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조아휘(趙亞輝)
송반(松潘)의 옛이름은 송주(松州)이다. 역사는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원전316년, 진(秦)이 촉(蜀)을 멸한 후, 지금의 송반에 전저현을 두었다. 당나라 정관12년(638년)에 토번의 수령인 송찬간포는 당나라에 혼인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병사를 이끌고 송주를 공격했고, 결국은 당나라가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시집보내게 된다. 이후 당나라의 서부지역은 100여년이상 평화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명나라 홍무12년(1379년)에는 송주(松州), 반주(潘州)의 두 개 위(衛)를 설치하였다가 나중에 합쳐서 송반으로 한다. 이것이 "송반"이라는 지명의 유래이다.
1935년, 범장강(范長江) 선생은 중국의 서북지역을 돌아다니다가 고성 송반을 지날 때, 아주 비참한 글을 남기게 된다: "송반에 도착한 첫째날 맨처음 목격한 가슴아픈 인상은 도처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성안�의 큰길에는 도처에 죽은 시신이 있었다"
그는 이어서: "장족들은 원래 양식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한인들이 수백, 수천씩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구해주려고 하지 않고 있으니, 이로써 민족관계가 중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장족들의 한족에 대한 적대감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우리의 민족정책의 실패를 통철하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송반에 이틀을 머물렀는데, 우리가 본 송반은 완전히 죽음의 도시였다."
시간은 70년이 흘렀다. 이번에 내가 다시 중국의 서북지방을 가게 되었다. 송반고성에 도착했을 때, 첫번째 인상은 번영과 상화(祥和)였다. 고성의 큰길에 들어서자 각종 사람들이 여유있게 걸어다녔고, 각종 물품들이 없는게 없었다.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는 한(漢), 장(藏), 회(回), 강(羌)의 네 민족은 서로 어울려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 천년고성에서 며칠을 보냈다. 여기서 깊이 느낀 점은 이 고성이 아주 특이하다는 점이다. 중국의 고성은 적지 않게 다녀봤지만, "대당송주(大唐松州)"처럼 괴이한 고성은 본 적이 없다.
특이한 점을 말하자면 모두 일곱가지이다.
첫째, 서문(西門)이 산꼭대기에 있고, 바닥보다 5백미터나 높다.
사람들의 인상속에 거의 모든 성벽과 성문은 높낮이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 수평면상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송주고성은 이에 완전히 어긋난다. 네개의 주요한 성문중 하나인 서문(옛명칭은 威遠門)은 고성의 서쪽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고, 수직으로 계산하면 500미터 높이에 있다. 이는 중국에 현존하는 고성들 중에서 유일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송주에 처음 건축한 성벽은 서쪽은 산자락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민강(泯江)에 걸쳐 있다. 고성의 좌측에 있는 서산에는 아무런 방어공사를 해놓지 않다보니, 적병이 서쪽의 산으로 들어오면, 성내의 방어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격하기는 쉽고 방어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명영종 정통연간에 송반의 방어를 담당하던 첨어사인 구침은 성벽을 동남양쪽에서 산꼭대기까지 쌓아서 서문을 증축했다. 이로써, 서문이 산꼭대기에 있고, 높이가 500미터나 되는괴이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둘째, 성벽이 산줄기를 타고 세웠으며, 그 모양이 지붕과 같다.
현재, 중국에 있는 산자락을 연해서 쌓은 성벽은 주로 방어목적인 변방의 성벽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만리장성이다. 다만, 하나의 성을 방어하기 위한 필요에서 도시의 성벽구조를 바꾸어, 산줄기를 타고 성벽을 쌓은 경우는 아주 드물다.
송주고성의 내성은 사각형이 아니라 오각형이다. 마치 집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서문에서 동문까지, 서문에서 남문까지의 두 성벽은 산줄기를 따라 쌓았고, 길이도 거의 비슷하다. 마치 삼각형의 두 변과 같다. 멀리서 보면, 두 변은 고성 서문까지 높다랗게 구름끝을 떠받치고 있어, 마치 집의 지붕과도 같고, 사람들에게 높이 솟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문화대혁명때, 이 성벽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현재는 그저 옛날의 웅장했던 모습을 추단해볼 수 있는 정도만 남아있다. 전부 원상복구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호성하(護城河)가 없고, 천성하(穿城河)가 있을 뿐이다.
옛날에 거의 모든 성의 성벽 사방에는 호성하(성둘레를 파서 물을 넣어, 성을 공략하기 어렵게 하였음)를 만들었다. 목적은 성의 방어늘역을 증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송주고성은 이러한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호성하가 없고, 천성하(성을 가로지르는 강물줄기)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확실히 특이한 경우이다.
역사적으로 송주는 변방에 위치하고 있어, 상인들이 운집하는 곳이면서, 병가(兵家)에서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곳이었다. 이처럼 군사적으로 상업적으로 중요한 집산지였다. 전란이 있을 때면, 외적들이 성을 포위하여 성안에 물이 끊기는 경우가 많았다. 명나라 가경연간에 송반총병인 하경이 외성을 증축할 때, 원래 고성의 동쪽 산자락을 따라 흐르던 민강을 인공적으로 물길을 바꾸어, 물길을 "Z"형으로 파서 민강이 성을 뚫고 지나가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적들이 장기간 포위공격을 할 때도 성내에 물이 모자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고성의 취수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방식은 중국의 고성건축사상 드문 일이다.
넷째, 고성의 북문은 기괴하여 두께가 중국에서 가장 두껍다.
송주고성의 성벽은 6.2킬로미터이고, 내성은 강을 지나고 산에 연하여 구축되었다. 외성은 흙과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 성벽과 산세, 물길은 교묘히 융합되어, 아주 특색있다. 모든 성문은 돌과 벽돌로 쌓아서 만들었는데 정교하면서도 아름답고 거대하다. 돌조각도 정교하여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현존하는 고성의 북문은 역사상 "진강문(鎭羌門)"이라고 불리웠는데, 문의 너비가 6미터, 높이가 8.5미터이며, 길이는 31.5미터에 달한다. <<아패주지>>에 따르면 "송주성벽의 두께 특히 성문동(城門洞)의 깊이는 전국 명나라 성문중 최고이다. 저명한 북경고공의 성문, 남경, 서안의 명나라때 성문도 모두 이것만큼 두텁지 않다.
다섯째, 성을 쌓은 벽돌에는 이름이 있고, 찹쌀과 오동기름으로 붙였다.
벽돌에는 일련번호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송주에 가면 "상요남씨이이오(上窑藍氏貳貳伍)"와 같은 것이 송주고성의 거의 모든 벽돌에 새겨져 있다. 일련번호와 만든 사람의 이름인 것이다. 이처럼 엄격하게 품질책임을 추궁하는 제도는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기술수준이 높은 오늘날과 비교하더라도, 이같은 품질관리는 배울만한 점이 있다.
축성에 사용된 접착제도 특이하다. 오동기름(桐油)과 찹쌀, 석회를 혼합하여 만든 것이다. 이런 특수한 접착제는 천년이 지났지만 썩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강력한 접착작용하에, 많은 벽돌은 이미 나누기 힘든 하나의 구조물이 되어버렸다.
시멘트가 발명되기이전에 생활은 아주 심들었고, 현지에는 찹쌀이 나지도 않는데, 옛날의 송주사람들은 사람이 지고, 말에 싣고 하는 옛날식의 운송방법으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수십톤의 찹쌀을 운송해와서 성벽의 벽돌접착제로 썼었던 것이다.
여섯째, 성벽은 활주로와 비슷하고, 일본인들이 오인하여 포격하기도 했다.
송반과 같은 외딴 현성에도 항일전쟁때 일본비행기의 폭격을 받았다. 그런데, 폭격이유가 아주 특이하다. 왜냐하면 일본 비행기조종사들이 눈에 착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즉, 성벽을 비행장의 활주로로 본 착각한 것이다.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만일 믿기지 않는다면, 절반정도 잘려나간 부청문(阜淸門)그 양쪽 성벽에 박혀 있는 탄환의 흔적이 있는 연훈문(延薰門)을 보라.
민국24년(1935년), 국민당 중앙군의 호종남부대는 홍군을 추격하기 위하여 송반에 간이비행장을 만들었다. 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국민당은 사천, 감숙, 청해, 서강의 변방지구를 통제하기 위하여, 송반에 중앙직속 십육구특별당부를 두었고, 오칠주유소를 만들어, 8000여두의 모우(牦牛)이용하여, 평무를 거쳐 대량의 가솔린을 장랍공항으로 운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27대의 비행기를 호북무한에서 출발시켜, 평무를 거쳐 송반쪽으로 왔다. 비행기는 안개가 가득 낀 장랍공항의 상공에서 목표물을 찾다가 송주고성의 상공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송주고성의 성벽이 활주로인 것으로 착각하고, 고성에 대규모의 폭탄을 떨어뜨리게 된다.
삽시간에 포연이 자욱하고, 흙먼지가 날리며, 집이 무너졌고, 큰 불이 솟았다. 거리에는 곡성과 함성이 뒤엉켰다. 아무런 준비도 하고 있지 않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고성벽은 여러곳에 포격을 받았으며 길거리에는 시신이 널부러졌다. 성내의 대부분의 집들도 무너졌다. 고루, 종루들도 모두 한줌의 재로 바뀌었다.
사후의 통계에 의하면, 이번 폭격으로 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하고, 집 187채를 무너뜨리고, 소, 말, 당나귀등 가축 2000여마리가 죽었다.
일곱째, 네 민족이 한 거리에 살지만, 풍속은 여전히 다르다.
송주는 자고이래로 "차마호시(茶馬互市)"의 땅이다. 역사적으로 송주초원에서 마필, 모우가 많이 생산되고, 유목민들은 소양고기, 소유, 짠바등을 먹었다. 기름기많은 음식을 먹다보니 차를 마셔야 했다. 봉건왕조시대에는 매해 전쟁을 벌여, 전마(戰馬)도 필요했고 이것들은 반드시 장족지역에서 구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차와 말을 교환하는 장사가 아주 흥성했다.
변방에 자리잡고 있던 송주는 자연히 상업무역의 중심지로 되었다. 상업의식이 강했던 사람들이 이 곳으로 모여들었고, 장기간 거주했다. 송주는 점차 다민족이 잡거하는 국면을 갖추게 된 것이다.
현재, 송주고성내에 주로 거주하는 민족은 장, 강, 회, 한의 네 민족이다. 모든 거리마다, 서로 다른 풍격을 지니고 이어진 건축물을 보게 되며, 각 민족들은 자신의 민족의상을 입고 있다. 고성의 서쪽에 있는 성황묘, 관음각과 성북쪽의 청진사는 멀리서 서로 마주하고 있다. 성남쪽에는 장족불교사원과 강족의 조루가 이어서 건축되어 있다.
천백년이래로, 장, 강, 회, 한의 각 민족이 한 도시에서 생활하지만, 서로 동화되지는 않았다. 현재, 각민족은 여전히 각자의 풍속과 습관을 유지하고 있고,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존중하면서 각자 생활하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기적이라 볼 수 있다.
천년을 되돌아보면, 이 일곱가지 기이한 현상은 하나하나의 역사이며, 송주인민의 지혜를 보여주고, 고성의 품격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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