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낙붕(樂朋)
중국에는 두 명의 성인(聖人)이 있다. 문성(文聖)인 공자와 무성(武聖)인 관우이다. 일반 백성의 눈에 문성인 공자는 너무나 높아서 쳐다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무성인 관우에 대하여는 아주 친숙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아마도 소설 <<삼국연의>>의 공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모두 좋아하며 보급된 정도로 따지면 공자보다도 뛰어나다.
사실, 관우는 생전과 사후에 서로 다른 여정을 겪었다. 생전은 하나의 비극이었고, 사후에는 계속되는 소동으로 점철되었다. 비극과 소동이 한 몸에 모였다는 것이 관우의 불행이다. 아마도 중국인의 불행이기도 할 것이다.
관우의 생전의 비극은 그의 의형 유비에 대한 우매할 정도의 충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의 교만하고 자만하는 약점에서 비롯된다. 일개서생이며 젖비린내나는 어린아이인 육손에게 속아서, 형주를 잃고, 부자가 포로로 잡히고, 목이 잘리게 되며, 그의 머리와 몸은 하나는 당양(當陽)에, 하나는 낙양(洛陽)에 묻히게 된다. 촉의 장군으로서 관우는 실제 실패자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이미지는 처음에는 음삼한 원귀였다. 왜냐하면 그가 적에게 참혹하게 죽었으므로, 원한과 노기가 많았던 원귀였다.
그러나, 관우의 사후 300년이 지난 수나라때가 되어서, 불교 천태종의 개산조사(開山祖師)인 지자(智者)대사는 독특한 법안(法眼)을 지녀서 관우를 발탁한다. 그래서 관우는 일개 원귀에서 일약 불문의 수호신으로 승격된다. 당나라 중기에 들어 관우는 조정의 묘당에 들어서서 중국의 첫번째 무성인 강상(姜尙, 강태공)이 들어있는 무성묘에 들어가서, 황실의 제사밥을 얻어먹게 된다. 이 때의 그는, 공자가 쓴 유가경전 <<춘추>>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처리되었고, 손에는 자주 <<춘추>>를 든 채 나타났으며 문무를 겸비한 관우의 새로운 이미지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엄연한 황실의 정통과 우아한 유장(儒將)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송이 개국하면서 황제 조광윤은 자기 스스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황실의 정통을 무시하고 관우를 강태공의 무성묘(武聖廟)에서 쫓아내 버렸다.
1104년 송휘종인 조길이 관우를 다시 숭녕진군(崇寧眞君)에 책봉한 이후, 관우는 급속히 인기를 얻었으며 신단(神壇)에 자리를 잡았다. 송휘종은 앞뒤로 세번을 추봉하여 마지막에 내린 봉호는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이었다. 이 때는 금나라의 병사가 쳐내려오고, 북송의 수도인 변량이 위급하게 된 때였다. 휘종이 관우에게 작위를 더해서 봉한 것은 관우의 "의용"을 빌어 송나라의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주원장때 다시 강등되었던 관우는 무종 정덕연간에 다시 묘사에 진입하며,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 진수부(陳秀夫)와 함께 모셔진다. 만력제때는 다시 여러번 작위를 받아, 관우는 제(帝)로 승격된다. 명나라 말이 되어서는 아예 관우가 강태공을 대체하여 중국의 제2대 무성인(武聖人)이 된다. 그리하여 문성인 공자와 함께 유가의 윤리문화를 대표하고 인의예지신의 미덕의 완벽한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생전에는 한수정후(漢壽亭侯)였던 관우는 죽은 후에 왕(王)에서 제(帝)로 승격되었다. 그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권력자의 성인이었다. 황제와 관료들이 모셔서 유명해진 것이었다. 권력자들은 관우에 대하여 계속하여 신화를 만들어내었는데 그를 정치적 문화적 도구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와 달랐던 점은, 관우는 민간의 기초가 매우 견고하였다는 점이다. "관공묘는 천하에 퍼져 있어, 오대주 어느 곳이든 향불을 사르지 않는 곳이 없다" 라는 것이 관우가 신격화된 이후의 사회현실이었다. 청나라 중엽이후, 관우는 여러 업종의 조사(祖師) 내지 보호신이 되었다. 관우가 젊었을 때 두부를 판매한 적이 있으므로, 두부업의 조사가 되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로는 관우가 일찌기 철을 두드리는 업을 하였다는 것이므로, 철장인의 조사가 되었다. 등과 초를 만드는 장인들은 관우가 등을 들고 <<춘추>>를 읽는 모습에 착안하였다. 관우가 들고 있는 것이 청룡언월도이므로, 이발, 도살, 칼로 자르는 업종의 조사가 되었다. 일부 민간의 방회에서는 줄줄이 관우를 신주로 모셨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집에는 관우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그를 재신야(財神爺)로 모시고 절하는 것이다. 관우가 죽은 후, 민중의 생활과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고 정감을 의탁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삼국연의>>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 원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송, 명 이후의 통치자들이 계속 진행한 신격화운동에도 영향을 받았다. 만일 권력자들이 신격화하면서 관우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배불리고 스스로 이익을 얻으려 하였다면, 일반백성들은 그를 신격화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이것은 일반백성들이 어찌할 수 없는 점과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도 표현한다. 실제로 관우가 살았을 때 자기의 머리조차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은 이후에 어떻게 백성의 평안을 보우할 수 있고, 여러가지 업종을 흥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그저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위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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