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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유황후(劉皇后): 화고녀(花鼓女)에서 황후까지...

by 중은우시 2008. 6. 12.

 

북송의 송진종(宋眞宗)의 황후인 유씨는 본명이 유아(劉娥)이다. 부친은 유통(劉通)으로 일찌기 호첩도지휘사, 가주자사를 지냈으며, 송태조 조광윤을 따라 태원(太原)을 정벌할 때 도중에 죽는다. 유씨집안은 이때부터 쇠락하고, 그녀는 사천땅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유아가 젖먹이였을 때, 모친이 병으로 죽어버린다. 그리하여 외할아버지집에서 자라게 된다. 그런데, 외할아버지집안은 사람도 적고, 집안도 흥성하지 못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먹을 거리를 걱정할 정도였다. 유아는 그들에게는 짐일 뿐이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 유아는 여러번 목을 매고 죽어 이 세상을 떠날 것도 생각한다. 어릴 때 빈한함을 겪으면서 이 천진하고 예쁜 소녀는 보통 여인들보다 더욱 큰 욕망과 심기를 갖추게 된다.

 

하루는 유아가 아무 생각없이 문앞에 서 있는데, 마침 관상장이가 지나가다가 유아를 본다. 그리고는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면서, 위에서 아래로 계속 훑어봤다. 유아는 멋적어서, 관상장이에게 "길은 안가고 나를 쳐다보는 건 뭐하자는 건가요?"라고 말했다. 관상장이는 '나는 나쁜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너의 용모가 아주 귀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동안 사람을 많이 보아 왔지만, 오늘 너와 같은 용모는 처음 본다" 유아는 관상장이가 일부러 거짓말을 해서, 돈 몇푼을 뜯어내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가난해요. 줄 돈도 없으니,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려 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관상장이는 "나는 관상을 봐준 돈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손을 내밀어 주겠느냐. 내가 한번 보면 확신할 수 있을 것같다" 유아는 무료하였고, 돈도 받지 않겠다고 하므로 그에게 보여주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보여주었다. 관상장이는 자세히 살펴본 후에 "후비(后妃)의 상이다. 후비의 상이야"라고 하였다. 

 

유아는 관상장이의 말을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마음 속으로 자기가 이렇게 빈곤하고, 궁벽진 시골에 살고 있는데, 무슨 후비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힘들 때일수록 정신적인 지주가 필요하다. 유아는 여인이니까, 남자들처럼 열심히 공부해서 공명을 얻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관상장이의 말을 자기를 지켜주는 법보로 삼는다. 이후에는 아무리 힘들고 막다른 골목에 부닥쳐도 그녀는 다시는 자살할 생각은 갖지 않게 된다.

 

나이가 들면서 유아는 아주 예쁘게 자란다. 그녀는 성격이 총명하고 기민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도고(鼓)를 배운다. 도고는 양쪽에 작은 손잡이(귀)가 달린 작은 북이다. 북채가 있어 북채를 흔들면, 양면의 북을 쳐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속칭 "발랑고(拔浪鼓)"라고 부르는 것이다. 도고는 원래 보통 악기였고, 치는데 무슨 유명한 곡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아는 자질이 뛰어나서 도고를 자기의 뜻대로 변화시켜 운용했으며 여기에 출중한 용모와 생기발랄한 노랫소리까지 합쳐서 곁에서 듣는 사람들이 그녀의 도고공연에 빠져들곤 하였다.

 

유아가 십여세때, 외할아버지는 그녀를 은장(銀匠)인 공미(美)의 처로 주어버린다. 나중에 정사(正史)에서는 공미는 유아의 이웃이고, 두 사람은 오누이로 서로 칭했다고 적었다. 사실 이는 유아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적이 있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공미는 경사(京師, 수도 즉 개봉)로 가서 장사를 하고 싶어했다. 유아도 남편을 따라 경사로 가서 세상구경을 하고 싶었다. 공미는 가난을 견디지 못하여 경사로 가서 일거리를 찾으려는 것이었으므로, 유아를 데려가면 짐이 될 거라고 생각하여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유아는 공미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돈은 걱정할 것이 없다. 나도 재주가 있으니 어디를 가든 밥은 먹을 수 있고, 너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공미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고, 응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부부 두 사람은 함께 길을 떠난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지만, 이 경사로 가는 길은 빈천한 부부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게 된다.

 

유아는 가는 길에 도고공연을 통해서 돈을 벌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예쁘고 목소리가 고우며, 북을 두드리는 것이 박자에도 맞아서 좋아했다. 그리하여 돈을 생각보다 많이 벌었다. 그래서 공미는 아예 작은 동라(銅)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유아의 도고와 함께 남녀가 함께 공연하는 화고희(花鼓戱)를 개발한다. 화고희는 당시에는 아주 신선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지나가는 곳마다 인기를 끌었고, 유아는 적지 않은 돈을 모으게 된다.

 

경사에 도착한 후, 공미는 계속 원래 하던대로 은장일을 한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유아를 팔아버릴 생각까지 하게 된다. 유아는 어쩔 수 없이 원래 하던대로 도고를 치기 시작한다. 경사는 번화했지만, 화고희라는 놀이를 본 적은 없었다. 유아가 공연을 하면 아주 인기를 끌었고, 서로 와서 보려고 했다. 유아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졌다.

 

이때 조항(趙恒)은 14살이었고, 처음에는 양왕(襄王)에 봉해진다. 아직은 태자가 아니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호기심은 많았다. 사천여자들이 재색을 겸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사천여자를 시첩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는 도고를 치는 여자인 유아에 대한 소문을 들은 후,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근위시위 몇명을 데리고 유아의 공연을 보러 간다.

 

유아는 나이는 많지 않았지만, 세상일은 잘 알았다. 그녀는 황자(皇子)가 직접 나타난 것을 보고는 자기의 재주를 마음껏 뽐냈다. 조항은 처음에 유아의 화용월태를 보고, 이미 그녀의 미색에 홀려버렸다. 여기에 유아가 일부러 유혹적인 눈짓까지 보내자 조항은 더 이상 참지를 못한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조항은 즉시 사람을 공미에게 보내서 유아를 사서 집안으로 들인다. 양왕부의 시녀가 된 것이다. 유아는 타고난 미녀에 총명하고 영리했다. 그리하여 조항의 환심을 산다. 두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여 마음이 잘 맞았다. 즉시 두 사람은 딱 달라붙어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조항의 유모인 태국부인은 내력이 불분명하고 신분이 미천한 유아에 대하여 아주 불만이었다. 조항에게 유아를 쫓아내라고 요구한다. 조항은 한창 나이에 때마침 재색을 겸비한 유아를 만났고, 마음에 드는데 어찌 손쉽게 내보낼 수 있겠는가? 조항의 유모는 조항이 말을 듣지 않자, 송태종에게 이를 보고한다. 송태종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여색에 빠져있다는 말을 듣고는 대노한다. 그리고 조항에게 즉시 유아를 양왕부에서 쫓아버리라고 명령한다.

 

부친의 명을 어기기는 힘들고, 황제의 명을 어기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하다. 조항은 그래도 유아를 버리기가 아까웠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유아를 사천의 고향집에 보내는 것으로 하고, 암중에 그녀를 심복인 장기(張耆, 원래 이름은 張旻)의 집에 보낸다. 장기는 몰래 집안 사람들로 하여금 유아를 잘 보살피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일 양왕부에서 잠을 잤다. 이는 모두 혐의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아가 양왕부를 떠난 후, 조항은 송태종의 명에 따라 반미(潘美)의 여덟째 딸을 처로 맞이한다. 반씨는 조항의 첫번째 정실부인이다. 비록 조항은 기회만 있으면 몰래 장기의 집으로 가서 유아와 비밀리에 만났지만, 유아의 이 당시 심경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보통여자와 비교하면, 유아의 남다른 심기는 이때도 드러난다. 그녀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장기의 집에서 책들을 뒤지고 역사서와 경전을 읽으며, 금기서화를 연구한다. 이처럼 남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총명한 여자를 조항이 더욱 남다르게 대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유아는 조항에게 있어서 첫여자였고, 이 사랑을 평생 가져간다.

 

유아는 시종 기회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15년이 걸린다. 송태종이 죽으면서, 조항이 황위를 이어받아 송진종이 된다. 유아는 이때야 비로소 다시 전면에 나설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입궁하여 바로 미인(美人)에 봉해진다. 오래지 않아, 덕비(德妃)에 오른다. 송나라 궁중제도에 따르면, 황후의 아내레는 비(妃)와 빈(嬪)의 두 등급이 있다. 비(妃)에는 귀비, 숙비, 덕비, 현비의 4등급이 있다. 빈(嬪)의 등급은 17등급에 달하였다. 그 아래에는 첩여, 미인, 재인과 귀인이 있었다. 당시에 송진종의 첫번째 정실부인인 반씨는 이미 죽었다. 그리하여 후처인 선휘남원사 곽수문의 둘째딸인 곽씨가 처였다. 송지종이 즉위하면서 곽씨가 황후에 오른다. 유아는 성격이 기민하고, 변신을 잘하였다. 그녀는 곽황후를 잘 모셨고, 다른 비빈인 양숙비 등과도 잘 어울렸다. 이처럼 모두에게 잘하고, 게다가 유아는 나이가 곽황후나 양숙비보다 훨씬 많았으므로 그다지 살상력이나 위협력이 없어보였다. 그리하여 궁중의 아래위 모든 사람들이 그녀와 잘 지냈고, 모두 그녀를 현숙하고 덕이 있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유아는 이미 예전처럼 청춘도 아니고 미모도 아니었다. 그래도 송진종은 여전히 그녀를 아꼈다. 이는 아마도 옛정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송진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아의 궁중내 지위는 갈수록 올라갔다. 다만, 겉으로는 겸허하고 온화한 여인이지만 내심은 갈수록 긴장이 더해갔다. 그녀는 미색으로 군주를 얻는 것은 오래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녀는 이미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은 자식에게 걸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나이가 사십에 가깝고, 일끼지 여인의 왕성한 생육연령을 지났다. 어떡할 것인가?

 

송진종은 이때 아들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그의 첫부인인 반씨는 젊어서 죽었고,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이후의 곽부인은 아들 셋을 연속으로 낳았지만 모두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요절하고 만다. 또 다른 총애를 받던 양숙비가 낳은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송진종은 아들을 갈망했다. 그리하여 전 재상인 심의륜의 손녀인 심씨를 입궁시켜 재인으로 삼는다. 이때 심씨는 겨우 14살이고, 명문의 후예였다. 유아에게는 거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경덕3년(1006년) 곽황후가 서거한다. 유아는 37세였고, 후궁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후궁들 중에서 지위는 가장 높았고, 황후의 자리와는 한발자국 차이의 거리였다. 그러나, 유아는 신분이 미천해서, 황후가 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조정의 여러 신하들은 심재인을 새로운 황후로 삼는데 찬성했다. 송진종은 아무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유아를 편애하기 때문이었다. 심재인을 누르기 위하여 유아는 이화접목(梨花接木), 이대도강(李代桃)의 계책을 생각해낸다. 자신의 시녀인 이씨로 하여금 송진종을 모시게 한 것이다.

 

이씨는 원래 항주사람이다. 부친인 이인덕은 오월왕때 좌반전치를 지냈고, 모친은 일찌감치 돌아가셨다. 오월이 송나라에 항복한 후, 이인덕은 변경으로 오는 도중에 병으로 사망한다. 계모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데리고 개가하고, 이씨만 홀로 남는다. 살아갈 방법이 없어 삭발하고 여승이 되어, 절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 유아는 절에 가서 예불을 드리다가 이씨의 용모가 예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여 대가집 규수라고 생각하고 그녀와 얘기를 나눈다. 이씨는 대답도 아주 절절하게 잘 했다. 유아는 이씨의 신세내력을 들은 후,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씨를 절에서 데리고 나와 자기의 시녀로 삼는다. 이씨는 행동거지가 과묵하여 유아의 신임을 얻는다.

 

이씨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성격이 온화했다. 유아에 의하여 송진종의 곁에 보내어진 다음에 송진종의 잠자리를 보살피는 업무를 맡는다. 유아의 목적은 분명했다. 과연 그녀가 바라는대로 송진종은 이씨에 흥미를 보이고,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 오래지 않아 이씨는 회임을 한다. 송진종은 후사를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하며 곁을 떠나지 않는다. 틈이 날 때마다 이씨의 곁으로 왔다.

 

하루는, 이씨가 송진종을 따라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바라볼 때, 머리의 비녀가 바다에 떨어졌다. 이씨는 마음 속으로 걱정을 하는데, 송진종은 다르게 생각한다: "옥비녀가 땅에 떨어져서도 부서지지 않았다면 태아는 반드시 남자일 것이다" 내시로 하여금 옥비녀를 주워오게 해서 보니 역시 전혀 손상이 없었다. 손진종은 너무나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이씨와 시종들은 그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이후 이씨는 여러 사람의 바램을 저버리지 않고, 남자아이를 순산한다. 송진종은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고, 원래 다시는 아들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해서, 심지어 종실의 자제를 양자로 들이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씨가 아들을 낳았으니 그 기쁨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아이에게 이름을 조수익(趙受益)으로 지어주고, 나중에 조정(趙禎)으로 개명한다. 송진종은 옥비녀가 떨어졌을 때의 일을 이씨에게 설명해주며 아들을 얻은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유아도 아주 기뻐한다. 즉시 이씨의 아들을 자기 것으로 한다. 그리고 양숙비에게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이 아이를 잘 부양한다면 장래에 반드시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양숙비는 사람됨이 온화하여 단번에 응락한다. 이후, 유아는 궁궁의 사람들로 하여금 아이에게 진상을 말하지 못하게 엄명한다. 송진종은 유아를 총애하였으므로, 그녀가 이씨의 아들을 데려가 기르는 것을 묵인한다. 후손을 두었으므로, 유아는 황후로 책봉될 수 있었고, 송진종이 죽은 후 그녀가 수렴청정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이묘환태자'로까지 변모하나, 사실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이를 보면 후궁에서 아들을 가지고 총애를 얻는 복잡한 국면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조정은 유아의 소생이라고 듣게 되지만, 조야의 모든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아무도 감히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할 뿐이었다. 유아는 자기의 출신을 감추기 위하여, 사방에서 유씨성의 고관과 관계를 맺고, 가까이 지내고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고귀한 조상을 가진 것으로 하여 그녀가 황후가 되는데 방해물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용도각직학사 유엽은 12대조인 북제의 중서시랑 유환준때로부터 대대로 관리를 지내 집안이 혁혁하다. 그리하여 유아의 눈에 들게 된다. 유아는 적극적으로 유엽을 찾아서 친근하게 지내고자 한다. 그리고 암시하는 말투로 말한다: "듣기에 당신네 집안이 명문거족이라는데, 너의 족보를 보고 싶다. 혹시 우리가 조상이 같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유엽은 청고한 사람이었고, 권력에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라고 해버린다. 거절을 당하고도 유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족보를 보여달라고 한다. 유엽은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어 급한 와중에 아이디어를 내서 중풍을 가장하고 땅바닥에 쓰러진다. 사람들이 들어서 궁밖으로 내보냈다. 그리하여 겨우 유아가 달라붙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유엽은 지방으로 내려가겠다고 하여 내려간다. 유아도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된다.

 

바로 유아의 출신이 미천하다는 것때문에, 송진종이 그녀를 황후로 세우자고 말했을 때, 즉시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치게 된다. 곽황후의 사후에 황후자리는 오랫동안 비어있게 된다.

 

송진종은 결국 유아에 대한 사랑으로 인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유아를 황후로 세운다. 그는 먼저 참지정사 조안인과 협의하고 그의 지지를 받아내고자 한다. 원래 황제가 친히 몸을 굽혀 부탁하는 것이므로 조안인으로서는 체면을 봐주는 것이 맞다. 그러나, 조안인은 유아의 신분이 미천함을 들어 그녀를 황후로 세우는데 극력 반대한다. 송진종은 처음부터 반대에 부닥치자, 자연히 기분이 나빴다. 이 방식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다음 날, 송진종은 왕흠약을 불러 상의한다. 그리고 조안인의 의견을 그에게 얘기해준다. 왕흠약은 사람됨이 음험했다. 이전에 조안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이 기회에 조안인을 배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송진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폐하는 조안인에게, 누구를 황후로 앉히는 것이 좋겠는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은 아주 음험하다. 당시 유아를 황후로 하는데 반대하는 대신들은 모두 전 재상 심의륜의 손녀인 심씨를 황후로 삼자고 주장했다. 왕흠약의 이 말은 분명히 함정을 파는 것이었다. 다만, 송진종은 왕흠약이 파놓은 함정을 느끼지 못하고, 조안인에게 의견을 묻는다. 조안인은 솔직하게 건의한다: "심씨는 전 재상인 심의륜의 후손이고 출신이 고귀합니다. 그러니 황후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송진종은 아주 실망한다. 조안인의 건의를 다시 왕흠약에게 얘기한다. 왕흠약은 바로, "폐하가 말씀하지 않으셔도, 조안인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과거에 심의륜의 문객이었습니다" 송진종은 이 말을 듣자, 조안인이 개인적인 이익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고 그를 파면하고, 유아를 황후로 세울 결심을 굳힌다.

 

바로 이때, 재상인 왕단이 돌연 병이 나서, 조회에 나오지 못한다. 그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는 방법을 바꾸어 유아를 황후로 세우는데 반대한 것이다. 유아는 반대세력의 기세가 만만치 않음을 보자, 사양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송진종에게 고사한다. 자기는 황후가 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송진종은 유아를 사랑했고, 억지로 헤어지게 하자 부친의 명을 어겨가면서까지 그녀를 보살펴준다. 이로써 볼 때 송진종에게는 반역심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구오지존의 황제임에도 신하들이 반대하고 유아까지 사양하자 송진종은 더욱 화가 난다. 그리하여 그는 유아를 황후로 세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다만, 신하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송진종은 중신과 종실에 크게 상을 내린다. 왕단에게는 시랑겸 청조응궁사를 봉하고, 향민중에게는 중서시랑을 덧붙여주며, 초왕에게는 태사를 상왕에게는 태부를 서왕에게는 태보를 덧붙여준다. 이후 황후를 책봉하는 의식을 간략하게 함으로써 여러 신하들의 반발을 잠재운다.

 

비록 이렇게 하였지만, 황후를 세우는데는 풍파가 그치지 않았다. 송진종은 정위를 보내어, 양억으로 하여금 황후를 책봉하는 조서를 초안하게 하는데, 양억은 성격이 강직하고, 유아를 황후로 세우는데 반대하여 성지를 받들지 않는다. 정위는 그에게 "억지로라도 초안만 하면 부귀가 앞에 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해도 양억은 절개를 지켜서 즉석에서 "이렇게 구하는 부귀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정위는 할 수 없이 사실대로 보고한다. 송진종은 할 수 없이 다른 학사에게 조서를 초안하게 할 수밖에 없다게 된다.

 

대중상부5년(1012년) 12월 24일, 유아는 마침내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유아는 은장의 처에서 일국의 황후에 이르기까지 절대로 미모만 가지고 오른 것은 아니다. 이때 유아의 나이는 이미 43세였다. 일찌기 좋은 시절은 지나갔고 여인으로서의 매력도 잃었다. 그리하여 송진종의 마음을 끈 것은 그녀의 총명과 재주였다. 그녀는 후궁의 일을 잘 처리했을 뿐아니라, 조정에서도 송진종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유아는 장기의 집에서 15년간 글을 읽었고, 이미 옛날과 달랐다. 역사에 통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대사에 대하여도 견식이 있었다. 송진종이 상소문을 볼 때, 유아는 곁에서 그를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녀가 예전의 사례를 들어 적절하게 답변하도록 건의했다. 그리하여 송진종은 그녀를 매우 중시했고, 자신의 팔처럼 여겼다. 사서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황후는 깨달음이 뛰어나고, 서와 사에 능통했으며, 조정의 일을 들으면, 본말을 기록할 수 있어서, 진종이 그녀를 아주 중시했다"

 

송진종의 성격은 연약했다. 그러나 유아는 뛰어나고 능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송진종은 그녀를 아주 신임했을 뿐아니라, 그녀에게 의지했다. 속담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서 부부는 늙어서 짝"이라는 것이다. 이 황제와 황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송진종의 신체상황이 날로 악화될 때, 유아는 순조롭게 남편을 도와 조정의 일상업무를 처리하고 군국대사를 결정한다. 그러면서 점점 정치에 간여하게 된다. 이는 송나라가 세워진 이래 후궁이 정치에 간여한 첫번째 사례가 된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일은 바로 송진종을 도와서 유아를 숨겨주었던 장기이다. 송진종은 즉위후 장기의 관운은 형통했다. 계속 승진했다. 송진종의 후기에 장기는 마군도수를 지낸다. 그런데, 병사를 뽑는데 적절치 못했다. 부하를 너무나 엄하게 대하고, 형이 가혹해서 사병들이 모두 무서워했고, 하마터면 반란에 이를 뻔했다. 조야상하에서 모두 그에 대하여 분노했고, 장기를 처벌해달라고 요구했다. 재상 왕단은 이렇게 생각한다.: 만일 장기의 죄를 처벌하면 앞으로 장수는 부하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며,만일 사병을 체포한다면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 다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장기가 황제와 황후에게 은혜를 베푼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제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정을 하게된다. 그리하여 장기의 병권을 빼앗는 대신 추밀부사의 직위를 주게 한다. 표면적으로 장기는 승진했고, 체면은 지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권을 빼앗기고 사병들도 안정된다. 송인종이 즉위한 후, 유아는 태후가 되어, 실제 대권을 장악한다. 예선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다시 장기를 추밀사의 요직에 앉힌다. 단지 장기는 사람이 평범하고, 전공도 없어, 모략도 없었다. 그저 그는 앉아서 복록을 누릴 뿐이었다. 장기라는 사람은 아주 재미있다. 그는 부를 엄청나게 쌓았는데도 사람들에게 아주 인색했다. 집안에 점포를 차려서 자기 집안에 필요한 물건을 자기의 점포에서 구매했다. 그는 집안 사람들이 병이 들어 진찰을 하거나 약재를 살 때도 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아주 황당하고 가소로웠고, 당시의 우스개거리로 기록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