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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중국의 명소 (남부)

남경의 부자묘(夫子廟), 진회하(秦淮河)는 모조품이다.

by 중은우시 2007. 10. 17.

 진회하

 

글: 한동(韓東)

 

나는 남경에서 출생했고, 8살때 부모를 따라 하방(下放, 시골로 내려가는 것)되었다가, 다시 남경으로 돌아온 것은 15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있는 남경은 두 개이다. "전남경"과 "후남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남경은 나에게있어서는 흑백영화와 같다. 그것은 마치 "고대"같고 "구사회"같다.

 

전남경은 현대도시와 관계가 없다. 당시 우리집은 남경시중심의 신가구(新街口)에서 직선거리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방의 경치는 아주 낡았었다. 문앞에는 자갈을 깔아만든 작은 골목길이 있었고, 길가에는 연탄가게, 잡화점, 노호조(老虎, 끓인 물을 파는 가게인데 물끓이는 가마가 호랑이같다고 하여 이렇게 불렀다)와 이발소가 있었다. 그리고, 규모가 보건소 수준의 작은 의원이 있었다. 길가에는 몇 개의 똑바르지 않은 전봇대가 서 있었고, 저녁이 되면 가로등이 어두운 황혼을 애매하게 밝혔다. 한해는 잡화점이 철거되었는데, 동네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호미, 과도등을 들고 땅을 팠다. 아주 시끌벅적했고, 어른 아이 갈지 않았다. 그들은 가게가 오래되었으므로 땅속에 남겨놓은 동전이나 돈이 있을까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신가구는 번화한 시중심이었지만, 겨우 두 개의 큰 상점이 있었다. 하나는 인민상장(人民商場)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가구백화공사(新街口百貨公司)였다. 전자는 개략 3층건물이었고, 후자는 여전히 1층짜리 평방이었다. 거리에는 빨간색의 시내버스가 달리고 있었고, 가끔 파란색의 무궤도전차가 지나갔다. 전차의 머리에는 "머리꽁지"가 있어서 흔들리며 시내를 지나갔다. 이것이 아마도 남경에서 유일한 '서양식 풍경'이었을 것이다.

 

삼륜인력거는 아주 많았서, 왔다갔다 했다. 도시 남쪽의 친척들은 이 교통도구를 타고 와서 집에 한번 머물면 10일, 반달이었다. 우리집은 그래도 "신식"인 편이었다. 집은 해방이후에 지은 것이었다. 친척들의 집은 오래된 낡은 집이었고, 앞에는 조벽(照壁)이 있고, 뒤에는 천정(天井)이 있었다. 천정안에는 과연 우물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주장(周莊), 오진(烏鎭), "환남민거(南民居)"의 집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고색창연하고, 습기차고 음습하였다. 그래도 집집마다 전등은 있었다. 우리 집에도 가전제품은 전등을 제외하고는 라디오 뿐이었다. 그 옆에는 기계식 시계가 있었는데, 그것은 전기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생활은 아주 간단했다. 사계절이 똑같이 흘러갔다. 겨울에는 처마아래로 길다란 고드름이 걸리고, 여름의 찬음료는 집에서 만든 산매탕(酸梅湯)이었다. 봄가을은 지내기 좋았다. 길거리에는 각종 잡상인들이 돌아다녔다. 사탕을 팔거나, 오디를 팔거나, 연우(蓮藕)를 팔기도 했고, 꽈배기를 팔기도 했다. 그때는 공기는 맑았고, 사람들은 회색빛의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무르팍이나 엉덩이 뒤에는 기운 자국이 가지각색으로 있었다. 기술적인 수준이 낮아서, 당시의 생활은 확실히 환경친화적이었다. 심지어 가게에서 사오는 요리도 모두 연잎으로 싼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연잎을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라스틱봉지는 절대 없었다. 당시 보급된 유행품은 나일론 양말이었다.

 

나의 전남경에 대한 기억은 이정도이다. 비록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나는 전남경에 대하여 "고향"이라는 감정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너무나 오래 떨어진 때여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다시 봤을 때 격세지감을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전남경은 나의 "전생"과 같지, 절대로 고향이라는 느낌은 없다. "이곳에서 출발했으니, 이 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감정은 없고, "귀거래혜(歸去來兮)의 시흥도 없다.

 

후남경은 완전히 다른 도시이다. 전남경과 아무런 관련도 없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 곳에서 23년을 살았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번천복지의 변화를 겪었다. 남경은 남경이고, 나야 놀랄 것도 없다. 나는 그와 계속 함께 했고, 한걸음 한걸음 같이 걸어왔으니까. 그래서 후남경은 나의 "현세"이다. 그러나 고향은 아니다.

 

나의 생각으로 고향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네가 얼마나 멀리 떠나든지, 떠난 시간이 얼마나 길던지,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고, 네가 되돌아보면, 옛날의 흔적을 찾아하 조금씩 조금씩 되찾아갈 수 있고, 네가 예전에 가졌던 것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 전남경은 말할 것도 없고, 후남경에도 백년된 가게조차 없다. 백년된 가게는 말할 것도 없고, 2,30년된 오랜가게도 없다. 오래된 가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습이 전혀 다르게 바뀌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갔고, 파는 물건도 옛날과 완전히 다르다. 경도위도가 바뀌지 않은 것을 빼면, 남경은 모두 달라졌다. 절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중산릉(中山陵), 현무호(玄武湖)와 같은 명승고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관광객과 더욱 관련이 있다. 남경시민들이 생활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은 무엇인가? 부자묘, 진회하인가? 누가 알겠는가.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모조품, 즉 나중에 모방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영화촬영을 하는 세트장과 진실한 생활은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은가?

 

남경은 나무의 도시이다. 녹화로 유명하다. 남경사람들은 나무의 혜택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이것을 자주 자랑한다. 프랑스오동나무는 하늘과 해를 가릴 정도이고, 도로에 네모나게 녹화된 곳들도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준다. 이런 길을 걸으면서 해를 보내게 되므로, 어느 정도 남경사람들의 성격에 영향을 주는 것같다. 그런데, 몇년전에 "벌목시장"이 나타났다. 이 시장은 나무를 베는 게 즐거운가보다. 이 사람은 나무를 심지는 않고, 그저 높은 건물만 좋아했다. 지금의 남경은 비록 "사막"으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는 나무를 자랑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도시와 비교하여 나무도 많지도 적지도 않고, 고층건물도 많지도 적지도 않아서...그저 비기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사투리, 방언에 대하여 보자. 지금은 사투리를 점차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남경은 북경이 아니고, 상해가 아니다. 더구나 홍콩, 대만이 아니다. 심지어 광동도 아니다. 영국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아니다. 남경말은 유행이 결핍된 경향이 있다. 남경사람들은 고향말을 하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절대다수의 남경사람들은 남경말이 듣기 싫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이 스스로 듣기 싫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정말 듣기 싫은 것이다. 남경말의 "개량"과 "망각"은 아마도 여러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말을 다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니, 남경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감회가 색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남경에 변하지 않고, 다시 되찾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마도 묘지밖에는 없을 것이다. 고향은 조상과 친척을 묻는 곳이다. 예를 들어, 우리 집은 남경에 6,7개의 분묘가 있다. 그런데 도시규모가 확대되면서, 지가가 급등하고, 죽은 사람이 산사람의 땅을 차지하는 형국이 되어, 그 분묘들은 계속 이전하게 되어, 지금은 교외의 교외로 옮겨졌다. 도저히 남경이라고 할 수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후남경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 곳이다. 더 이상 사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안식할 수 있는 곳은 더구나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