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지력(屠知力)
중국공산당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중국공산당 제1차전당대회의 참가자가 모두 15명이며, 그중 중국인 참석자가 13명이며, 코민테른의 대표가 2명(마린과 니콜스키)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15명중에서 14명의 이력, 사진, 인생역정은 모두 분명하게 알려져 있다. 오로지, 니콜스키는 수수께끼였다. 누구도 그의 모습이나 그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86년전에 상해 망지로 16호(지금의 흥업로 76호)를 찾아온 러시아인은 코민테른 극동서기국의 대표였고, 정중하게 중국으로 파견되어 중국공산당의 건립을 도와주었고, "제1차전당대회"에서 중요한 발언과 건의를 한 바 있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한번 나타났다 사라져버렸다. 행적이 묘연해졌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역사학자들도 "잊혀진 중공1대 참가자"라고 불렀다.
그래서, 상해의 중공1대회지(中共一大會址)기념관 제3전시실에 15명의 참석자를 소개하는 벽면에 14명의 사진은 크게 걸려 있으나, 유일하게 니콜스키에 이르러서는 빈 칸으로 남아 있어서, 관람하는 사람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역사의 공백은 최근에야 메워지게 되었다. 러시아, 몽고 양국 학자의 부단한 노력으로 거의 동시에 니콜스키의 사진과 인사기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중국공산당사연구가들은 이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중공중앙 당사연구실 부주임이자, 저명한 당사이론전문가인 이충걸 교수는 러시아, 몽고학자에게 감사하며, 중공일대회지기념관의 부단한 노력에도 감사했다. 중국의 이대조연구회부회장이며 중국당사학회상무이사인 장정여 교수도 "정말 중요한 발견이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흥분했다. 해방군후근지휘학원의 교수이며 국가사회과학원 규획학과조의 구성원이고, 중국당사학회 상무이사인 소유정 소장도 이 소식에 매우 기뻐하며 중요한 성과라고 강조했다.
중공일대회지기념관 관장인 예흥상, 부관장인 장소홍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니콜스키의 사진이 걸려있어야 할 곳이 공백으로 남아있는 것은 중공일대회지기념관의 "심병(心病)"이었다. 그들은 부단히 노력했다. 예흥상에 따르면, 1980년대에 외교경로를 통하여, 당시 소련공산당 총서기인 고르바초프에게 찾아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이 소식은 소련측의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의 저명한 중국문제전문가이며 러시아과학원극동연구소의 연구원인 카르투노바는 글에서 "1987년, 소련공산당 중앙의 한 서기가 중공중앙의 초청으로 중국방문을 하였다. 귀국후에 그는 소련공산당중앙의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에 임무를 하달했는데, 중공일대참가자인 니콜스키의 생전자료와 사진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카르투노바는 이 '수수께끼풀기'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녀가 여러 측면으로 노력했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고, 실질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작년에서야, 카르투노바는 러시아연방안전국 중앙자료관의 도움하에, 니콜스키의 전설적인 경력을 알게 된다.
원래, "니콜스키"는 군인출신인 블라디미르 네이만 아보라모비치의 가명이었다. 그는 1889년에 태어나, 1921년에 러시아공산당 볼세비키 당원이 되었다. 불행한 것은 1938년, 그는 '간첩죄'로 체포되어, 하바로브스크에서 처형되었던 것이다. 1956년, 소련최고법원 군사위원회는 그를 복권시켰다.
니콜스키의 생전행적이 드러났지만, 그의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었다. 열정적인 카투노바교수는 극동과 시베리아의 자료관과 연구자들에게 요청하여, 일단 니콜스키의 사진이 발견되면 자신에게나 중공일대회지기념관에 보내주라고 요청했다.
올해 6월 29일, 한참 더운 때, 전기가 마련되었다.
작은 비가 내리는 와중에 러시아에서 온 참관자인 극동국립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알렉세이 부아코프는 기념관의 책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니콜스키의 사진을 건네주었다.
장소홍은 이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놀라면서 한편으로 기뻤다. 바로 달려와서 이 손님을 맞이했다.
원래, 알렉세이는 작년에 상해로 와서 "중공일대회지기념관"을 참관하였다. 당시 동포인 니콜스키의 사진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는 탄식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중공일대 참가자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알렉세이는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결심하고 돌아간다.
원래, 카르투노바 교수와 마찬가지로, 그도 니콜스키의 독특한 인생과 수수께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행방을 계속 찾아왔다. 니콜스키가 일한 적이 있는 몇몇 변방지역의 자료관에 서신을 보내 물어보기도 하였으나 전혀 소득이 없었다. 러시아의 관련부서에서 니콜스키의 생전행적을 단서로 하여 찾아보기로 하고, 아무스크주의 자료관에 물어보았다. 이 서신을 보낸지 2개월후에 마침내 기다리던 회신이 왔다. CD안에 두 장의 사진이 있었다. 하나는 니콜스키의 인사자료표지이고, 다른 하나는 니콜스키 본인의 두상이 있는 이력서였다. 자료관에는 니콜스키에 관한 수십페이지의 자료가 있다고 했고, 그의 본명과 가명에 대하여 모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스스로 쓴 글에 상해로 가서 일한 적이 있다고 적혀 있다고 했다.
장소홍은 알렉세이가 보여준 니콜스키의 사진을 응시했다. 표정이 엄숙하고, 눈에는 우울함이 깃들어 있는 중년인이 과연 니콜스키인가?
바로, 기념관장인 예관장은 알렉세이교수를 식사에 초대했다. 식사도중에 알렉세이는 수수께끼해결과정을 털어놓았다. 그후 기념관의 요청을 받아 두 장의 니콜스키 사진이 있는 자료를 찍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의문이 완전히 해결되었다. 니콜스키가 결국 나타난 것이다.
다만, 사학연구방법에 정통한 예관장과 장부관장은 여전히 걱정이 있었다. 알렉세이가 제공한 것이 고증(孤證)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학계에서 인정해 줄 것인가.
생각도 못하게 두달 차이를 두고,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8월, 내몽고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그들도 니콜스키의 사진을 찾은 것이다.
원래, 2001년, 몽고인민당의 한 책임자가 상해의 "일대"기념관을 찾았는데, 니콜스키의 사진이 없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몽고에서 코민테른의 역사를 연구하던 저명한 학자인 다시다바에게 물어보았다. 니콜스키사진을 찾을 수 없는지?
2005년, 다시다바는 중국의 후허하오터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가했고, 중국학자들로부터 같은 요청을 받았다.
그리하여, 2006년 4월, 9월, 10월 다시다바는 러시아를 다녀오면서 니콜라스와 관련된 자료관 ,박물관에서 대량의 자료를 찾았다. 니콜라스의 생전행적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본인사진은 찾기 어려웠다. 그의 친구인 라 보 쿠르스가 아무스크주의 전문자료관에서 니콜라스의 두장의 사진을 찾아주었다.
다시다바는 아주 기뻤고, 즉시 중국친구들에게 통지해주었다. 그리고 9월에 상해의 기념관으로 와서 두 장의 진귀한 사진을 건네준 것이다.
9월 12일, 다시다바가 사진을 꺼내는 순간 예관장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알렉세이가 건네준 것과 과연 동일한 사람의 사진일까?
그는 한번 훑어보고는 바로 격동했다. 두 장의 사진 중에 한 장이 알렉세이가 제공한 1930년대 니콜스키사진과 똑같았던 것이다. 또 다른 한 장은 새로운 것이었다. 이것은 니콜라스가 1920년대에 찍은 사진으로 중공1대에 참가하기 훨씬 전의 모습이었다.
예흥상과 장소홍은 결국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는데 흥분했다. 중국공산당의 창건사는 이로써 완전해 진 것이다. 더욱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니콜라스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현재 상해 흥업로의 기념관 전시실에는 86년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한가지가 마침내 해결되었고, "니콜스키"라는 가명을 썼던 코민테른 대표는 관람객들에게 미소띤 모습으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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