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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양홍옥(梁紅玉): 기녀장군(妓女將軍)

by 중은우시 2008. 2. 27.

 

 

글: 장계합(張繼合)

 

기녀들은 "홍등가"에서 생활하지만, 그녀들은 "회색계층"이다. 아무리 인기좋은 기녀라고 하더라도, 한때일 뿐이다. 10년이상 가는 경우가 없다.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몸 하나 누일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비록 어떤 기녀들은 기녀생활을 청산하고 양민으로 되돌아오지만, 대부분은 불행하였다. 혹은 잔화패류(殘花敗柳)처럼 버려지거나, 혹은 그저 하루하루 연명할 뿐이다.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여인이 한번 늙으면,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는데, 하물며 진흙탕에서 굴러서 스스로가 깨끗하지 못한 형편이 아닌가.

 

기녀로서 경천동지의 일을 벌이는 것은 어렵다. 다만,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예외도 있다. 기녀도 자신의 남자에 뒤지지 않는 재능을 발휘하여, 창을 휘두르고, 적병에 대항하였다. 그녀가 바로 기녀출신의 여장군인 양송교체기의 양홍옥이다.

 

전통 경극(京劇)에는 <<항금병(抗金兵)>>이라는 극이 있다. 매란방(梅蘭芳) 선생이 '자술'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9.18사변이후, 중국인의 항전투쟁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그는 일부러 양홍옥을 주인공으로 한 경극 <<항금병>>을 만들어 공연했다. 이 새로 만든 역사극은 1933년, "상해천섬무대"에 등장한다. 매란방은 아주 감격하여 회고하기를: "나는 일본침략에 반대하기 위하여, <<항금병>>의 양홍옥을 연출했다. 내가 북을 다 치고나서, 산을 내려가 금나라병사와 맞싸울 때, 마치 항일전선의 전초기지같았다..."이로써 볼 때 양홍옥이라는 기녀출신의 '장군'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정신적인 우상이었다. 기녀면 어떤가? 그녀의 애국심은 여전히 천년간 칭송을 받아왔다.

 

양홍옥은 회안 초주사람이다. 송휘종 숭녕원년에 태어났으니 바로 1102년이다. 그리고 1153년에 사망한다. 비록 집안이 죄인집안이어서 가난하게 살았고, 심지어 팔려가서 기녀가 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부친과 조부는 모두 대송의 장수출신이었다. 그저 방랍의 난을 평정할 때, 전투시기를 놓쳐서 둘 다 목이 달아났다. 가정의 영향으로, 양홍옥은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혔다. 그녀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얕보아서는 안된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서 장수의 기초를 다졌다. 그녀는 원래 장수의 기질이 숨어 있었지만, 세상을 잘못 만나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당세의 영웅호걸인 한세충(韓世忠)을 만나서 그녀의 영웅으로서의 유전인자가 발휘되게 된다.

 

<<송사>>에는 양홍옥의 남편이며 양송의 명장인 한세충의 전기가 실려 있다. 이 연안(延安) 출신의 사나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이 번개같았다. 일찌기 다른 사람보다 용감하고, 말을 잘 탔다. 집안이 가난하여 재산은 없었지만, 술을 좋아하였다. 나이 18세가 되어, 군에 들어갔고, 용감하기로 군대내에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전투를 좋아했고, 구속을 싫어했다. 그는 화류계에서 양홍옥을 만난다. 당시 양홍옥은 집안이 가난하여, 기원에 흘러들어왔으며, 그녀는 경구(京口)에서 "영기(營妓)"로 있었다. 즉, 주부에서 직할하는 관방기원이었다. 양홍옥은 화장을 예쁘게 하였지만, 보통 기녀에게서 볼 수 있는 화장기는 없었고, 그녀는 당대영웅을 흠모했다. 그녀는 사내기가 없는 플레이보이들은 본척도 하지 않았다.

 

방랍의 난을 평정한 후, 조정은 군사들을 위로하였고, 경구의 "영기"는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한세충과 양홍옥은 한번 만나서는 서로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당시 한세충은 아직 군대내에서는 하급관이었다. 그녀를 보살필만한 여력이 없었다. 나중에 권한이 커진 이후에 비로소 양홍옥을 처로 맞이하였다. 이 부부는 "투항파(投降派)" "구화파(求和派)" "기장파(騎墻派, 담장에 걸터앉은 파. 즉, 이쪽 저쪽에 모두 다리를 걸치는 사람들)"들이 득세할 때, 오로지 금나라와의 전투에 골몰했다. 가장 유명한 전적은 바로 매란방 선생이 공연한 그 <<항금병>>이다. 송고종 건염4년(1130년)에 한세충과 양홍옥은 명을 받아 경구를 지켰고, 금나라군대와 황천탕에서 싸우게 되었다. 양홍옥은 친히 북을 치면서 전투를 지휘했고, 8천의 정예병을 이끌고 금올술(金兀術)의 10만군대를 황천탕에 몰아넣는다.

 

금올술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한세충과 양홍옥은 서로 약속을 하고, 처인 양홍옥은 중군의 누선에서 지휘를 하고, 남편은 병사를 이끌고 금나라군대를 가로질러 공격했다. 불꽃이 하늘로 치솟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와중에 양홍옥은 태연자약하게 적의 사정을 살피고, 전투를 지휘했다. 그리고, 한세충과 그 부하들이 기운을 내도록 북을 두드려 기세를 돋구었다. 생사는 일찌감치 신경쓰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적군을 죽이고, 승리를 얻고자 하였다. 한 여인의 역량으로 송나라군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게 되었다.

 

황천탕의 전투에서 송나라군대는 승리한다. 일세를 풍미하던 금올술은 하마터면 그곳에서 목숨을 날릴 뻔하였다. 역대전쟁에서 피해자이건 반항자이건 모두 여성을 비켜가지 않았다. 아무도 양홍옥이 기녀인지 아닌지에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더더욱 그녀의 불행한 과거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이다. 영웅은 출신을 묻지 않는 법이다. 그저 나라를 위하여 백성을 위하여 시대적인 의미가 있는 큰 일을 했다면, 중국인들은 시녀를 위하여도 "사당"을 만들고 매년 향을 사르며, 대대로 이어갈 것이다.

 

한세충이 관직을 그만둔 후에 양홍옥과 함께 서호로 돌아갔다. 1151년, 한세충이 병사하고, 2년도 되지 않아, 양홍옥도 세상을 떠난다. 부부는 소제의 영암산아래 합장된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송효종은 비석과 사당을 세워 그들을 기념하게 한다. 양홍옥의 고향사람들도 이 여중호걸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에 사당을 지었고, 그녀의 상을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