주천등 군의 병마를 통할한다.

 

북선우는 한나라가 그의 동생인 우온우제왕을 돌려보낸 것을 보고는 한나라가 책망하는 것이라고 알아차린다. 그리하여 친히 입조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사자를 보내어 통보한다. 두헌은 반고, 양풍을 보내어 영접하게 한다. 이때, 남흉노는 다시 그을 올려 병사를 일으켜 북흉노를 치게 해달라고 한다. 이어서 좌곡여왕 사자등으로 하여금 좌우양부의 8천기병을 이끌고 계녹새(내몽고 항면후기)로 출병한다. 남흉노군이 출병한 후, 순조롭게 탁사산에 도착한다. 물자를 남겨놓고 경무장을 하고 북흉노의 거소를 습격한다. 좌부병은 북에서 서해(내몽고 두이격호와 합랍호이북)를 넘고, 하운(몽고 오포소낙이성옥륵길 부근)으로 진격한다; 우부병은 흉노 하수(내몽고 배달리격하) 서쪽에서, 천산(몽고 항애산 동맥)을 돌아, 감미하(몽고 찰포한하)를 남으로 넘는다. 두 군이 회합한 후, 야간을 틈타 북선우의 본부를 포위한다. 북선우는 대경실색하여, 정예병 천여명을 이끌고 남흉노군과 격전을 벌인다. 북선우는 부상을 입고 낙마하고, 황망한 중에 말을 타고 도망친다. 겨우 경기병 수십명을 데리고 도망하게 된다. 남흉노군은 북흉노의 옥새를 빼앗고, 알지등 아녀자 5명을 포로로 잡으며, 8천명을 참수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는다. 이때 남흉노는 이미 상당히 강성해서, 인구 3.4만호, 총 24만명을 보유하고 병력이 5만에 이르렀다.

 

제3단계작전

 

영원3년(91년) 대장군 두헌은 북흉노가 남흉노의 타격을 받은 후 이미 극도로 쇠약해진 것을 알고는 철저하게 북흉노를 격멸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2월, 좌교위 경기, 사마 임상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거연새를 나가게 한다. 북선우부를 금미산(지금의 알타이산 신강 알타이부근)에서 포위하여 북흉노군을 대파한다. 그리고 북선우의 모친을 포로로 잡고, 왕이하 5천여명을 참한다. 북선우는 도망쳐서, 행방불명이 된다. 경기등은 군을 이끌고 5천여리를 갔다가 되돌아 온 것이다. 이는 한나라때 흉노에 출병한 이래로 가장 멀리 갔던 경우이다. 조정은 경기의 공적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를 속읍후에 봉한다.

 

북선우의 동생인 우곡여왕 우제건, 골도후 이하 여러명은 포류해(지금의 신강 파리신호)지역에 주둔하고, 사자를 보낸다. 대장군 두헌을 상소를 올려 우제건을 북선우로 봉하도록 청한다. 조정이 응락하여, 영원4년(92년) 경기를 사신으로 보내어 북흉노에게 북흉노 인장을 내린다. 그리고 남흉노와 동등하게 대우한다. 이로써 두태후는 북흉노를 정벌하고, 남북흉노를 나누어 통치하려는 전략목적을 완수하게 된다.

 

평석

 

동한의 흉노정벌전쟁은 한명제, 한화제의 양대에 걸친 분전을 통해 마침내 한화제 영원3년(91년) 북흉노를 철저히 격파한다. 그리고 그후 2년만에 북흉노는 멸망한다. 이로써 한나라때 북부의 우환은 잠시 없어진다. 중국북방지구는 동한에 의하여 통일된 것이다. 동한왕조의 이 장거는 중국역사상 길이 기록될 일이다.

 

동한의 흉노전쟁승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첫째, 동한국력의 강성. 경제실력의 강약은 자고이래로 전쟁승부를 가름하는 중요요소이다. 동한왕조는 한무제 유수가 즉위한 이래로, 한명제 영평16년(71년) 두고의 제1차 흉노정벌이전까지, 4,50년간의 발전과 휴식기간이 있었다. 서한말년의 쇠퇴한 기미가 일소되었다. 그리고 부국강병의 흥성기로 접어든다. 이것은 전쟁준비에 필오한 인적물적조건이 갖추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물질적인 기초는 이루어진다.

 

둘째, 동한 정략(政略)과 전략(戰略)의 정확성. 동한때 두고부터 두헌에 이르기까지 두 차례의 흉노정벌전쟁은 모두 강호, 선비, 오환, 남흉노와 한나라군이 연합부대를 결성했다. 이것은 정확한 전략선택이었다. 한나라군은 명백한 전략적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나라의 선진적인 군대운용와 작전방안 그리고 우수한 무기를 활용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북방오랑캐족의 강인하고 용맹함을 곁들일 수 있었다. 흉노기병은 자연히 동한군대의 적수가 못되었다. 이는 동한군이 흉노를 이기는데 가장 적합한 전략방안이었다. 그러나, 역대사학자들은 동한이 흉노에 이긴 것을 '이이제이'의 결과라고보는데, 이는 봉건적 정통사상의 관념에서 나온 껍대기만 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흉노통치집단의 사분오열. 국력이 날로 쇠락하면서 강대한 동한 중앙정권과 맞설 수가 없게 된다. 한편으로 흉노가 남북흉노로 나뉘어진 후에, 남흉노는 한나라에 귀속되고, 한족과 혼거한다. 계속하여 한족의 선진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정치가 안정되고, 국력이 신장하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한다. 북흉노제부에게는 아주 큰 흡인력을 지녔다. 북흉노의 일부 부락은 계속 이탈하여 남흉노에 붙었다. 다른 측면으로, 북흉노는 계속하여 선우의 지위를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통치집단내부에 서로시기하고 죽이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대외작전에서 통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북흉노는 연이어 메뚜기떼등 자연재해를 입었다. 북흉노는 전쟁잠재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북흉노의 국력은 날로 쇠약해졌고, 동한의 타격하에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동한의 흉노정권에 대한 승리는 전쟁에 뛰어난 장군들에 의지했다. 예를 들어, 두고, 두헌, 경병, 경기, 임상등은 모두 장수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두헌, 경병은 한나라군을 통솔하여 북흉노를 치는 제2차전투의 제1단계전투에서 실제로 이미 북흉노를 기본적으로 평정했고, 흉노의 각왕이하 1.3만명을 죽이고, 백만의 가축을 빼앗았다. 흉노의 81부 합게 20만이 항복했다. 북흉노의 철저한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제2단계전투에서 두헌은 다시 남흉노군으로 하여금 북흉노를 일거에 섬멸하게 한다. 제3단계작전에서 전기를 놓치지 않고 정예기병을 파견하여, 북선우의 잔여세력을 금미산에서 섬멸한다. 두헌등은 한화제 영원원년 6월부터 영원3년 2월까지의 19개월간에 연속 3번이나 북흉노에 진격하여, 북방의 여러군대를 통솔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중국의 길고긴 봉건사회에서 걸출한 장수는 '전공이 너무 커서 주군을 억누르는" 액운을 피해갈 수가 없다. 두헌은 마침내 제후권력의 투쟁과정에서 자결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경병은 비록 두당과 함께 죽지는 않았으나, 그도 두당의 일원으로 하여 봉지를 취소당한다.

 

사학자 범엽은 두헌의 공을 위청, 곽거병과 비교하면서, 두헌은 그저 오랑캐의 잡군을 이끌고 흉노를 일거에 평정하였으니, 그의 공을 따지자면 위청, 곽거병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공적이 칭송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살하도록 핍박받게 된 것에 대하여도 불만을 표시했고, 동방삭의 말을 인용했다: "쓰면 호랑이며, 안쓰면 쥐새끼이다"  이것은 장상의 재목도 중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객관적으로는 봉건사회의 인재기용의 폐단을 지적하는 것이다.

 

두헌의 북흉노멸망의 의의

 

두헌이 북흉노를 몰아냈는데, 그 자신도 그것이 역사상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세계역사상 가장 중요한 민족대이동을 일으켰다.북흉노가 떠난 후 북방초원은 권력의 진공상태가 된다. 오래지 않아 동호의 선비족이 그 빈틈을 타고 들어와서, 초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선비족의 압력하에, 남흉노등 호족은 속속 한나라의 국경내로 진입한다. 이는 이후 '오호의 난'의 원인(遠因)이 된다. 북흉노의 이동은 일련의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서방세계의 천지가 뒤집어진다. 결국 로마제국이 와해되는데 이른다. 두헌은 전설상의 나비와 같이 날개짓 한번으로, 무의식중에 머나먼 나라에 광풍폭우를 불러온 것이다. 이 폭우는 삼백년후의 유럽을 뒤덮어버렸다.

 

두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두헌은 역사상 갖가지 나쁜 흔적을 남겼다. 고금의 문인들이 보기에 그는 동한외척발호의 원흉이다. 그리하여 그는 폄하되었다. 그러다보니, 그가 세운 역사의 공적마저도 묻히게 되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두헌의 일생을 살펴보면 일부 행위는 개탄할 점이 있지만, 그는 동한왕조와 전체 중국역사발전에 분명히 공헌이 크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우수한 장수이다. 그는 한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북흉노를 계락산과 금미산에서 대파하고 연연산에 올랐고, 돌에 그 공적을 세겼으며, 북흉노선우를 쫓아냈고, 북흉노가 서족으로 이주하도록 만들었다. 그의 명성은 대막남북에 떨쳤고, 그는 중국의 북방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다. 동한, 광무, 명제, 장제 삼대의 숙원이 그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다음으로, 군사적 각도에서 보자면, 두헌은 동한의 제2차북흉노정벌에서 한나라의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전투를 계락산전투 및 금미산전투등을 조직하여 수행하였다. 두헌의 용병술은 적군의 약점을 잘 공격하는 것이었고, 적시에 적군의 동향을 잘 파악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전략방침을 채택했다.

 

역사서에서는 흉노와 싸운 사실을 얘기할 때면, 위청과 곽거병은 언급하지만, 두헌은 언급하지 않았다. 두헌은 공을 세우고도 패가망신하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두헌이 나중에 저지른 잘못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바람에 두헌이 세운 공적마저도 말살해버렸다.

 

위청, 곽거병은 매년 전쟁을 치르면서도 선우를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을 유지하며 죽었기 때문에 후세에 좋은 장수로 기억된다. 두헌은 병사를 이끌고 수천리 사막을 넘어서 흉노를 평정했다. 그는 동한왕조에 큰 공을 세웠으나, 그 공을 앞세워 교만했으며, 나쁜 일을 많이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 결국 패가망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