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속마음

중은우시 2008. 3. 25. 12:28

글: 손옥량(孫玉良)

 

제갈량이 남양(南陽)의 와룡강(臥龍崗)에 은거하면서, 농사를 짓고,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한가하게 살았는데, 마치 자신의 이상이 진정한 '은사(隱士)'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제갈량이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은사'였던 것이다. 나중에 유비가 삼고초려를 하면서 그를 불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제갈량이 원했던 바였다. 경극중 <<공성계(空城計)>>의 가사를 보면, 제갈량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 있다: "나는 본래 와룡강에서 한가하게 지내던 사람이다. 음양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천하를 보존할 수 있다. 선제께서 남양으로 세번이나 오셔서 청하여, 촉한의 정족삼분의 사업을 일구어냈다. 관직은 무향후에 이르고, 대원수인을 장악했으며, 동서로 싸우고, 남북으로 정벌하였으며 고금에 통달하였다. 주문왕이 강상(강태공)을 찾아가서 주왕실을 크게 일으켰는데, 나 제갈량이 어찌 선배인 선생에 비할 수 있겠는가" 곽말약은 성도의 두보초당에 대련을 하나 썼는데, "지현출사표, 호위양보음(志見出師表, 好爲梁父吟)"라고 하였다.

 

제갈량이 남양 와룡강에서 한 몇 가지 일들은 그의 이상이 '은사'가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첫째, 그는 스스로 관중(管仲), 낙의(樂毅)에 비유했다. 제갈량은 와룡강에 친구들이 많았다. 서서(徐庶), 박릉(博陵) 최주평(崔州平), 영천(潁川) 석광원(石廣元), 여남(汝南) 맹공위(孟公威)가 그들이다. 그들의 재능을 평가하면서, 제갈량은 "그대들의 관직은 자사, 군수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제갈량의 뜻은 어떠냐고 물으니, 공명은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고, 자주 스스로를 관중, 낙의에 비유했다. 관중이 누구인가? 춘추일패인 제환공을 만든 인물이다. 낙의가 누구인가? 연나라를 위하여 제나라의 70여개성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장, 성장 정도에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국무총리, 국방장관에 비유한 것이다. 제갈량이 너무 자부심이 강한 것은 아닌가? 어쨌든 제갈량의 비유에서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은사'가 되려한 것이 아니라, 재상이나 국방장관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는 유비를 보좌함으로써 그 꿈을 이루게 된다.

 

둘째, 제갈량은 "양보음(梁父吟)"을 잘했다. 매일 별다른 일이 없으면 노래를 읖조렸고, 시간을 보냈다. 어떤 노래를 즐겨 불렀는지는 의미가 크다. 모두 알다시피, 제갈량은 음악가이다. 나중에 사마의를 상대할 때, 성에서 노래를 하나 하면서 사마의를 놀라 도망치게 한 적이 있다. 이로써 볼 때 그의 음악수준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은 악기를 잘 다루었을 뿐아니라, 노래도 잘했다. 가장 잘 불렀던 곡이 "양보음"이다. 가사는 이렇다: "제나라 성문을 나서서, 멀리 그늘속을 바라보니, 그 속에 묘가 세 개 있는데, 쌓여있는 것이 비슷하다. 누구의 묘냐고 물어보니, 전강 고야자라고 한다. 힘으로는 남산을 밀어낼 수 있고, 땅을 막을 수도 있는데, 하루는 참언때문에 두 복숭아로 세 선비를 죽였네. 누가 이 계책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재상 제안자라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유명한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제나라의 상국인 안영(晏)이다. 안영은 역사상 유명한 현명한 재상이다. 일찌기 그의 지혜로 나라를 어려움에서 여러번 구해냈다. 그는 사람됨이 정직했고, 직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제나라왕의 신임을 깊이 받고 있었으며, 권력이 조야에 대단했다. 안자는 또한 청렴한 관리여서, 집안의 음식에서 고기가 나오지 않았고, 처첩은 비단옷을 입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칭찬에는 인색한 공자도 그에 대하여는 칭찬하는 말을 여러번 했다. 이 사람이 바로 제갈량의 우상이었다. 안영은 정치가이고,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계책을 생각해냈고, 두개의 복숭아를 이용하여 국가안전에 위협을 주는 세 명의 장사를 죽여버린다. 이는 정치의 잔혹성을 말해준다. 나중에 제갈량도 안영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세명의 인물의 목을 벤다: 마속(馬謖), 그가 가장 신임하던 인물이었다; 진식(陳式), 전해지는 바로는 <<삼국지>>의 작자인 진수(陳壽)의 부친이라고 한다; 위연(魏延), 관장조마황과 나란히 이름을 떨친 명장이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양보음'을 흥얼거릴 때, 그가 나중에 하는 일에 대한 복선이 되었다.

 

셋째, 일찌감치 하산하여 중용되기 위하여, 강태공의 낚시술을 배웠다. 제갈량이 하루빨리 하산하기 위하여, 먼저 스승인 사마휘(司馬徽), 명사인 방덕공(龐德公)으로 하여금 그를 '와룡(臥龍)'으로 부르게 하고, 대대적으로 '와룡과 봉추중 하나를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하여 유비가 걸려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일부러 몸을 빼면서 세번이나 찾아오게 만든다. 사실 그 동안에 준비할 것은 다 해놓았다. 그리하여, 바로 유비의 약점과 부족한 곳을 찔러서 신임과 중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소위 "융중대"라는 것은 그의 정치, 군사, 경제, 지리 및 각지역패주의 인재배분현황까지 충분히 조사하고 오랫동안 생각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유비는 마치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걷히고 해가 보이는 듯하였다, 관우,장비에게 물만난 물고기같다(如魚得水)고 한 것이 이해가 된다. 제갈량이 '은사'로 이름을 날린 것은 결국 관직을 얻는 하나의 수단이었고, 하루빨리 관료의 길에 들어서기 위하여, 강태공이 낚시하던 수법을 다시 쓴 것이다. 그는 스승과 동료들의 도움하에 교묘하게 일막의 극을 성공시켜서 유비를 속여넘길 수 있었다. 이 연극으로 인하여 제갈량은 진정한 의미에서 유비의 강태공이 되었다.

 

넷째, 제갈량은 널리 권력가와 귀족들을 사귀었다. 제갈량은 융중에 있었지만, 한가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그는 스승을 찾아가서 학문을 익히는 외에, 조정의 권력가와 귀족들과도 관계를 돈독히 했다. 그는 황승언의 추한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당금 조정의 태위(太尉)인 장온(張溫)이 처외할아버지가 되었고, 형주자사인 유표(劉表)는 그의 처이모부가 되었고, 형주대장군 채모(蔡瑁)는 처외삼촌이 되었다. 제갈량의 큰누나는 괴기(琪)에게 시집가고, 둘째누나는 방씨집안의 방산민(龐山民)에게 시집갔다. 괴가와 방가는 형주의 명문거족이었다. 이리하여 제갈량은 형주의 거족 두 집안과 인척이 된다. 이외에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은 오나라 손권의 수하로 있었고, 그의 동문들은 천하에 분포되어 관리를 지내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중앙부터 지방까지, 곳곳에 제갈량의 친인척이 분포되게 된다. 그는 융중의 작은 마을에 있었지만, 장래 하산하기 위한 기초는 충실히 다져 놓았었던 것이다. 제갈량의 이러한 행위는 절대 '은사'가 할 일은 아니다. 모두 장래 하산하여 창업할 사람이 할 일인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갈량은 '은사'가 되려는 마음은 없었다. '은사'라는 명성은 그저 장래 좋은 군주를 만나 중용되기 위한 받침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