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은 유구하고 찬란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 그중 새를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은 만주족의 특징중 하나이다. 만주족의 새숭배중에서, 까마귀(烏鴉)과 까치(喜鵲)에 대한 숭배는 특히 돋보인다. 만주족 민간의 신화전설에는 풍부한 까마귀,까치의 이미지가 있다. 국내의 많은 학자들은 만주족의 까마귀,까치 숭배에 대하여 연구한 바 있다.
만주족의 신화전설에 나타난 까마귀와 까치의 이미지는 개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인도자의 이미지. 이 형상의 까마귀,까치는 항상 중요한 때 주인공을 이끌어 사람이나 사물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둬롱거거>>에 따르면 둬롱거거는 요붕(妖鵬)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새하얀 까치가 사람말을 하면서 둬롱거거를 이끌어 찾게 해준다. <<여진정수>>에서는 여진족 부부가 온갖 고난을 겪고 나쁜 용이 갖고 도망쳤던 정수주(定水珠)를 찾아와서 수재를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완다는 전쟁중에 죽어서 하나의 산이 되는데, 그의 두 눈은 까치로 바뀌어서, 여진의 모자 세 사람으로 하여금 완다의 도끼를 해준다. <<쾌활림>>에서는 벙어리 아가씨 주신의 친구인 작은 까치가 주신의 남편을 이끌고 집을 떠난 주신을 찾게 해주며, 이후 두 사람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사자(使者)의 이미지. 만주족에는 <<타화묵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한번은 삼림에 불이 났는데, 만주족의 사냥신인 반다마가 까마귀를 보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어 불을 끄게 하였는데, 불을 끄고나자 삼림이 절반은 타버렸다. 반다마는 불끄는데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하는데, 이때도 까마귀를 보내서 참가한 사람들에게 구슬을 주어 표지로 삼고, 그 표지가 없는 사람들은 처벌하였다고 한다. 만주족의 유명한 삼선녀 신화에서 푸쿠룬이 삼킨 것은 신작(神鵲)이 물고온 붉은 과일이었고, 애신각라씨의 조상인 부쿠리옹순을 낮는다. 여기서 신작은 하늘이 보낸 사신이다.
셋째, 보호신의 이미지. 이 유형의 이미지에서 까마귀/까치는 평안을 보우하고, 재난을 면하게 해준다. 후스하리씨의 샤먼이 제사를 지내는 중에 이렇게 말한다. 까마귀는 숲의 거거(아가씨) 즉, 해림여신(海林女神)이다. 까마귀가 있으면 사냥꾼이 숲 속에 들어가도 안전하다. 그리하여, 예전에 사냥꾼들이 숲에 들어갈 때면 먼저 까마귀에게 술과 고기를 주었다. <<우부시번마마>>에서 까마귀는 이전에 천신 아부카이은두리의 측근인데, 전쟁때 잘못하여 검은 풀을 먹고 죽어서, 검은 까마귀가 된다. 사람과 말이 있는 마을곁에서 맴돌면서 보호를 한다. 어떤 샤만이 남긴 말에 의하면, 까마귀의 깃털은 '태양이 없을 때의 색깔'이다. 즉 검은 색이다. 까마귀는 검은색의 경보새이다. 까마귀가 있으면 밤에 안전하다. 닝구타에는 사크사은두리에 관한 신화가 전해진다. 천신은 인간세상에 재난이 많은데 조금도 예방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크사를 인간세상에 보내어 길흉화복을 예보하게 한다. 그는 늙은 사냥꾼의 집안에서 태어나는데,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까치인 형상을 했다. 그리고 까지집에서 자랐고, 종일 까치와 어울렸다. 그는 홍수, 전염병을 예보해서 부락사람들이 화를 면하게 했다. 그는 야루리의 미혼진을 깨트려서 만주족들이 모시는 신이 된다.
넷째, 구원자의 이미지. 이 유형의 까마귀,까치는 두 가지 형상이 있다. 한가지는 사람이 주인공인 전설에서 까마귀,까치가 만주족의 황제나 영웅인물의 몸에 내려와 그들이 적으로부터 피하거나 구해지게 된다. 까마귀,까치는 이리하여 황제의 총애를 받고, 만주족의 존경을 받는다. 이 유형의 까마귀,까치는 아직 의인화되지 않았다. 구조행동도 직접적이다. 이 이미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누르하치를 구해준 전설이다. 누르하치가 명나라군대에 쫓길 때, 한 무리의 까마귀가 그의 몸에 내려앉는다. 명나라군사는 멀리 까마귀떼가 보이자, 이 곳에는 사람이 없다고 보고, 앞으로 달려간다. 이렇게 까마귀는 누르하치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소릉의 유래>>에서는 한 무리의 까마귀가 청태종을 둘러싸고 극도의 위험에 처한 그를 구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청태종은 이때부터 까마귀를 신물로 여긴다. 사람들에게 해치지 못하게 할 뿐아니라, 성경의 동북쪽에 아예 까마귀를 먹이는 장소를 둔다. 청나라문헌인 <<만주실록>>에 따르면, 애신각라가족이 까치를 숭배하는 신화를 싣고 있다: 부쿠리옹순이 세상에 나타난 후, 그 자손이 포악하였고, 반란을 일으켰다. 6월에 어두리에게 격패당하여, 자손들이 모두 죽게 된다. 그 중에 한 어린아이가 번차인데, 그는 겨우 몸을 빼서 광야를 달리게 된다. 병사들이 쫓아오는데, 마침 까치가 그의 머리에 앉았다. 추격병은 사람머리라면 까치가 앉아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고목으로 생각하고 돌아간다. 그리하여 번차는 목숨을 구한다. 만주의 후세자손들은 그리하여 까치를 신으로 여기고 해치지 않게 되었다" 또 다른 신화에서 까마귀,까치는 인성(人性) 혹은 신성을 지니고 있다. 인류를 도와주거나 신령이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백운거거>>에서는 여러 참새가 천신의 셋째딸 백운거거에게 호소하여, 푸른가지를 떨어뜨려서, 홍수를 맞이한 사람과 만물을 구해주는 것이다.
다섯째, 조복자(造福者)의 이미지. 금원지구(지금의 흑룡강성 아스하일대)의 만주족신화에서 까치, 까마귀는 구천녀의 아들이다. 홍수에 죽은 후, 까마귀/까치가 된다. 그리고 여진족에게 곡식종자를 가져다 주는 곡식신이다. 여진인의 농업생산은 이리하여 발달하고, 완안부는 강대해지게 된다.
만주족의 신화전설에서 까마귀,까치는 선량하고 아름답다. 여기에서 만주족들이 까마귀와 까치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까마귀와 까치를 신으로까지 여기게 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아마도 만주족 선주민들의 생활환경, 생산방식, 까마귀/까치의 생물특성과 샤만교의 영향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주족 선주민들의 자연환경을 보면, 직계조상은 명나라의 여진족이고, 그 선조는 3천년전의 숙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숙신인은 목단강과 우수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이곳은 삼림이 무성하고, 사계절이 분명하며, 동으로는 바다에 맞닿아 있으며, 하천이 여러갈래로 발달해 있다. 흑룡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는 섬과 호수가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합했다. 호수에는 대량의 물고기와 새우가 살아서 인류가 생존하기 좋았고, 조류가 번성하기 좋은 곳이었다.
이런 환경하에서, 만주족의 조상들은 각종 조류와 함께 생활했다. 조류는 경계심이 강해서 길흉화복을 예보할 수 있었다. 조류는 또한 밀림에서 길을 잃었을 때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조류중에서 까치와 까마귀는 분포가 가장 넓고, 자주 보게 되는 것이다. 둘 다 까마귀과에 속하며, 만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까마귀는 주로 큰입까마귀이다. 이 까마귀는 산지역, 들판, 큰나무에 서식하며, 성격이 기민하고 경계심이 많으며 한 마리가 울면 모두 멀리 날아가 버린다" 까치의 서식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인류와 가까이 살기를 좋아하는 새이다" 새들 중에서 까마귀와 까치는 경계심이 가장 강한 것들이다. 까마귀는 위험이 닥치면 울게 되는데, 이것이 경계신호가 된다. 수렵생활을 하는 만주족에게는 하나의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된다. 당시 사회발전수준이 낮았고, 샤만교의 영향으로 만주족의 선조들은 까마귀와 까치에게는 정보를 알려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까마귀와 까치에게는 (1) 먼저 지각하는 능력, 예측, 예보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2) 도와주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3) 사람과 신과의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외에 까마귀는 야수의 시체를 즐겨 먹는데, 사람들은 종종 까마귀가 몰려있는 곳으로 가면 먹을 거리를 찾을 수 있곤 했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까마귀에게는 신령이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아시아동북부 및 바다를 사이에둔 북미서북부의 연해에 사는 원시수렵어획민족은 까마귀를 신성하게 여기고 숭배했다. 이를 볼 때, 까마귀숭배는 수렵어획민족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누르하치는 소룬간(索倫杆)에서 까마귀에게 먹이를 주었다. 심양고궁의 청녕궁 앞에는 하나의 소룬간이 서 있는데, 꼭대기에는 그릇모양의 물건이 있다. 나무막대기는 한백옥의 기초석위에 놓여 있다. 샤만교의 의식에서 오곡과 돼지고기를 신간의 꼭대기에 두고, 까마귀에게 먹인다. 청태종은 까마귀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명령하고, 까마귀를 먹여살렸다.
만주족이 까마귀와 까치를 숭배하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만주족이 까치를 숭배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까치의 경각성으로 인하여 만주족들이 그에 신성을 부여한 이외에 까치는 외관이 예쁘고 몸이 재빠르고, 소리가 맑으며, 사람이나 가축에 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가 될 것이다. 한족도 까치를 매우 좋아한다. 한족에 있어서 까치는 기쁨을 알리는 공능외에 양성결합의 민속공능도 있다. 이에 속하는 주요한 내용으로는 견우직녀가 칠석날 까치가 다리를 놓아주어 만난다는 것이 있다. 흑룡강유역에는 <<까치집 안에서 며느리를 찾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늙은 장인이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를 내서 사위를 괴롭혔다. 마지막의 한 문제는 바로 세개의 큰 까치집에서 며느리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볼 때, 만주족의 전통관념에서 까치는 생식과 양성결합의 특수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까치는 사람과 신을 연결시키는 외에, 양성을 연결시키는 매개역할도 하는 것이다.
만주족의 까마귀에 대한 숭배는 까치에 대한 숭배보다 역사가 깊다. 까마귀숭배는 오래된 신앙이다. 중국의 여러 민족들은 고대에 모두 까마귀를 숭배했다. 상고신화의 삼족신오(三足神烏)가 왕모를 위하여 먹을 것을 찾아준 이야기에서 까마귀를 '신오'로 칭하고 있다. 까마귀를 이용한 점도 까마귀숭배의 한 표현이다. 서한시기에, 까마귀점을 보는 것이 유행했다. 나중에는 까마귀점에 관한 저작 <<음양국아경>>도 나온다. 여족의 이야기중에서 까마귀는 사람을 구한다. 푸미족의 신화에서도 까마귀는 재난을 예보하는 능력이 있다. 까마귀숭배는 생산방식과 관련이 있다. 최초의 까마귀숭배는 수렵시대에 탄생한다. 까마귀는 사냥꾼을 도와서 동물의 시체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어떤 민족은 검은 것을 숭배하는 습속이 있는데, 까마귀는 검은 깃털을 지니고 있어서 좋아하게 된다. 나중에 까마귀의 이미지는 반대방향으로 가게 된다. 주로는 생산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민족은 수렵에서 농경으로 바뀌면서, 까마귀의 잡식성과 물건을 훔치는 습성때문에 싫어하게 된다. 특히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더욱 뛰어난 수단으로 식물을 취득할 수 있게 되면서, 까마귀의 도움은 필요없게 된 것이다. 이때 까마귀의 죽은 시체를 먹는 습성은 오히려 죽음을 알리는 신호로 되어버린다. 만주족도 지금은 더 이상 수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민족들이 까마귀의 습성에 대하여 심미관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을 때도, 만주족들은 지금도 여전히 예전과 같이 까마귀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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