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진애낙정(塵埃落定)
삼국시대 위, 촉, 오가 장기간 대치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의 정치군사역량때문이었다. 그중 위나라는 인구가 약 54만호, 440만명이었고, 촉이 24만호, 150만명, 오나라가 47만호, 300만명이었다. 이러한 인구수량하에서 위나라의 군대는 30만가량이고 최고 많을 때는 50만까지 되었다. 촉은 10-15만가량, 오는 20-30만가량이었다.
그중 위나라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뉜다. 중앙군은 다시 중군(中軍)과 외군(外軍)으로 나뉘는데, 직책이 약간 다르다. 중군은 경사(京師, 수도)지구에 주둔하는 중앙직속부대이고, 수량은 약 5만이다. 조조의 친위병이 확대되어 이루어졌고, 위나라의 핵심무장역량이다. 중군은 5영(營)으로 나뉘는데, 무위영(武衛營)은 궁중경비를 책임지는 핵심부대이다. 나머지 중령(中領), 중호(中護), 중견(中堅), 중루(中壘)의 4개영은 경사의 다른 지역을 방어하는 부대이다. 이들은 동시에 국가의 전략기동부대이기도 하다. 훈련도 잘 받았고, 전투력도 아주 강했다. 전시에 대부분 선봉에 선다.
외군(外軍)은 중앙군에 속하며 5만-10만이었는데, 경사 이외의 지역에 주둔하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형식은 중앙에서 파견한 도독이 관리했고, 일부분 중앙군을 새로 점령한 지역이나 전략적 요충지에 남겨서 주둔하게 했던 것이다. 이들은 비록 외지에 주둔하고 있기는 하나, 중앙정부가 직접 지휘하고 소속지역의 지방관리에게는 군대를 움직일 권한이 없었다.
지방군(地方軍)은 주군병(州郡兵)이라고도 한다. 지방의 무장세력으로, 당해 주, 또는 군의 통솔을 받는다. 기반은 당히 자사 혹은 태수의 사인무장세력이었고, 이들이 모집하고 훈련하여 이루어진 부대이다. 이들은 현지 지방의 방어를 책임진다.
위나라군대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는 기병부대 및 공성기계부대였다. 위나라는 흉노등 북방소수민족으로부터 대량의 우수한 전투마를 구매하여 강대한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부대는 "호표기(虎豹騎)"이다. 이들의 위세는 기병위주인 강족(羌族)의 군대마저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촉에서 나는 천마, 진마는 운송에는 적합하지만, 달리는데는 부적합했다. 오나라는 좋은 말이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촉과 오는 강력한 기병부대를 구성하지 못했다.
촉의 군대도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뉜다. 중앙군은 전, 후, 좌, 우, 중의 오군으로 구성되는데, 중군(中軍)은 위나라와 마찬가지로 숙위부대이다. 전, 후, 좌, 우의 사군은 위나라의 외군과 유사하다. 촉의 기반부대는 대량의 소수민족과 유민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동주군(東州軍, 유민부대), 수군(叟軍, 수족으로 구성), 비군(飛軍), 청강(靑羌), 백(白), 이(夷)병등이 있다. 중앙군은 약 5-7만명이고, 지방군은 7-10만명이다. 제갈량이 군대를 잘 훈련시켰으므로, 촉의 군대는 전투력이 비교적 강한 편이었다.
촉의 군대의 장점은 선진적인 원거리타격무기인 궁노(弓弩)에 있었다. 제갈량이 발명한 "연노(連弩)"와 같은 위력이 강한 무기는 전국이래 가장 선진적인 무기였다. 제갈량은 또한 "목우류마(木牛流馬)"를 발명하여 인력을 절약하는 물자조달도구도 만들었다.
오나라의 군대제도는 비교적 어지러운 편이었다. 대체로는 위나라와 같다. 동오의 중앙군은 촉과 같은데, 전, 후, 좌, 우, 중의 오군이 있었다. 지방군은 여러 명칭의 것들이 있었는데, 차하호사(車下虎士), 단양청건(丹陽靑巾), 교주의사(交州義士), 건아(健兒), 용감(勇敢), 호사리(虎射吏)등의 지방병이 있었다. 동오이 군대는 대부분 산에 거주하는 월인(越人), 즉 산월(山越)로 구성되었다. 수량은 개략 10만이상이며, 수군(水軍)의 수량도 10만이상이었다.
오나라군대의 장점은 방대한 수군(水軍)에 있었다. 오나라에서는 말 80마리를 싣는 전선도 작은 배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진이 오나라를 멸하였을 때, 노획한 배가 5000여척이라고 한다. 위나라는 전략중점을 항상 오나라를 공격하는데 두었다. 그리하여 위나라도 수군을 키웠지만, 항상 오나라에의 수군에는 밀렸다.
오촉연맹이전에 촉과 오의 군사역향은 모두 위나라에 비하여 부족했다. 두 나라는 모두 각자의 독특한 지리적인 장점에 의지하여 방어하고 있었다. 오촉연맹이 이루어진 후에는 오촉연합군의 군사역량이 위나라의 군사역량보다 강했다. 이로부터 위나라는 전략중점이 방어로 돌아선다. 위나라의 중앙군은 도성 및 주변지역에 분포시킨다, 주로 장강중하류지역에서 오나라를 방비하고, 관중지구는 대량의 지방부대 약 5만명 및 일부 외군으로 위나라를 괴롭히는 강족등 소수민족의 반란을 제압하고 촉의 공격을 방어한다. 북방에도 북방소수민족을 방비하는 군대를 배치시킨다.
오나라의 군대는 오촉연맹이전에는 오촉변경에 약 5-8만, 오위변경에 10만가량을 두었다. 나머지군대는 각지역에 분포시켰고, 계속 반란을 일으키는 산월 소수민족을 통제했다. 오촉연맹후, 오나라는 오촉변경의 대부분 부대를 오위변경으로 이동시킨다.
촉의 군사역량은 가장 취약했다. 제갈량이 소수민족정책을 잘 써서, 소수민족이 집중된 남부지구에 전혀 군대를 배치하지 않아도 되었다. 성도 및 그 부근에 중앙군 약 4-5만을 주둔시키고, 나머지 6-8만을 한중지구에 배치하여 위나라를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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