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지금 무신론이 지배하는 시대인데, 중국인이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신앙이 있다면 아마도 관우일 것이다. 이 1800년전의 패군지장은 아마도 유감이 많았을텐데, 사람들에 의하여 역대왕조의 여러 영웅호걸들중에서 단연 발탁되어, 거의 완벽한 품격과 무한한 신통력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유불도(儒佛道)의 삼교와 인귀신(人鬼神)의 삼계에서 모두 지고무상한 신령으로 모셔지게 되며, 중국인의 마음 속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그 무엇이 되었다. 수십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에 퍼져있는 관제묘는 수만개가 넘어서, 공자를 모시는 문묘의 숫자를 훨씬 초과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명말청초때, <<삼국연의>>는 이미 만주인들의 정치와 군사교과서 역할을 했다. 무성제 관우의 역할은 청나라때 최고조에 달한다.
심양고궁은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기 전의 총본부이다. 그 남문의 옆에는 일찌기 관제묘가 지어져 있었다. 이는 일찌감치 만주족들에게 관우는 아주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명말청초에 이르기까지 관우는 여전히 외적에 항거하는 민족영웅의 신분이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왜 적수의 무성(武聖)인 관우를 자기가 숭배하는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사실상, 이 점이 중요하다. 만주족은 일찌감치 명나라와 전투를 하면서도 한화(漢化)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사서오경을 포함한 한문화의 경전들이 만주어로 번역되어, 황실과 귀족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그 중 가장 인기있던 것이 <<삼국연의>>이다. 누르하치와 청태종은 빈번한 전투의 와중에도 삼국연의를 읽었다. 이는 단지 삼국연의의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귀감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아주 실용적인 정치와 군사의 교과서역할을 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청태종이 몽고와 연합하여, 몽고와 손을 잡고 한족의 통치에 대항하려 할 때, 그는 아주 단순하게 만주족의 청나라를 유비에 비유하고, 몽고를 관우에 비유했다. 그리하여 몽고에는 관우묘를 많이 세웠다. 몽고족은 원래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므로, 관우를 언급하는 것은 현실정치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외에, 관우는 청나라가 추진하던 유가의 윤리도덕의 국책에도 부합했다. 그리하여 더욱 중시되었던 것이다.
청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후, 민간사회의 관우에 대한 이미지에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고,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바로 재신관공(財神關公)이다. 청나라 중엽, 관우는 여러 업종의 보호신 내지는 조사야(祖師爺)로 모셔진다. 두부업은 전설에 따르면 관우가 젊을 때 두부판매를 하였다는 이유로 하여 그를 조사로 모시고, 철장인은 관우가 역시 일찌기 철장인으로 일한 적이 있다고 하여 조사로 모시며, 향초나 등으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관우가 촛불을 켜고 밤새워 춘추를 읽었다는데서 조사로 모시며, 그 외에 이발, 도살, 칼/가위점포등에서도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칼(刀)인데, 관우의 병기가 바로 청룡언월도이기 때문에 조사로 모셨다.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유일하게 같은 점이라면 그들은 관우가 그들에게 재물과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이 관우는 빈한하고 장사를 한 경력도 없다. 나중에 군에 들어가서 전장터에서 싸웠을 뿐이므로 상업과는 인연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하여 이렇게 재신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관우의 고향사람들인 산서(山西) 사람들에서 얘기를 시작해야 할 것같다. 청나라때 산서상인(山西商人, 晋商)은 가장 부유한 상인집단이었다. 진상은 먼저 고향의 영웅인 관우를 고향을 떠나 외지로 갈 때의 보호신으로 삼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산서회관(山西會館) 혹은 산섬회관(山陝會館)은 진상들이 사업을 논의하는 곳인데, 그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건물의 하나가 바로 관묘(關廟)였다. 관우는 사업을 평안하게 보호해달라는 바람을 비는 외에 정신적인 응집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상인들은 강호를 유람하는데, 서로 도우는 것이 필요했고, 곤란에 함께 맞서야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원결의를 본떠서 이성결의형제를 맺는 것을 즐겼다. 여기에서 관우의 충성과 의리는 그들이 주창하는 미덕과 부합�다. 상인들이 관우를 모신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의를 지키는 직업도덕이다. 일찌기 건륭제때 상인들이 공동으로 제정한 업계규정이 보존된 비석의 비문에 따르면, 고객을 속인 행위는 처벌이 가장 엄중했다. 그런데, 처벌방식이 아주 재미있다. 그것은 바로 벌희(罰戱)이다. 즉 사기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인정된 상인은 돈을 내서 극단을 불러서 연출해야 하는 것이다. 관묘의 건너편이 바로 희대(戱臺)이다. 이런 처벌은 상인들이 고객들의 환심을 사는데 아주 뛰어난 방식이었다. 공연으로 고객을 끌어모으고 회관은 사람들이 번성한 시장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진상의 족적은 전국에 퍼져있고, 가는 곳마다 적으로 하나의 회관, 하나의 관제묘, 하나의 희대가 있다. 이처럼 의리를 지키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상업이념이 전파되었다. 그들이 상업상의 성공을 이루자, 각지의 상인들은 모두 관우가 영험이 있는 재신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시정의 각종 업계에서 모두 관우를 보호신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관우는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모두 존경을 받았는데, 불교와 도교에서도 그의 지위는 매우 높다. 그러면서도 유가에서 전파하려는 인의예지신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청나라중엽이후, 역대황제의 관우에 대한 숭앙은 최고조에 달한다. 건륭33년 관우는 "충의신무영우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關聖大帝)"라는 10글자로 된 봉호를 받는다. 이후 100여년동안 역대황제들이 계속 봉호를 추가하였는데, 광서5년에 마지막 봉호추가가 시행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봉호는 아주 번잡하면서도 긴 28글자가 된다: "충의신무영우인용현위호국보민정성수정익찬선덕관성대제(忠義神武靈佑仁勇顯威護國保民精誠綏靖翊贊宣德關聖大帝)"
청나라말기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명부에 기록된 관제묘만 수만개에 이르러, 문묘이 숫자를 훨씬 뛰어넘었다. 보통백성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공자보다 강했던 것이다. 일씨간에 '관공묘가 천하에 펼쳐 있어, 오주의 어느 곳하나 향을 올리지 않는 곳이 없다'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농민들이 기우제를 지낼 때나, 상인들이 재운이 형통하기를 빌 때나, 장인들이 장사가 흥성하기를 빌 때나, 관리들이 관운이 트이기를 빌 때나, 군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빌 거나, 제왕들이 강산을 영원히 통치하기를 빌 때나 모두 관우를 찾았다. 관우는 이로 인하여 아주 신성하고 지극한 위치에 오른 신으로 숭상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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