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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북경의 외국인은 어디에 사는가?

by 중은우시 2008. 9. 10.

글: 황영명(黃永明)

 

2005년 3월, 새로운 슈쉐이제(秀水街, Silk Street)시장이 오픈되었다. 당시 수도경무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러시아 아가씨인 알류나는 아르바이트로 가게에서 일을 했다. 슈쉐이제와 야바오루(雅寶路)일대에는 러시아 상인이 매우 많고, 알류나는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할 줄 알기때문에, 실크장사하는 사장이 그녀를 흔쾌히 고용했었다.

 

 

 

 

위 지도에 그려진 장소들은 외국인이 북경내에서 거주하는 대체적인 지역이다. 경순로(京順路)의 연선과 온유하(溫楡河)의 일대에는 빌라들이 비교적 분산되어 분포되어 있고, 미치는 지역이 아주 넓다. 그래서 이쪽 지역의 범위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이외에 일부 분포권은 특정한 나라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다오커우(五道口)의 유학생권에는 한국유학생이 비교적 많다; 옌샤(燕莎), 캠핀스키(Kempinski)호텔은 구미권중에서도 독일인이 많다; 경순로의 연선에 있는 구미권중에는 미국인들이 많다.

 

산리툰(三里屯)의 바에는 외국인들이 모인다. 북경의 오락생활은 아주 풍부하다. 이것이 �은 외국인들을 많이 끌어들이는 이유중 중요한 하나이다. 한 국제리서치보고서에 의하면, 아시아지역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거주하고 일하기를 좋아하는 도시중에서 북경은 10위였다. 중국대륙에서는 유일하게 랭킹10위안에 든 도시이기도 했다.

 

북경 우다오커우 일대에는 많은 상점들의 간판이 세 가지 문자로 되어 있다: 중국어, 영어, 한국어. 중국인이 이곳에 들어온다면 길을 묻는데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깨를 부딛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왕왕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곳은 1/3이 중국인, 1/3이 백인, 1/3이 한국인이다. 어떤 사람은 이곳에 오면 유엔에 온 것같다고 한다. 미국인, 한국인, 일본인, 러시아인 그들은 왜 북경을 선택했을까? 고향을 떠나서 북경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Alexander Brenner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던 그는 북경의 지하철에서 처음 북경에 놀러온 헤이룽장(黑龍江)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여러분이 수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러나, 헤이롱장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바로 반박하는 말을 했다: "당연히 우리가 당신을 환영해야지요. 당신이 우리를 환영할 것이 아니라" 확실히 이들 헤이룽장 사람들은 북경에 관광올 때, 노란머리에 하얀피부를 가진 외국인이 그들을 환영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Brenner는 약간 기운이 빠졌다. 그는 이미 중국에서 7년을 생활했고, 북경에도 4년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라오와이(老外, 외국인을 지칭)'로 취급받고 있다.

 

Brenner는 미국인이다. 청화대학 옆에 거주하고 있고, 자주 중국과 외국의 유명한 매체에 평론을 기고하고 있다. 그는 북경의 생활에 융화되고 싶다.

 

북경의 유혹

 

Brenner는 처음에 남경을 갔다가 다시 광주로 내려갔었다. 그는 중산대학에서 2년간 영어교사를 지냈다. 그후에 북상하여 북경에서 한번 지내기 시작하자 4년이 흘러갔다. 그는 지금까지도 광주의 풍물과 인정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왜 북경을 선택하였냐고 묻자, 그는 "너도 북경을 선택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북경은 라오와이가 보기에 똑같이 기회의 땅인 것이다.

 

"기회"는 라오와이에게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자아를 실현하는 하나의 길이기도 하고, 그것은 광활한 시장과 더욱 큰 이윤일 수도 있다. 그것은 물론 어여쁜 중국아가씨가 될 수도 있다.

 

북경에서, Brenner와 같은 외국인은 아주 많다. 2002년에 이미, 외국인이 북경에서 취업증을 받은 사람이 2만명을 넘어섰다. 2006년에 북경에서 거주한지 1년이상되고, 정당한 직업을 가진 외국인이 65000여명이다. 그 중에는 7000명에 이르는 외국대사관,영사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가족은 빠졍ㅆ다. 이들 외국인들은 대부분 일본, 한국, 유럽, 미국, 러시아, 싱가포르등의 국가에서 왔다. 그들은 주로 전자, 무역등의 분ㅇ에 종사하고, 외자 ,합자, 삼자기업에서 중요한 기술과 경영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분은 교사, 요리사등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해외회사에서 중국에 파견되어온 고위관리직의 연봉은 100만달러이상이다. 일부 국제적으로 유명한 투자회사의 고위관리직의 연봉은 200만달러를 초과하기도 한다.

 

적지 않은 중국기업도 고급인재를 유치하기 위하여,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보통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엄청난 급여를 제시한다. 많은 직장에서의 보수수준과 대우는 심지어 국외의 경쟁업체보다 높기도 하다. 오동나무가 있으면, 봉황이 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일반 민영기업도 외국인을 채용하려고 한다. 외국인을 채용하는 것은 회사에 간판을 하나 붙이는 것과 같다: 유명한 중국회사만이 외국인직원을 채용할 능력이 된다. 비록 이들 외국인들은 일반직원이지만, 수입은 동등한 경력의 동료들보다 2배이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북경에는 이미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외국기업의 중국인원이 유려한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하지만, 중국어를 말할 줄 모르는 외국인은 중국기업에 취업할 수 있다.

 

북경에 온 외국인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면서, 그들간에 차이가 날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벤츠를 몰고, 큰 아파트에 살며, 기본적으로 뭐든지 살 능력이 된다" 당연히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이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생활에서 매일 '벤츠를  몰고, 클럽에 가며, 골프를 칠 수'는 없다. 그들도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바쁘다. 그러나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원래 출발점이 높으므로, 북경에서도 손쉽게 생존해간다. 그들이 살아가는 기능이 겨우 영어일지라고, 그들은 여전히 각급학교에서 교사직을 얻을 수 있고, 중국내에서 체면이 상하지 않을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점은 외국어교육시장이 방대한 북경에서 더욱 손쉽게 나타난다.

 

강력한 경제성장과 충분한 취업기회이외에 가격대비성능이 뛰어나다는 점도 외국인들을 끌어들이는 힘이다. 북경에 거주하는 한국인에 따르면, 한국에서 보모를 고용하려면, 인민폐로 매월 8000위안정도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조선족 보모를 채용하는데 800위안을 들이면 된다. 비록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일하면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적게 벌지만, 중국에서 매월 3만위안을 벌면, 2만위안을 저금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라면 8만을 벌더라도 대체로 8만을 다 써버리게 된다. 하나의 더욱 직접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가려면, 개략 인민폐 1000위안이 든다. 일본동경에서는 이 비용이 개략 2000위안이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100위안이하이다. 일본인이 북경에 오면, 나다닐때마다 미친듯이 '택시'를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들이 보기에 북경의 택시비용은 너무나 저렴하기 때문이다.

 

북경안의 외국인마을

 

러시아상인인 안드레이는 중국에서 13년을 생활했다. 그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入鄕隨俗)'는 말을 많이 한다. 그는 북경통의 어투로 북경에서 생활하는 외국인의 상황을 설명한다: 과거 십여년동안, 주택의 다원화추세는 아주 명확하다. 외국인들은 이미 풍부한 선택의 여지를 지니고 있다.

 

북경주택중개업소인 '아애아가(我愛我家)'에 따르면, 이런 다원화된 선택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세계500대기업, 금융 혹은 증권회사의 사장, 부사장이 거주하는 고급호텔식아파트 혹은 고급별장; 외자기업의 중고급관리직 인원이 사는 고급아파트, 별장과 최고급주택; 외국기업의 중하급관리직, 북경주재기자, 외국유학생, 교육사업종사자 및 기타 외국인 주택임차인들이 거주하는 고급아파트, 별장 혹은 보통 아파트, 민간주택.

 

외국인이 임차하는 인기있는 지역은 대체로 상권내이거나 상권에 인접한 지역이다. 동삼환(東三環) 일대에 개략 80%의 외국회사와 상사가 밀집되어 있다. 예를 들면, 구오마오(國貿), 옌샤, 량마(亮馬), 대사관구역...이곳이 외국인에게 인기있는 임차지역이다.

 

확실히 상당한 부분의 외국인은 북경에 온 목적이 사업이다. 미국천연제품협회의 수석대표인 제프리는 북경에 온지 3년이 되었는데, 주택을 3번 바꾸었다. 싸이터(賽特), 양광100(陽光100)을 거쳐 최근에는 조양공원 근처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와 같이 자주 출장다니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에 있어서 거주지의 선택은 가격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가급적 회사에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북경의 심한 교통체증으로 도로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생명을 낭비하는 것같다.

 

수도국제공항에 인접한 경순로 연선, 온유하 일대의 별장에도 많은 구미가정이 모여 산다. 이들 비지니스인사들은 가족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그들은 고향에 거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를 원한다: 큰 집, 큰 정원.

 

구미인들은 보통주택지역에 섞여 사는 것을 좋아한다. 제대로 북경의 맛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Brenner는 북경의 동네에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어 좋아한다. 이런 것은 미국의 고향집에서는 없는 것들이다. 그는 정원에서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고, 노인, 아이들과 얘기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저녁때쯤에 북경의 후통(골목)에서 노천바베큐를 즐긴다. 그것은 서방의 바(bar) 문화와는 또 다른 생활방식이다.

 

슈쉐이제, 야바오루 일대에는 소상품을 도매하는 동구와 러시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북경에 상주하는 외국인은 아니다. 그들은 왕왕 북경에 며칠간 머물면서, 상품을 마련한 후에는 총총 떠나버린다. 안드레이는 최근 몇년동안, 야바오루의 러시아 상인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한다. 안드레이는 야바오루의 장삿꾼들이 러시아인을 대표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북경에 와서 상주하는 러시아상인은 실제 분산되어 있고, 상호간에 왕래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업종이 다르고, 공동의 화제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러시아회사중에서 중국에 세운 큰 회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해전구에 위치한 상디(上地)정보산업기지에는 IT업종에 종사하는 인도인들이 많다. 동북삼환과 사환의 사이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흩어져 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일대에는 많은 일본계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왕징(望京), 우다오커우, 중관촌에는 대량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공업생산, 식당 및 상점을 개설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들 지역은 '모두 한국인들에게 점령당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의 <<조선일보>>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1999년부터 북경의 동북부인 왕징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현재 북경의 택시기사들에게 '왕징으로 가자'고 말하면, 그는 아마도, '한국인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왕징은 확실히 '한국촌'으로 되어 버렸다. 그것에는 심지어 중국어를 말하지 못해도 된다. 한국어만 할 줄 알면 살아가는데 지장이 업다. 한국의 주중국협회의 예측에 따르면, 북경올림픽이후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수는 '백만명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현재 북경 왕징지구에 사는 한국인만 6만명이다. 그중 60%는 사업가이고, 20%는 유학생이다.

 

한국인들은 요란한 것을 좋아하고, 함께 뭉쳐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의 북경이웃들은이 어떤 때는 너무 시끄럽다고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북경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인상은 완전히 반대이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매우 조용하고, 많은 경우 옆에 일본인 이웃이 사는지도 못느끼게 된다고 한다.

 

통계에 따르면, 북경에서 일하거나 공부하여, 주택을 임차할 수요가 있는 외국인수는 개략 15만명이라고 한다. 임차하는 외국인외에 중국에 와서 돈을 번 사람들은 집을 사기도 한다. 요구가격이 수천만위안 내지 1억위안을 넘는 사합원도 그들에게는 문제되지 않는다.

 

서방인들은 부동산을 살 때, 관심을 가지는 문제가 이웃이 누구냐는 점이다. 이웃의 소질이 높고 낮은 것이 집값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이다. 이는 아마도 어떤 측면에서 조양공원 부근의 호화아파트에 왜 외국인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다만, 어떤 점은 서방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고급지역에 살면, 왜 보안요원들이 경례를 붙일까? 이곳이 군대막사인가? 생활지역에 경비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미소만 보내주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래야 외국인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북경은 점차 외국인들이 주택을 선택할 때 나라별 특징이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럽에서 온 외국인은 임차주택의 품질에 대한 요구조건이 비교적 높다.특히 북유럽국가 혹은 독일에서 온 외국인들은 임차가옥의 세부적인 품질요구가 아주 명확하다. 예를 들어, 바닥, 수도꼭지등의 '작은' 문제까지도 포함된다. 아마도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하나하나 살펴볼지도 모른다. 미국인들은 문화적인 분위기를 좋아하고, 인기있는 지역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

 

북경의 희노애락

 

Brenner는 우다오커우 부근에 대량의 외국인이 모이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것이 청화대학, 북경대학, 북경어언대학등 여러 대학들이 부근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많은 외국유학생들이 학교밖의 임차거주지로 이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현재 북경시에는 약 6만명의 외국유학생이 공부하고 있는데, 북경의 외국인인구중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안드레이의 아들인 주니어 안드레이는 중국인민대학 금융전공의 2학년생이다. 그는 7살때 부모를 따라 북경으로 왔고, 세계에서 제일 큰 대사관인 러시아 주중국대사관에서 개설한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2006년에 인민대학의 국제유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유학생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북경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부친의 차를 몰고 우리를 집에 데려다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출입국관리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2006년에 북경에 온 외국인은 약 290만인/차이다. 현재, 북경에 상주하는 외국인은 약 11만이다. 매일 실제로 있는 외국인은 아마도 20만정도일 것이다. 대부분의 외국인은 조양구와 해전구에 살고 있고, 동성구와 숭문구에도 분포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는 순의구와 서성구이다.

 

취재과정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던 것은 북경은 국제화대도시로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대도시의 외국인국적인구비율은 5%, 8%, 15%, 20%등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만일 북경의 총인구를 1700만명으로 본다면, 5%로 계산하더라도, 북경에는 85만명의 외국인이 있어야 비로소 국제화대도시가 될 수 있다. 이 숫자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중국은 이민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이민국가만이 '민족의 용광로'와 같은 도시가 출현하기 쉽다. 다만, 하나의 도시가 외국인의 숫자만을 가지고 국제화대도시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소프트웨어가 그 기준에 도달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북경은 더욱 개방적이고 더욱 포용적이어야 한다.

 

지금은 안드레이가 컴퓨터판매회사에 전화를 걸어 노트북PC의 가격을 물어볼 때, 전화기 건너편의 북경사람은 가격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어디 사람이냐'는 것을 먼저 묻는다. 안드레이가 자신이 러시아인임을 밝히면, 상대방은 바로 '너 중국말 정말 잘한다'는 말을 한다. 안드레이는 이 점에 있어서 북경사람은 상해사람과 확실히 다르다고 한다. 상해사람은 처음에 가격부터 제시하지, 상대방이 어디 사람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아마도 북경에 십여년 살았지만, 이때는 자신이 역시 외부인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같다.

 

또 다른 측면에서, 더 많은 외국인들은 안드레이처럼 북경에 편하게 적응하지 못한다. 북경의 생활은 그들에게 새로운 경험이고, 문화충돌에서 다소간 곤혹을 느낀다: 중국인은 왜 뭉쳐있기를 좋아할까? 중국인들은 말할 때 왜 그렇게 완곡하게 돌려서 할까? 중국인들은 왜 다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캐묻는 것을 좋아할까?

 

제프리선생은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로 결정했다: "사업의 배후에 있는 광활한 중국문화에 융합되려면 스스로가 어려서부터 보던 인식의 각도를 가지고 다른 문명을 대하여서는 안된다.바꾸고 나면 북경의 생활은 따뜻하며 편안하다. 도전도 재미있다" 비록 사업가이지만, 제프리는 미국상인들처럼 그저 말로만 장사를 하지 않는다. 그는 적극적으로 중국친구를 사귀고, 심지어 사업파트너도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그가 이미 중국에서 처세하는 방법을 익혔다고 한다. 제프리는 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만일 내가 여전히 미국에 있었다면, 매일매일이 모두 당연한 일들로 꽉 차있을 것이고,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