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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중국의 전설

문신(門神)이 된 고대의 민간영웅

by 중은우시 2008. 4. 11.

글: 유계흥(劉繼興)

 

문신(門神, 대문에 붙여 사악한 귀신을 쫓는 힘이 있는 신)이라고 하면, 아마도 당나라의 개국공신 진경(秦瓊), 위지공(尉遲恭)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민간에서 문신으로 받들어지는 고대영웅은 모두 33명이나 된다.

 

문신의 전신은 도부(桃符)였는데, 도판(桃版)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사람들은 복숭아나무(桃木)를 오목이 정수이며, 백가지 귀신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 한나라때부터 복숭아나무를 이용하여 풍수에 쓰는 풍습이 있어왔다. 복숭아나무로 도인(桃人), 도인(桃印), 도판, 도부등을 만들어 피사(?邪, 사악함을 막는 것)에 썼다. 문신의 전설중 가장 오래된 것은 귀신잡는 신도(神?), 욱루(郁壘)형제이다. 상고시대에 신도와 욱루의 두 형제는 도삭산에 살았는데, 산에는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그늘이 우거졌다고 한다. 매일 아침, 그들은 나무 아래에서 귀신을 검열했다. 만일 어떤 악귀가 인간을 해쳤으면, 바로 묶어서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산해경>>외에도 한나라때의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사람들은 아예 두 개의 복숭아나무판에 신도, 욱루의 모습을 그려서, 문의 양쪽에 걸어두고 구귀피사(驅鬼?邪, 귀신을 쫓고 사악함을 막는 것)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사서에 기록된 최초의 문신은 고대의 용사인 성경(成慶)이었다. 반고의 <<한서.광천왕전>>에 따르면, 광천왕의 전각문에는 짧은 상의, 큰 바지에 긴 칼을 든 고대의 용사 성경의 화상을 그려서 피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당나라에 이르러, 문신의 위치는 진경과 위지공이 대체하게 된다.

 

진경은 진숙보(秦叔寶)라고도 하는데, 산동 역성사람이다. 사람들이 새전제(賽專諸, 전제는 고대의 자객), 사맹상(似孟嘗), 신권태보(神拳太保), 쌍간대장(雙?大將)등의 별명을 지녔다. 그는 간을 들고 산동성의 6부를 쳤으며, 황하양안을 말발굽아래 두었었다. 위지공은 위지경덕(尉遲敬德)이라고도 하는데, 무예가 뛰어나서, 하루 낮에 3 성을 점령하고, 하룻밤에 8개의 채(寨)를 빼앗았다. 공을 쌓아 악국공(鄂國公)에 봉해진다. 진경과 위지공은 당태종 이세민을 도와 당나라를 건립한 개국공신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민간에서 문신으로 되었을까?

 

<<삼교원류수신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태종 이세민은 와강채를 무너뜨리고, 두건덕을 쳐부셨으며, 두복위를 진압하는 등 무수하게 사람을 죽였다. 등극후에 몸이 아주 좋지 않아서,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악몽을 꾸었고, 자주 요마와 귀신이 침전의 안팎에서 기왓장과 벽돌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궁중이 편안할 날이 없었고 ,이세민은 두려워했다. 여러 신하에게 이야기를 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요마나 귀신을 본 사람이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 혼자서만이 이를 보고 밤낮으로 두려워 한 것이다. 한 달여후 당태종은 악귀들의 괴롭힘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여러 신하들을 불러놓고 상의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진경과 위지공 두 사람이 밤새도록 갑옷과 무기를 하고 궁문의 양쪽을 지키도록 하자고 건의하였다. 밤이 되자, 과연 당태종 이세민은 아무 일없이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태종과 조정의 문무관리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태종 이세민은 진경과 위지공이 밤에 너무 고생한다고 생각하여, 궁중의 화가에게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서 눈을 부릅뜨고 손에는 채찍과 간을 들도 있는 모습으로 하여 궁문의 양쪽에 붙이게 했다. 이후 사악한 귀신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후세에 전해져서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이게 된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을 그려서 문에 붙이는 것은 가장 널리 퍼지고, 영향력도 가장 크고,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좋아하는 문신이 된다.

 

또 하나 전문적으로 대문이 아닌 후문에 붙이는 문신이 있다. 후문의 문신은 1사람이다. 왜 그런가 하면, 대문은 보통 문짝이 2개이지만, 후문은 문짝이 1개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붙이는가? 가장 많은 경우는 종규(鍾?)와 위징(魏徵)이다. 종규는 귀신을 전문적으로 잡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위징이 문신이 된 것에 대하여도 기록이 남아 있다. 서유기에 따르면 당나라 승상 위징이 경하용왕을 참한 이후, 용왕은 스스로 억울하다고 생각하여 당태종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난리쳤다. 대문에는 진경, 위지공이 지키고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후문으로 가서 벽돌과 기와를 깨트리며 소란을 부렸다. 그리하여 위징은 용왕을 죽였던 보검을 들고 후문을 지키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용왕의 원혼도 점차 쇠락하여갔다. 위징은 문관이므로 검을 높이 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곁에 세워두고 있는 모습이다.

 

신도, 욱루, 성경, 진경, 위지공, 종규, 위징외에 필자의 고증에 따르면, 민간에서 문신으로 모시는 사람으로는 <<봉신연의>>에 나오는 연등도인(燃燈道人), 조공명(趙公明), 동한이 요기(姚期), 마무(馬武), 진(晋)나라의 온교(溫嶠), 당나라의 개국공신인 사영등(謝映登)과 왕백당(王伯當), 항금영웅 악비, 한세충, 수호전에 나오는 해진(解珍), 해보(解寶), 여방(呂方), 곽성(郭盛)이 있다. 문신은 전국각지에서 서로 각각 다른데, 하남사람들이 많이 모시는 것은 삼국시대 촉나라의 조운(趙雲)과 마초(馬超)이다. 하북사람들이 모시는 문신은 마초, 마대(馬垈) 형제이다. 하북성 서북쪽에서는 설인귀와 개소(蓋蘇, 연개소문?)를 모신다. 섬서 사람들은 손빈(孫?)과 방연(龐涓), 황삼태(黃三太)와 양향무(楊香武)를 모신다. 한중일대에서는 맹량(孟良), 초찬(焦贊)을 붙인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북경의 밀운 일대에서 모시는 문신은 부부로 양종보(楊宗保)와 목계영(穆桂英)이다.

 

민간에서 문신으로 모셔진 이들은 무예가 출중하고 협의를 행하며, 국가에 충성했던 영웅들이다. 대부분은 중국의 고전명작에 나와 삼척동자도 아는 인물이다. 새봄이 시작되면 문신을 붙이는 습속은 지금까지도 일부 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다. 세상에 원래 귀신은 없지만,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 선량한 사람들은 이들 영웅에 의탁하여 귀신을 쫓아내고자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태평한 나날을 보내기를 얼마나 강렬하게 갈구했는지 잘 알 수 있는 단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