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진공박(陳公博) : 공산당과 국민당에서 모두 제명당한 유일한 사람

중은우시 2008. 1. 10. 17:42

글: 유계흥(劉繼興)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전당대회("1대")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일대의 대표이자, 광저우당지부 책임자인 진공박은 회의상에서 기고만장했고, 스스로가 맞다고 생각하고, 조직은 무시했다. 회의기간동안, 프랑스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자, 안전의 측면에서 가흥(嘉興)의 남호(南湖)로 가서 유람선상에서 회의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진공박은 가지 않고, 부인을 데리고 항주로 가서 산수를 즐기며 놀았다. 그가 상해로 되돌아왔을 때는 회의가 일찌감치 끝나버렸다.

 

이후, 중공중앙은 장태뢰(張太雷)를 광동으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즉시 상해로 가서 당조직에 해명을 하도록 요구했다. 진공박은 잘라서 거절했을 뿐아니라, 진독수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후는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당의 구속을 받지 않겠다"고 적었다. 오래지 않아 다시 광저우의 당조직회의상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다시는 당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당을 떠나서 별도로 광동공산당을 조직하겠다"고까지 얘기했다. 진공박이 당을 분열시키려는 언행을 보이자, 중공중앙은 1923년 봄에 그의 당적을 박탈했다.

 

바로 이해의 11월에, 진공박은 미국으로 가서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석사학위과정에 들어가 공부한다. 이때 왕정위(汪精衛)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다. 1925년 4월 귀국후, 요중개(廖仲慨)가 친히 소개하여 국민당에 가입하며, 국민당중앙당부 서기장(書記長)을 맡는다.

 

진공박은 먼저 왕정위의 뒤를 따랐고, 나중에는 장개석과 크게 싸웠다. 장개석과 왕정위의 갈등이 아주 첨예하였는데, 진공박은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무한을 선택하고, 왕정위의 품에 안겼다.

 

무한에 있는 기간동안, 진공박은 왕정위를 지지하여 반장개석, 장개석토벌을 외쳤고, 동시에 공개적으로 반공을 주장했다. 이후 영한(寧漢, 남경과 무한)의 분열과 합류의 과정을 거쳐 장개석이 재기하고, 군대를 보내어 진공박을 체포하려 했다. 깜짝 놀란 그는 홍콩으로 도망쳐 버린다.

 

진공박은 권토중래한다. 1928년 겨울 다시 "월방위원(方委員)"인 고맹여(顧孟餘), 왕법근(王法勤)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개조동지회"를 결성하고 자신이 책임자가 된다. 공개적으로 국민당개조의 기치를 내걸고, 장개석에 대항한다. 장개석은 분노했고, 1929년 개최된 국민당 제3차전당대회에서 결정을 내려, 당의 기강을 위반한 진공박의 당적을 영원히 제적했다.

 

대일항전이 개시된이후, 진공박은 월남의 하노이로 가서 왕정위와 만난다. 그리고 주불해(周佛海), 도희성(陶希聖)등과 함께 일본수상 근위문의 성명에 호응하는 매국 <<염전(艶電)>>을 발표한다. 일본의 지지하에, 왕정위는 공개적으로 친일정부를 조직하고, 부인 진벽군을 보내어 홍콩의 진공박으로 하여금 다시 나와서 관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진공박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상해로 온다. 그리고는 왕정위에게 "당신은 불구덩이를 뛰어넘는 정신으로 건곤을 뒤집고자 하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한다. 나는 그저 당신을 위하여 약간의 근심을 덜어드리려고 할 뿐이다"라고 한다.

 

1941년 3월 30일, 남경에 정식으로 소위 "국민정부"가 건립된다. 왕정위는 스스로 주석 겸 행정원장을 맡고, 진공박은 입법원장,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훈련부장을 맡는다. 이는 왕정위의 바로 다음가는 지위였다. 진공박의 친일행위로 민족의 패류가 되었으며, 전국인민의 성토하에 국민당중앙은 제5기8중전회에서 다시 진공박을 출당시키는 결정을 한다.

 

친일매국한 왕정위도 좋은 결말을 보지는 못했다. 1943년말, 등의 총알을 빼내기 위하여 여러번 수술을 하여야 했다. 다음 해초에 일본에서 치료받던 왕정위는 흉추골의 변형으로 골막염이 터저셔 모습이 시신처럼 말라버렸다. 11월 10일 오후, 왕정위는 일본 나고야시의 한 차가운 지하실에서 죽어갔다. 그의 생전의 조치에 따라 진공박이 국민정부주석, 행정원장의 직을 승계하고, 왕정위의 후계자가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5년간 존속했던 남경국민정부도 말일을 맞이하였다. 10일후, 진공박, 이려장(李勵庄) 부부 및 행정원비서장 주륭상(周隆庠), 실업부장 진군혜(陳君慧), 안휘성장 임백생(林柏生), 군사위원회 총감 하병현(何炳賢), 여비서 막국강(莫國康, 진공박의 정부)등 7명은 일본으로 도망친다.

 

8월 28일, 국민당은 사람을 보내어 진공박의 집을 수색하는데, 이미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육군총사령관인 하응흠(何應欽)은 즉시 일본의 주중국파견군에 비망록을 건네서, 일본이 진공박의 행방을 밝히고 언제든지 송환시킬 준비를 하라고 요구한다. 일본측은 어쩔 수 없었고, 중국측의 의견을 진공박에게 전해주게 된다. 진공박은 스스로의 죄과가 중하다는 것을 알고 이번 위기는 넘기기 힘들겠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하응흠에게 전보를 보낸다. 자신이 도망친 것은 장개석이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귀국하여 조치를 받겠다고 한다. 일본에 38일간 숨어있던 진공박은 10월 3일 중국으로 압송된다.

 

다음 해 4월 5일, 강소성고등법원은 진공박을 사형에 처한다. 1946년 6월 3일, 55세이던 진공박에게 총살형이 집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