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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해외투자

중국의 첫번째 해외경제특구

by 중은우시 2008. 6. 29.

 

 

글: 광주일보 2008년 6월 10일자

 

모리셔스는 중국기업과 중국인들이 아프리카로 진입하는 지역본부기지가 되고 있다.

 

많은 중국인들에게 모리셔스는 "그저 이름은 들어봤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나라이다. 실제로, 모리셔스는 마다가스카르의 동쪽 800킬로미터의 남인도양상에 있는 작은 하나의 섬일 뿐이다. 면적은 겨우 2000평방킬로미터로, 개략 광저우의 1/3정도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작은 섬에, 5월초, 중국전국정협부주석 겸 전국공상련주석인 황맹하(黃孟夏)가 방대한 대표단을 이끌고 찾아왔다. 대표단은 상무부의 고위관료를 포함하고 있었고, 탁월한 실적을 낸 중국기업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대표단은 특히 모리셔스에 있는 "천리경제무역합작구(天利經濟貿易合作區, MIET)를 시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역구는 현재 "중국의 첫번째 해외경제특구"로 건설되고 있고, 황맹하 일행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리고 모리셔스정부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모리셔스정부는 MIET를 활용하여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로 발전하고자 하고 있다.

 

실제로 모리셔스는 중국기업이 아프리카 대륙으로 진입하는 도약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모리셔스에 등록한 중국기업은 이미 3000여개에 이른다.

 

"왕군하들"의 노동력우세

 

5월초의 어느 아침 9시, 36세인 왕군하(王軍霞)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천리방직공장에 출근했다. 서안시 국면6공장(國棉六廠)의 해직여자노동자로서, 하는 일은 그녀가 17세때부터 시작해온 아주 익숙한 일이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이 공자은 천산만수 바깥의 모리셔스에 있다는 점이다.

 

다른 5000여명의 중국에서 온 방직여공과 마찬가지로, 왕군하도 이 서남인도양상의 동아프라카 나라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몰랐었다. 만화영화 <<마다가스카르>>를 본 적이 있는 아들이 지도를 들춰본 후에 그녀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 곳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양상에 있다고.

 

천리집단(天利集團)의 동사장인 장홍운(張洪運)이 보기에 이들 여공은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고, 착실하게 일을 한다. "현지 노동자들처럼, 4시 30분만 되면 퇴근"하지도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지노동자는 1달 심지어 1주일에 한번씩 급여를 받고자 하며, 급여를 손에 넣은 후에는 일반적으로 다 쓰고나서야 다시 출근한다. "그러나 우리의 이 여공들은 한번 계약하면 3년이다. 한편으로는 안정되고, 다른 측면으로는 비행기표가 워낙 비싸서 매년 돌아가려면 여공들이 감당할 수가 없다"

 

먹고 자는 것은 모두 책임져주고, 마지막으로 귀국하는 비행기표를 준다. 2년간 와서 일하면, "왕군하들"은 10만위안 가량의 수입을 얻을 수 있다. 이전의 해직노동자로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그녀는 아주 만족한다. 비교적 극복하기 힘든 것은 가족 특히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다. 모리셔스에는 작은 카지노가 있고, 하루 저녁을 놀아도 별로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들은 거의 가지 않는다.

 

"왕군하들"이 제공한 노동력의 우세를 이용하여, 천리집단은 모리셔스에서 사업을 점점 크게 벌이고 있다. 1997년에 성립된 천리집단의 주업무는 수출무역이다. 원래 방사(紡紗)의 수출은 주로 홍콩의 회사들과 거래했다. 나중에 무역상대방이 모리셔스에와서 공장을 열면서 관련사업도 함께 가져왔다.

 

개별 유격병사를 묶을 방안을 찾아서

 

5월 5일 오전, 전국공상련주석인 황맹하는 대표단을 이끌고, 상무부등 여러 부서에서 참가한 중-아프리카경제무역고찰단이 모리셔스의 천리경제무역합작구를 시찰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두바이에서 온 중국기업가들이다.

 

마크 트웨인은 "하느님은 분명히 모리셔스를 먼저 만들고, 그 후에 모리셔스를 본떠서 천당을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것은 계속 현지인들이 관광사업을 선전하면서 써먹는 말이다. 요란한 사막의 꽃인 두바이에서 마침 건기에 처한 모리셔스로 오니, 중국기업가들은 아주 기분이 상쾌한 것같았다.

 

천리집단의 모리셔스발전사와 상대적으로 그들이 더욱 흥미있어 한 것은 중국의 첫번째, "해외경제특구"라는 이름이 있는 천리경제무역합작구의 계획이다. 합작구 자체의 건설은 어떤 투자기회가 있을지, 합작구의 추진은 또한 어떤 사업기회를 가져올지?

 

이들 상인들 중에는 호텔에 투자하는 사람, 골프장에 관심있는 사람, 그리고 아르피가의 곳곳에 발전소를 건설하고 나이지리아의 한 부락추장칭호를 받은 전설적인 인물도 있다.

 

2006년 중-아프리카포럼이 개최된 후, 중국상무부는 아프리카에 몇 개의 시범적인 합작개발구를 추진하고자 계획했다. 예전 심천의 경험을 그대로 복제하여, 일부분 국내에서 과잉인 산업을 이전하고, 군중효과를 발휘하여 아프리카에 돌아다니는 유격병들을 하나로 묶고자 한 것이다.

 

다른 몇 개가 주로 에너지에 치중하여, 국가 '광산채굴단'이 주로 참여하는 합작구와 비교하면, 천리는 민영기업이 모리셔스에서 신청하여 만든 경제개발구로 훨씬 친근하다. 그러나, 보통의 수출가공구의 아이디어는 천리 자신이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원인은 간단하다. 2평방킬로미터 남짓한 개발구단지는 잘 계획해서 써야 한다. 일반적으로 제조업은 부가가치가 낮다. 몇개 더 있든, 몇개 덜 있든 차이는 크지 않다. 이외에 이렇게 아름 다운 곳에 모리셔스에서 제한하지 않더라도 에너지다소비기업, 환경오염기업을 가져와서는 안될 것이다.

 

아프리카 중국기업의 '지역본부'

 

국내에서 기획자문업으로 이름있는 왕지강공작실(王志綱工作室)이 가입한 후, "특구"의 포지셔닝은 "실(實)"에서 "허(虛)"로 바뀌었다. 특구는 모리셔스섬의 특색을 활용한다: 인간천국, 법치낙토, 아프리카근접, 다시 창고보관, 물류, 통관, 세수와 법률서비스의 편리를 이용하고, 모리셔스가 남아프리카, 동남아프리카 두 공동시장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활용하여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려는 중국기업들의 지역본부기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허실이 결합된 서비스형 플랫폼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2만평방킬로미터는 확실히 좁지 않다.

 

그날 오후에 개최된 중-아프리카경제무역합작(모리셔스)포럼에서 아프리카에 여러해 동안 힘을 쏟은 화웨이가 나와서 설명을 했다. 회사가 모리셔스에 후방지원시스템과 재무결산시스템을 건설하기로 한 이유를 설명했다. 화웨이의 선택은 천리집단의 사람들이 만족할만했다. 이들은 모두 계획중인 지역본수기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인 것이다.

 

모리셔스 투자부의 관리가 소개하는 바에 따르면, 현재 모리셔스에 등록도니 중국기업은 3000여개에 달한다.

 

5월 6일, 중-아프리카경제무역고찰단의 기업가들은 모리셔스의 부속섬의 하나인 녹도(鹿島)로 가서 골프를 쳤다. 이 골프장은 전세계에서 아주 이름이 있다고 들었다.

 

전체 섬이 바로 하나의 큰 골프장이다. 바다는 푸르고 모래는 가늘다. 꽃을 붉고 나무는 푸르다. 이 골프장은 전세계의 랭킹6위에 올라 있는데, 사람들에게 세상을 떠나서 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어느 기업체 사장은 '이 곳은 아주 좋다. 지역본부기지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그만두고라도 이 환경이 좋다. CEO 클럽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다. CEO들이 모두 온다면 지역본부도 거의 되지 않겠는가?"

 

3만 중국계주민이 매주(梅州)에서 오다.

 

천리집당에서 파견한 번역인 소정(小丁)은 올해 27살이다. 모리셔스에 온 지 이미 9년이 되었다. 소정은 산동사람이다. 중건집단(中建集團)을 따라 모리셔스로 와서 건축을 했다. 3년후에 프로젝트는 끝났는데, 그는 남기로 결정했다. 현지의 한 건축일을 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나중에는 천리로 와서 일한다. 9년이다. 소정은 아직 자기가 이 곳에 많이 있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모리셔스 현지의 키오와(Kiowa)어는 독학으로 배웠다. 그날 저녁, 기업CEO들은 한 소규모 카지노에서 놀았다. 소정은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탁자를 안배하곤 하는데,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전체 모리셔스행이 원만하도록 하기 위하여 천리에서는 현지의 가이드를 불러서 모든 일정을 따라다니게 하였다. 아시아계의 얼굴이었다. 물어보니 바로 원래는 중국여자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무한대학을 졸업했고, 경력도 상당했다. 1990년대에 친구의 소개로 모리셔스로 왔다고 한다. 무역회사에서도 일하다가 현재는 현지의 여행사에서 가이드를 한다고 한다. 그녀에 따르면, 최근들어 적지 않는 천리의 일들을 맡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 조직된 배낭여행단도 갈수록 늘고 있다는 것이다.

 

소정에 따르면, 그와 그 가이드는 모리셔스의 신중국이민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모리셔스에는 3만여명의 청나라때 이민온 후대가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조적(祖籍)이 광동성 매현(梅縣)이다. 지금까지도 모리셔스의 수도인 Port Louis를 중국어로 표준어인 성로이(聖路易)가 아니라 광동어발음을 따서 파루(波累)라고 하고 있다. 소정의 얘기에 따르면, 중국과 모리셔스의 경제무역은 날로 번성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 "두가지 언어를 모두 다하는 인재"들의 몸값은 갈수록 오를 것이다.

 

모리셔스는 이민섬이다. 68%의 주민은 인도파키스탄 후에이다. 중국에서 온 여자 가이드도 바로 인도계의 후손과 결혼했고, 아주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유일하게 골치아픈 것은 바로 매일의 식사문제이다. 두 사람의 입맛을 맞추기는 정말 쉽지 않다고 한다.

 

300개의 등록기업을 '도약대'로 만든다.

 

5월 7일 오전, 중-아프키라무역시찰의 모리셔스행은 일정이 대체로 끝났다. 기업가와 기자들은 일부는 귀국하고, 일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갔다.  이때, 중국의 의류, 신발업계에서 온 사장들이 기업가들이 묵고 있던 호텔에서 체크인 수속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 와서 천리와 합작구에 창고를 건설하는 일을 추진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계무역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일 양만 충분하다면,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해도 괜찮다고 했다. 왜냐하면, 모리셔스에서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은 6000여항목이 관세를 면제받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리셔스에서는 자주 중국인을 볼 수 있다. 장미방(張美芳)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딸, 며느리와 함께 천리경제무역합작구에서 공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장미방은 흑룡강에서 왔는데, 실제로는 복건사람이다. 단지 자주 하얼빈에서 장사를 하였다. 현재는 흑룡강성복건상회부회장이다. 금년 구정기간에 장미방은 처음으로 모리셔스에 투자기회를 찾아서 왔다. 1달을 머물렀는데, 식품업종에 대하여 깊이있게 시장조사를 한 후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5월에 모리셔스에 다시 왔는데, 장미방은 생산설비를 가지고 왔다. 동행한 사람은 십여명의 기술자들이었다. 100여만위안 인민폐의 투자는이렇게 빨리 결정된 것이다.

 

실제로, 모리셔스는 중국기업이 아프리카고 진입하는 도약대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모리셔스에 등록된중국기업은 이미 3000여개에 이르렀다. 이런 기초가 있으므로, 모리셔스의 이 중국 첫번째 해외경제특구는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거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모리셔스정부도 들어 있다. 모리셔스정부의 부총리 겸 재정부장 라마 시타난은 중국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명확하게 말했다. 그는 모리셔스가 천리경제무역합작구의 산업구조조정을 통하여 아프리카의 싱가포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모리셔스:

 

인도양서남부의 섬나라. 서쪽으로는 마다가스카르와 8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동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4827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해안선의 연장길이는 217킬로미터이며, 아열대 해양성기후에 속한다. 여름, 겨울의 두 계절이 있고, 일년내내 무덥다. 연히지구의 연평균기온은 25도이고, 중앙고원은 20도이다.

 

원래 황도(荒島)였으나, 1598년 네덜란드인이 통치하면서, "모리셔스"라고 불렀다. 1715년 프랑스가 점령하면서 "프랑스섬"으로 고쳤다. 1814년 영국식민지로 되면서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이후 영국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에서 대량의 노예, 범죄인들을 이곳으로 보내어 개간했다. 1968년 3월 12일 독립을 선포하며, 군주입헌제를 실시한다. 영국여왕이 국가원수였다. 1992년 3월에 공화국으로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