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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 올림픽

올림픽개막식: 장예모의 편협한 문화관

by 중은우시 2008. 8. 13.

글: 해새장(解璽璋)

 

4시간을 기다려 올림픽 개막식을 보았는데, 의외도 없었고, 놀라움도 없었다. 여러 친구들이 예측했던 것처럼, 우리가 본 것은 여전히 장예모가 영화에서 보여주거나, '모모인상'에서 장난질했던 그대로였다. 사람은 정말 완고하다. 유명인은 더욱 그러하다. 일단 자신의 사고방식이 정해지면, 잘못되더라도 절대 바꾸지 않는다.

 

전체 개막식 장면은 거대했고, 소리와 빛이 난무하고, 모든 것을 다 보여주어, 분위기는 충분히 돋구었다. 2천여명의 거부진(巨缶陣), 공자의 삼천제자의 낭송 쇼, 그리고 2천여명의 태극권 공연, 이건 모두 인해전, 술이다. 한번 딱보니 장예모의 솜씨였다. 우리는 <<영웅>>, <<십면매복(연인)>>, <<만성진대황금갑(황후화)">>에서 일찌감치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인원과 물자를 동원했음에도, 효과는 한 여자아이가 여린 목소리로 부른 "오성홍기가 바람을 맞아 펄럭인다"는 것만 못했다. 그 여자아이의 목소리는 전체 개막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다. 그 병마용을 닮은 부(缶)를 치는 사람들과 머리에 세 가닥의 깃털을 꽂은 공자제자는 사실 아주 우스웠다. 보는데 무슨 코미디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 개막식에는 소위 중국요소와 문화부호, 예를 들어 한자, 수묵(水墨), 문방사보, 고금(古琴), 경극, 목우(木偶), 태극, 팔괘, 비천무용등등. 맞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선명하게 중국전통문화를 보여주는 요소와 부호이다. 중국전통문화의 독특함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다만, 사실상 이것들은 표면적이고, 부호화된 것이다. 전면적이고 진실되게 중국문화의 박대정심과 원원유장을 나타내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그것은 당대문인들이 본 중국문화이다. 혹은 당대 서방인들, 특히 일부 서방의 한학자들이 본 중국문화이다. 아주 강렬한 문화소비와 문화엽기의 맛이 들어있다.

 

여기에서 중국전통문화가 부호화된 과정을 보면,  실제로 당해 일부 중국문화인들과 서방한학자들의 공모로 중국전통문화가 재구성되는 과정이다. 이런 문화는 모종의 권력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중국인 개개긴의 현실생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일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단지 일부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정서적인 필요를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장예모는 계속하여 강조해왔다. 올림픽 개막식은 13억중국인에게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50억지구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 말의 숨은 의미는 바로 이것은 지구인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이 보고자 하는 것과 네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다르다. 각 나라에서 모두 좋은 반응과 보도가 나왔지만, 그것은 네가 표현한 것이 그들이 너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과 맞아떨어졌을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현재 전통을 재건하는 험난한 임무를 지고 있다. 다만 이 임무는 문화적인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삼천공자제자가 "위편(葦編)"을 높이 들고 공자의 어록을 낭송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삼인행에 필유아사라(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이 앞에 "군자는 당당하고, 소인은 겁을 낸다"는 문구도 있었는데, 중앙지도자들이 검토하는 과정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뺐다고 한다. 이처럼 간단한 이치나 도리를 거기에 기괴한 복장까지 덧붙여 수천명이 소리친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비웃을 거리만 마련해줄 뿐이다. 그리고 경극을 보여주었는데, 관중은 그저 몇몇 인형(木偶)만을 보았을 뿐이다. 중국은 천여년간 지속되고, 심지어 수천년된 희극문화가 있는데, 아무런 생기도 없는 몇몇 인형으로 대체해버렸다. 장예모는 재주가 정말 너무 뛰어나서 지나친다. 다만, 여기에서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의 눈에는 '문화'만 보였겠지만, 사람들은 그 막후를 본다. 사람이 없는 것이다. 장예모의 문화관에서 이것이 가장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빠졌으므로, 그가 보여주는 문화는 그저 정태적인 것이지,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옥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장예모는 전통문화를 겉옷 정도로 생각해서, 벗어서는 인형에다가 입혀놓았다.

 

전통과 현대는 모순된다. 그러나, 알아야 한 것은 현대가 바로 전통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당대의 중국을 보자면, 그 특수성은 하나의 전통이 아니라 두 개의 전통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오천년 중화문화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백여년동안 서방에서 흘러들어온 새로운 전통이다. 신중국에 있어서, 오천년문화전통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러나 백여년의 신전통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은 아니다. 그들간에는 모순되고 충돌되고 서로 얽혀 있다. 이렇게 하여 중국역사 100여년의 기본면모를 갖추어 왔다. 유감스러운 점은, 백년올림픽의 첫번째로 보여준다는 것에서 <<조국을 노래한다>>는 노래를 제외하면 거의 공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장예모의 중국문화에 대한 인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문화관은 비교적 편협하다. 그는 중국문화중 음유(陰柔)한 것에 치중되어 있고, 다른 부분은 간과했다. 특히 양성(陽性)문화의 부분을 빠트렸다. 만일 중국문화가 정말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떻게 세계민족의 숲에서 오천년간이나 서 있을 수 있었겠는가? 올림픽이후에 장예모가 시간을 내서 문을 걸어닫고 생각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