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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성제(漢成帝)와 조비연(趙飛燕)

by 중은우시 2007. 12. 6.

글: 채동번(蔡東藩)

 

혼군인 한성제는 사방에 놀거리를 찾아다녔는데, 우연히 양아공주(陽阿公主)의 집을 들르게 되었다. 공주는 바로 가녀(歌女) 수명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게 해서 흥을 돋구었다. 그중의 한 여인이 목소리도 곱고, 춤추는 자태도 가벼워보였다. 그리하여 한성제의 두 눈은 그녀의 몸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회궁한 후에 공주에게 그 가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공주도 자연스럽게 응락했다. 그리고는 그 가녀를 예쁘게 화장시킨 후, 궁으로 보냈다.

 

이 가녀가 바로 고금에 유명한 조비연인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비연의 원래 성씨는 풍(馮)이라고 한다. 모친은 강도왕(江都王)의 손녀인 고소군주(姑蘇郡主)라고 한다. 고소군주는 일찌기 중위(中尉) 벼슬을 지낸 조만(趙曼)에게 시집을 갔는데, 몰래 종인 풍만금(馮萬金)과 사통을 해서 두 딸을 낳았다. 분만때 거두어기르기는 힘들어 교외에 버렸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 죽지 않아서, 다시 데려와서 키웠고, 어른이 되었다. 장녀는 조의주(趙宜主)라고 했으며, 차녀는 조합덕(趙合德)이라고 했다. 조만이 병으로 죽은 후, 두 딸은 모두 풍씨집으로 보내어졌다. 다시 여러해가 흘렀고, 풍만금도 죽었다. 풍씨잡안도 몰락하여 두 딸은 의지할 곳이 없어, 장안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다가 양아공주의 집에서 가무를 배웠던 것이다. 조의주는 몸매가 날씬하고, 자태가 하늘거려서 조비연(趙飛燕)이라고 불렀다.

 

조합덕은 피부가 매끄럽고 역시 절세미녀였다. 조비연이 입궁한 이후에도, 조합덕은 여전히 양아공주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후궁에 궁녀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번예(樊)라고 하였다. 그녀는 조비연과 사촌자매간이었다. 한성제도 그녀를 다른 여인과는 달리 대했고, 번예도 한성제에게 은근히 접근했다. 그녀는 한성제에게 조비연의 여동생인 조합덕이 얼마나 예쁜지를 얘기했고, 한성제는 사람을 시켜 조합덕도 입궁하도록 하였다. 이후, 한성제는 조비연의 자매와 꿈같은 나날을 보내게 된다.

 

조씨 자매는 차례로 한성제를 모셨고, 한성제도 다른 후궁들은 머리에 두지도 않았다. 정궁황후인 허황후(許皇后)도 냉대를 받게 되어, 마음 속으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집안언니와 협의해서 조씨자매를 저주하게 된다. 조비연은 마침 황후자리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즉시 고발해서, 궁정에서 저주를 했다는 죄명을 허황후에게 뒤집어 씌웠고, 다른 후궁들도 연루시켰다. 한성제는 이미 매우 화가난 상태이고, 왕태후(王太后)까지 엄히 처리할 것을 주장하자, 바로 허황후의 언니에게는 죽음을 내리고, 허황후의 인수(印綏)를 회수하고, 소대냉궁(昭臺冷宮)에 들여보냈다. 반첩여(班)는 총명하여, 장신궁으로 옮겨가서 날을 보내면서 시와 부를 지으면서 사는 바람에 평안할 수 있었다.

 

허황후가 폐위된 후, 한성제는 조비연을 황후에 책봉하고자 한다. 그러나, 왕태후는 조비연이 천한 출신인 것을 꺼려해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성제는 말잘하는 위위(衛尉) 순우장(淳于長)을 왕태후에게 보내어 설득시켜서 황태후는 겨우 응락한다. 이 기회에 연호도 바꾸어 영시(永始)로 하면서 한성제는 조비연의 의부(義父)인 조림(趙臨)을 성양후(成陽侯)에 봉하고, 조비연을 황후에 책봉했다.

 

모든 사람이 축하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간대부 유보(劉輔)가 상소를 올려 반대했다. 결국 유보는 감옥에 갇혔다. 만일 대장군 신경기(辛慶忌), 우장군 염포(廉褒), 광록훈(光祿勳) 사단(師丹)과 대중대부(大中大夫) 곡영(谷永)이 연명으로 담보하지 않았다면, 그의 목은 일찌감치 칼아래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성제는 태액지(太液池)에 큰 배를 하나 건조하도록 했고, 조비연을 데리고 가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놀았다. 그리고 시랑인 풍무방(馮无方)으로 하여금 생(笙)을 불어 반주를 하게 했다. 배가 중앙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었고, 조비연의 치마가 날리면서 하마터면 배 바깥으로 날아갈 뻔하였다. 한성제는 황급히 풍무방에게 조비연을 구하라고 소리쳤다. 풍무방은 생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조비연의 두 발을 잡았다. 조비연은 원래 풍무방을 좋아했었으므로, 그가 발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바람을 맞으면서 춤을 추었다. 후세인들이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런 연고로 인한 것이다.

 

조비연은 원래 음탕하여, 여러 애매한 사건들이 많았다. 한성제는 눈이 먼 것처럼 그녀가 마음대로 하게 놔두었다. 조비연은 조금씩 조금씩 더 욕심을 부렸다. 시랑(侍郞)인 경안세(慶安世)가 젊고 잘 생긴 것을 보고는 기회를 잡아 유혹했고, 여러가지 부도덕적인 일들을 저질렀다. 나중에 한성제는 조합덕을 더 좋아하게 되면서 점차 조비연을 멀리하게 된다. 조합덕은 언니인 조비연의 더러운 행위를 잘 알고 있었고, 한성제가 언니인 조비연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언니인 조비연을 위하여 좋은 말을 많이 한성제에게 해주었다. 조비연은 그 사실을 알고는 여동생에게 감격했고, 따로 튼튼하고 힘센 궁노(宮奴) 연적봉(燕赤鳳)을 조합덕에게 선물했다. 두 자매는 궁노들과도 어울려 즐겼다. 나중에 한성제는 조씨자매가 자식을 전혀 낳아주지못하자 다른 궁녀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고, 남자아이를 낳아서 황위를 잇게 하고자 했다.

 

광록대부 유향(劉向)은 정직한 사람이었고, 자주 한성제에게 이전의 일을 전철로 삼으라고 권했다. 여색에 빠져서 국가대사를 망쳐서는 안된다고 권했지만, 한성제는 여전히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전혀 유향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한성제는 비록 음란했지만,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서도 자식이 없자, 약간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조씨자매는 질투심이 강해서, 한성제가 다른 궁녀와 어울리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성제는 암도진창의 수법으로 궁비(宮婢) 조효(曹曉)의 딸인 조궁(曹宮)과의 사이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모자 2명과 이들을 모시던 궁녀들은 모두 조합덕에게 죽임을 당한다. 나중에 허미인(許美人)도 역시 사내아이를 낳는데, 마찬가지로 조씨자매에게 죽임을 당한다. 한성제 조차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 경성에는 동요가 하나 유행하였는데, "연비래, 탁황손(燕飛來, 啄皇孫, 제비가 날아와서 황손을 쫀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바로 조씨자매가 황제의 후손을 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중에 한성제는 조합덕의 침상위에서 급사한다. 당시 조합덕은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가. 여러번 불러도 대답이 없자, 손으로 눌러봤는데도 숨을 전혀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놀라서 급히 내시에게 어의를 불러오도록 명하였고, 어의가 도착하자 이미 한성제는 죽어있었다.

 

태후와 황후 조비연도 급히 도착해서 대성통곡을 했다. 승상인 장광(張光)과 왕망(王莽)에게 후사를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하룻밤이 지난 후, 태후는 다시 조서를 내려서, 왕망과 장광으로 하여금 황제의 기거와 급사원인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왕망은 명령을 받은 후, 엄히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조합덕은 한성제를 독사시킨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자기가 저질렀던 여러가지 일들을 떠올리고 더 이상 숨기기 힘들다는 생각에 죽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결한다.

 

한성제는 26년간 황위에 있으면서, 연호를 7번 바꾸었고, 죽을 때 나이 45세였다.

 

조비연은 나중에 황태후가 되었다가, 왕망이 정권을 차지한지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계속 신분이 하락하여, 최종적으로는 서인(庶人)이 되었다. 조비연도 어쩔 수 없이 자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