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삼국시기의 촉(蜀)은 유비가 일으킨 것이다. 유비가 촉을 세우는 기반이 된 것은 "유비,관우.장비의 결의형제"에 조운등 핵심집단과 여기에 '인의'를 내세워 천하에서 모셔온 제갈량, 방통, 법정등의 일류인재들이었다 촉국의 건립은 유비가 조조로부터 한중(漢中)을 빼앗은 것이 이정표가 된다. 유비는 일생동안 조조와 무수히 싸웠는데, 이 전투에서 조조에게 크게 승리를 거둠에 따라 조조의 수중에서 한중과 상용(上庸)등의 땅을 빼앗아 왔다. 이 당시의 유비세력의 강대함은 이미 북방최강으로 일컬어지던 조조의 힘에 못지 않았다. 유비의 역량은 조조와 공개적으로 대적할만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이다. 동오의 손권의 실력은 조조보다 못했으므로, 이 당시가 유비세력의 최전성기였다.
유비는 이때 형주(荊州)의 5개군(郡) (형주는 모두 9개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개군은 유비가 동오에 반환했고, 1개군은 조인(曹仁)이 차지하고 있었다)과 사천의 전부, 그리고 한중과 상용, 운남귀주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하에는 관장조마황의 오호장군에 맹장 위연 및 이엄, 이회, 마충, 부동, 황권, 왕평 등등 인재가 수두룩했다.
그런데, 이후 유비와 제갈량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용병전략을 취한다. 형주의 5개군을 지키고 있던 관우로 하여금 북방의 조조를 공격하게 하면서, 촉국군대의 어느 한 부대도 이에 호응하거나, 협조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미 형주를 10여년간 지켜왔던 관우 노장군(연령은 이미 58세임)은 조조부대의 우금, 조인, 서황등과 3개월여간 격전을 벌인다. 비록 우금을 격파했지만, 양양성에서 조인의 저지를 받아 피로한 병사로 도저히 성을 함락시킬 수 없게 된다. 나중에 조인을 지원온 서황의 원군과 교전하나, 패배하고 만다.
결국, 관우는 후방의 형주5개군은 동오의 여몽(呂蒙)의 습격에 빼앗기고, 관우의 부대는 위의 군대와 동오의 군대의 협공을 받아 궤멸되고 만다. 관우와 의자(義子)등의 장병은 모두 전사한다.
관우가 출병하여 북벌에 나선 때로부터 패전하여 사망할 때까지 시간은 4개월이나 걸렸다. 관우 노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힘겹게 싸우고, 생사의 결전을 벌일 때, 촉에서 지원군을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 유비와 제갈량의 그 유명한 "융중대"에서 정한 방책대로라면, 당연히 촉의 주력부대는 한중에서 북방 혹은 동방으로 조조의 군을 공격하고, 형주에서 북상한 촉군은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비와 제갈량은 관우의 부대로만 북벌을 시도하게 하고, 촉의 다른 군대는 전혀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능력있는 장수를 보내어 관우가 지키던 형주5군을 대신 지켜주지도 않았다.
유비는 이미 한중과 상용을 취했으므로, 얼마든지 실력있는 장수를 지원하여 관우를 도울 수 있었을테고, 유비의 당시 여러 장군들(예를 들어, 장비, 조운, 마초등)중에서 누구를 파견해도 되었을 것이다.
관우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군대를 이끌고 멀리 원정을 갔으며, 후방에 능력있는 장수를 남겨두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위와 동오의 협공하에 스스로를 지킬 수 없게 된 것도 당연하다. 관우는 명령을 충실히 집행하여, 죽을 때까지 싸웠고, 희생을 당했다.
<<삼국지>>든 <<삼국연의>>든 관우의 이 기괴한 고군북상(孤軍北上)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이나 해석을 내놓지 않고 있다. 모두 그저 유비와 제갈량이 안배한 것이라고만 적고 있다. 그렇다면, 유비와 제갈량이 이렇게 안배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왜 이같이 크게 전략을 변경하고, 모험적인 전투를 시작했을까? 가장 기괴한 것은 유비가 황제에 등극한 후, 동오를 반드시 토벌하여, 관우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이 때는 이미 관우가 죽은지 3년이 지난 뒤였다는 것이다. 그 3년여동안 도대체 유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왜 반드시 황제에 등극하고나서야 오나라를 칠 수 있었을까?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하러 떠날 때, 유비의 고급참모 법정은 이미 죽었고, 황충도 안된다. 출전전에 장비도 없어졌다. 그런데도 조운, 위연, 마초등의 명장은 모두 참여시키지 않았고, 제갈량도 성도에 남겨두며, 이름없고 능력없는 자들만 데리고 떠났다.
관우장군으로 하여금 고군을 이끌고 북벌하게 하면서 아무런 지원군도 보내지 않아 죽게 하였으면서, 왜 3년후에 다시 갑자기 생각이 나서, 별볼일 없는 부대를 이끌고 동오를 치러 간 것일까?
이러한 점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혹시 관우가 죽자 체면상 복수는 해야겠고, 이 기회에 옛 유장의 부하로 항복해온 장수들을 다 죽여버린 것은 아닌가? 아니면 유비가 제갈량에게 속은 것인가? 아니면 관우가 말을 듣지 않아 혼내주려고 하다가 일이 커지고 도저히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인가?
관우의 기괴한 출병에서 죽음은 촉국의 가장 큰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 > 역사인물 (관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관우의 초기 민간에서의 이미지 (0) | 2010.07.19 |
---|---|
관우 "괄골요상(刮骨療傷)"의 진상 (0) | 2008.12.12 |
관우의 형주 7년을 논함 (0) | 2008.08.05 |
관우가 청나라때 우상으로 모셔지게 된 경위 (0) | 2007.12.10 |
관우(關羽)에서 관제(關帝)까지 (0) | 2007.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