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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적벽>> 과 역사적 사실

by 중은우시 2008. 7. 14.

글: 사걸붕(史杰鵬)

 

그저께 저녁에 <<적벽>>을 봤다. 기본적인 느낌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대사이건, 스토리이건 모두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래에는 그 중에 기억나는 부분들을 몇 군데 얘기해 보기로 한다.

 

첫째, 영화의 시작이 조조의 남정(南征)과 조자룡이 아두(阿斗)를 구하는 장면이다. 이곳이 장판파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중에 말하는 바에 따르면 신야(新野)에서 철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유비가 양양의 십만여 백성을 이끌고 철수한 바 있었다. 당시 걸음이 늦어, 당양에서 조조의 오천기병에 추격당하는데, 1만여 병사가 기병들에게 박살나서, 할수없이 10만백성을 버리고, 수십기를 이끌고 한진으로 황급히 도망하게 된다. 때마침 관우의 선박이 한수에서 호응해주어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장판파전투에서, 유비는 손실이 참혹했다. 1만여보병기병을 잃었을 뿐아니라, 자기의 두 딸마저 난전중에 잃었다. 이처럼 참혹했는데, 영화에는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으니, 너무나 아쉽다. 영화에서는 유비가 10여만백성을 이끌고 안전하게 철수했다는 설명이 나오니, 쓰고있던 안경을 떨어뜨릴 정도이다.

 

둘째, 조조와 주유가 적벽에서 대치할 때, 보병기병을 보내어 주유의 배후로 가서 그들과 육상전을 벌인다. 이 장면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적벽의 양안은 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만일 평원에서 만났다면 우회해서 돌아가서 육상전을 벌일 수 있을 것이고, 조조도 일찌감치 생각했을 것이다. 조조의 병사들은 육상전에서 강하여, 주유의 수만 수군은 아마도 순식간에 궤멸했을 것이다. 조조가 왜 잘하지도 못하는 수전을 벌이겠는가? 만일 조조의 병사가 적벽에서 주유와 만난다면, 그는 선박을 위로 올려보내 먼 곳에서 강을 건너게 한 후에 육지에서 주유를 협공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조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것은 육상전으로 주유의 군대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우회해서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왕왕 성이 하나 있으면 그것으로 군대의 진격을 막을 수 있었다. 전진하려면 그 성을 공격해서 빼앗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 이번 육상전에서 영화에 허구적인 팔괘전이 나오는데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방패로 형성한 진세는 한사람키높이인데, 이는 손쉽게 기병의 말발굽아래 궤멸될 형태이다. 흙으로 쌓거나 석벽을 쌓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적병의 공격효력을 분할포위할 수 있겠는가? 조조의 병사들은 원형방패를 들고, 어린진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개략 로마군대를 모방한 것같다. 중국역사상으로는 원형방패가 나타난 적도 없다. 하물며 로마의 어린진은 아주 견고한데, 몇필의 말이 끄는 밧출에 몇 개의 낭아봉을 매달아 놓은 것으로 어린진을 파괴한다니,,,순전히 소아과 수준이다.

 

넷째, 제갈량이 동오로 가서 항복을 권하는데, 노숙은 주랑이 이때 적벽에서 병사를 훈련시킨다고 말한다. 적벽은 당시 손유연합군(오촉연합군)이 장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조의 병사와 우연히 맞닥뜨린 지역이다. 주유가 어찌 미리 적벽에서 만날 줄 알고 연습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의 화면이 순식간에 바뀌어 제갈량이 주유의 병영에 있게 되는데, 마치 적벽이 동오의 도성부근에 있는 것처럼 그렸다. 전혀 실제에 맞지 않는다.

 

다섯째, 관우, 장비, 조자룡의 싸움방법은 무협영화같다. 한 사람이 수십명의 병사를 무너뜨리는데, 수퍼맨이 아니고서야....심지어 주유도 화살을 맞은 후에, 가슴에서 화살을 뽑아서 던지는데, 적군 대장의 목에 박힌다. 이것은 역사전쟁영화에는 전혀 어룰리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기병이 이미 많이 발달해 있었는데, 동탁과 여포도 기병으로 활쏘는 것이 유명했다. 관우도 말을 타고 적진을 뛰어다니며 안량을 베었다. 왜 영화에서는 장수들이 말에서 내려서 발로 뛰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가? 더구나 주유가 총사령관의 몸으로 친히 전투에 나서다니, 그런 모험을 할 리가 있는가?

 

여섯째, 제갈량이 망아지를 낳는 것을 받는다. 주유가 망아지에게 형초(荊楚) 품격의 이름을 짓자고 하자, 소교는 '맹맹(萌萌)"이라고 한다. 맹맹과 형초가 무슨 관계인가? 소교는 또한 평안(平安)이라는 이름을 지어서 주유의 아들이름을 짓는데, 이것도 말이 안된다. '평안'이라는 이름은 너무 현대적이다. 한나라말기에는 절대 이런 멍청한 이름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조미(趙薇)는 군주(郡主)라고 불리는데, 그 당시에 무슨 군주가 있단 말인가? 군주라는 호칭은 당나라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황태자의 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곱째, 조미는 점혈이라는 쿵후를 할 줄 안다. 이는 영화의 무협적인 속성을 심화한 것이다. 원래 이런 내용을 일반적인 영화에 집어 넣었다면 모르지만, <<적벽>>과 같은 쌍방의 병사들이 화살을 비처럼 쏘아대는 군사영화에서 돌연 점혈할 줄아는 여자가 하나 튀어나와서 이러저리 뛰어다닌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코미디이다. 이런 영화를 도대체 뭐로 분류해야 하는가?

 

여덟째, 양군이 대치하는 곳은 전혀 장강같지가 않다. 조조의 선박은 강안을 따라 가로의 한 줄로 배열되어 있지 않고, 세로로 종심을 향하여 선박이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선박대열의 뒤는 바로 육지이다. 도대체 어디에 이렇게 넓은 강이 있단 말인가?

 

아홉째, 관우의 아들이 <<시경>>을 잃고 있는데, 이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나라때는 유학이 발달하고, <<시경>>은 전문적인 박사가 강의하는 것이어서, 관우도 못읽었을 것이다. 당시 어린아이들이 읽는 것은 주로, <<논어>>와 <<효경>> 그리고 <<급취편(急就篇)>>과 같은 유형이지, 절대 <<시경>>을 가지고 하지 않는다. 한간(漢簡)에 병사들이 글자연습한 것은 대부분 <<급취편>>, 조서와 산술서이고, 거의 오경은 없다.

 

열째, 장비가 종이에 서예를 연습하는데, 당시에는 종이제조가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관공서의 공식문서도 대부분 죽간을 사용했다. 영화에 조조가 손권에게 보내는 서신도 죽간이었다(이것은 너무 절약한 것같다), 그런데 장비라는 가난한 군관은 종이에 서예를 연습하다니, 너무나 사치스럽다.

 

열한째, 회광진(回光陣)은 순전히 헛소리이다. 유비가 어디 그렇게 많은 돈이 있어서 이런 방패를 만든단 말인가? 혹시 만들었더라도, 무슨 시간이 있어서 구리거울처럼 반짝이게 닦을 수 있단 말인가? 혹시 닦아서 빛이 나게 한다고 하더라도, 태양의 각도를 그렇게 정확하게 계산해서 햇빛을 반사시키고, 상대방의 기병을 놀라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열두째, 주유는 손권의 담량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손권에게 혼자서 호랑이를 잡도록 하고, 시종들에게 도와주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모살에 다름아니다. 여하한 군주라 하더라도 이것은 모반으로 여길 것이다. 너무 심하게 날조하였다.

 

다시 대사문제를 보자. 절반은 문언체에 절반은 구어체이니 아주 실패작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영화 상편을 보면, 전체영화에 무슨 영혼이 있을 것같지 않다.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자는 것인가? 유비관우장비의 형제애인가? 조조의 잔혹함을 비난하자는 것인가? 손권의 성장을 서술하자는 것인가? 주유의 영웅스런 모습을 찬양하자는 것인가? 아무 것도 아닌 것같다.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이외에 적벽지전은 겨울에 발생했다. 강에는 찬바람이 불어서 뼛속까지 시렸다. 이런 기후가 전쟁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전혀 반영되어 있지도 않다. 물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정치하지 못하다.

 

당연히 이 영화에도 뛰어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조선박이 강을 가득채우고 내려올 때, 비록 특수효과가 그다지 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위력은 있었다. 조조가 선박에서 "구룡구합제후를 거느리고..."를 읊을 때, 카메라가 신속히 멀어지면서, 전체 선단을 찍은 것은 괜찮았다. 영화에서의 복식도 괜찮은 편이다. 앞 이마를 가운데서 둘로 가른 것은 서한식이다. 사병들의 사모도 서한식이다. 양릉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책(赤, 붉은 머리싸개)은 없었다. 어떤 병사는 목을 보호하는 갑주를 둘렀는데, 마치 서주 사자산 하노왕묘에서 출토된 노병과 비슷하다. 이것도 서한식이다. 소교가 입은 의복은 전국시대 초나라식이다. 꽃무늬는 모두 강릉마산의 초나라묘에서 출토된 직거의의 꽃무늬이다. 동한말기의 복식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동한의 도용은 서한만큼 많지 않다. 화상벽돌의 머리모양도 불분명하다. 서한과 전국시대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아 썼을 수도 있다. 조조가 손권에게 보낸 서신에서 죽간위에 쓴 글자체는 한간(漢簡)의 것과 비슷하다. 소교와 장비의 글자는 동한의 비각에 쓰여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점은 모두 잘 만든 부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