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담가(談歌)
허영(虛榮)은 인류공동의 기본성격의 하나이다. 중국인도 가지고 있고, 외국인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모태로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것은 질투, 나태, 거짓말등등의 나쁜 버릇과 같이, 누구도 피할 수 없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성품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극력 자기가 가진 성품을 부인하기도 한다. 생활하면서, 우리는 자주 이런 고백을 듣는다, "나라는 사람은 정말 조금도 허영이 없습니다" "나는 허영심이 정말 없습니다" 말은 잘하지만, 하늘에 땅에 맹세를 하지만, 이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허영이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가진 것이다. 그저 다소, 경중, 주차(主次)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서 나쁜 버릇을 극력 벗어나려고 하는 공통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무릇 인류가 '모태로부터 가지고 온' 나쁜 버릇은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뀌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몰래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의 금기이다. 금기라는 것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이라면 사람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이라면 그것은 다시 한번 사람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모주석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귀한 것은 스스로를 아는 밝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것을 해낸다는 것은 어렵다.
필자도 허영심이 있다. 필자는 몇개 대학의 객원교수를 겸직하고 있다. 사실, 거기서 급여를 주는 것도 아니고, 회의를 열더라도 거마비도 주지 않는다. 필자는 그래도 좋아하고, 기꺼이 참석한다. 왜 그런가? 허영심 때문이지 뭐. 듣기에 좋지 않은가! 만일 어떤 사람이 필자보고....가지나 팔고...감자나 파는 객원잡상인을 겸직하라고 한다면, 필자는 분명히 거절할 것이다. 듣기에 안좋으니까.
전에 한 성공한 사람이 청중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는데, "내가 성공한 것은...모두 허영심이 나를 계속 앞으로 나가도록 이끌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말도 잘했고, 청중들도 좋아했다. 이것은 필자가 처음으로 공개장소에서 누군가가 드러내놓고 허영심을 얘기하고, 허영심을 좋게 얘기하는 것을 들은 것이었다. 필자는 솔직히 놀랐다. 이후, 필자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허영심이 있는가 없는가? 답은 있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일찌기 작품이 상을 받거나 호평을 들었을 때,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일찌기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식은 땀이 났다. 그리고 실질적인 의미는 전혀 없는 사회의 직위를 놓고 따지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모두 허영심 때문이다. 그 성공한 사람이 딱부러지게 말해주었다: "사람이라는게, 만일 조그만큼의 허영심도 없다면, 살아서 뭐할 것인가?"
소위 '허(虛)'라는 것은 부실(不實) 즉,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소위 '영(榮)'이라는 것은 '영예'라는 것이다. 합치면 바로 실제적이지 않은 영예 즉, 영예의 짝퉁인 것이다. 필자가 겸직하고 있는 대학교수는 바로 '실질적이지 않은 영예'이다. 필자가 재주가 있다면, '교수'가 되는 게 문제이겠는가?
허영의 모든 표현은 영예에 대한 추구로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허영은 인류의 영예에 대한 추구로 나타나고, 인류는 영예에 대한 강렬한 점유욕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장단점이 반반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 더욱 강렬하게 추구할수록, 그의 허영은 더욱 드러날 것이다. 어느 방면에서 성취가 크면 클수록, 허영도 점점더 억제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금방 문단에 등장해서 막 몇편의 '두부조각'을 발표해놓고도 사람들에게 '시인' '작가'로 불리면 좋아하고, 금방 부과장, 과장이 되고도 다른 사람들이 '영도'라고 불러주면 좋아한다. 이처럼 체면을 잃는 것이 분명한 행위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모두 허영의 인질이다.
통상적인 상황이라면, 한 사람이 칭호에 대하여 따지는 정도에서 그의 허영심영역의 강약이 드러난다. '사장'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막 재산측면에서 뭔가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지식방면에서 결핍되어있다는 열등감이 막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인각(陳寅恪)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 '정교수'로 부르든, '부교수'로 부르든 전혀 따지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경쓴다. 필자는 계공(啓功)선생을 존경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순구류(順口溜)"는 좋아하지 않는다: "육십육, 부교수..." 그는 그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실제는 신경을 썼던 것이다. 정말 신경쓰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초탈(超脫)하기가 아주 어렵다. 세계에 완전히 초탈한 사람이 있을까?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필자가 본 적은 없다. 필자가 알고 있는 많은 지위있고 명성있는 사람들은 직함에 대하여, 호칭에 대하여, 여러가지 헛되고 실질은 없는 것에 대하여 모두 신경을 쓴다. 너는 반드시 그의 가장 높은 직위를 불러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속이 좀 좁은 사람을 만났는데, 네가 그의 직함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너를 평생 미워할 것이다. 이것은 논리이다.
백선용(白先勇) 선생은 한 가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하루는 몇 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왔는데, 개략 10여명이었다. 당연히 모두 신분이 있는 관료들이었다. 절대로 고구마를 굽거나 양꼬치를 파는 사람은 아니다(고구마를 굽거나 양고치를 파는 신사숙녀분들은 따지지 말아주고, 화를 내지 말아주기 바란다. 당신은 분명 문을 드나들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삼육구로 등급이 나뉘어 있다. 이것은 필자가 정한 것도 아니고 백선용 선생이 정한 것도 아니고, 사회가 정한 것이다.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시행하려면 안되는 것이다). 그는 일어나서 손님들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는 관직의 고저에 따라 가서 권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담배를 꺼내서 권했다. 어떤 사람은 맞대놓고 거절했다: "난 담배 안피웁니다!" 손님이 간 후에,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일러주었다: "넌 순서를 어겼다. 무슨 순서냐? 바로 관직의 서열이다. 네가 그들의 논리를 어겼으므로 그들이 너에게 면박을 준 것이다"
무엇이 순서인가? 무엇이 논리인가? 만일 백선용의 각도에 선다면, 그건 헛소리이다. 그냥 담배 한개비 권하는 것 아닌가? 피우고 싶으면 피우고 피우기 싫으면 말면 되는 것이다. 됐냐? 됐다. 진짜 됐다. 순서? 논리? 사실 그건 허영심이 만들어낸 것이다. 네가 나의 신분을 알아주어야 한다, 네가 왜 계장에게 먼저 권한 후, 과장인 나에게 권하는가? 각설하고, 우리가 잘 아는 업계에 현재 많은 작가가 있다. 모두 자기가 일급작가라고 강조하지 않는가? 패를 만들어서 목에 걸고 길거리를 자랑스럽게 다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지 않은가? 일급작가가 뭔가? 그저 너의 급여가 이급작가보다 좀 더 많다는 것 아니냐? 네가 쓴 글도 일급인가? 어떤 사람은 부교수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교수'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부를 잘하고 말잘하는 사람들은 아예 모둔 '부(副)'자를 떼어내 버린다. 장부국장이 있다면 모두 그를 장국장이라고 부르고, 이부서기가 있다면 모두 그를 이서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필자는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주석'이라는 호칭을 듣는데, 사실 하북작가협회 주석은 필자가 아니다. 과거에는 철응 여사였고, 지금은 관인산 선생이다. 필자보다 서열이 앞자리인 부주석이 한 둘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처럼 어지럽게 담주석이라고 부른다면 어느날 관주석이 들을텐데, 담모를 혼내주려고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모두 순서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어지럽히는 것이다. 부대는 규율이 필요하다.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 네가 '부'이면 '부'인 것이다. 장부연대장, 이부대대장, 유부사단장.
다시 주제로 돌아오면, 만일 허영심의 단계를 계속 올리게 되면, 허영심은 우리를 전진하게 해준다. 다만, 세계에 어떤 일은 허영심으로 해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여인의 허영심은 조금만 방종하면, 끝장이다. 필자는 한 여자고위간부를 보았다. 오십세 가량인 아무리 잘 보아줘도 그냥 '일강춘수향동류(一江春水向東流, 이욱의 우미인에 나오는 문구로 憂愁를 잘 표현한 구절로 유명하다)'인 모양이다. 그런데, 부끄럼을 모르는 부하들은 눈만 뜨면 치켜세워준다. 엉망으로 되는 것이다. 무슨 만묘가인(曼妙可人)이니, 무슨 몸매가 맵시있다느니, 청춘소녀라느니...가지각색이다. 말하는 사람도 느끼할 것이다. 재미있다. 듣다보니 귀에 박혔다. 즐겼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미모는 올라가는 것이 아님을. 만일 여인이 스스로를 조정하는 것을 거부하면, 미모는 갈수록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때 허영이 끼어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끝도 없는 번뇌가 시작된다. 멍청한 짓이다.
글을 하나 보았는데, 외국인이 쓴 것이다. 이름은 잊어버렸다. 강청을 평론하면서, 작자는 강청이 극도로 허영심이 많은 여자라고 평가했다. 전국인민이 모두 그녀를 받들어야 했다. 누구든지 그녀에게 방해가 되면, 그녀는 바로 손을 봐주었다. 결국 자신이 영어의 몸이 되었다. 작자는 끝에서 탄식한다: "허영이 이 여인을 해쳤다." 작자는 아마도 강청의 정치적 야심은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작가의 허영심에 대한 사고는 전체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고 보인다.
사실, 허영심은 여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세상의 남자들도 전혀 손색이 없다. 자세히 생각해보라. 속속 자빠지는 고관들, 기업체경영진들. 탐욕을 빼면, 그들이 자제하지 못한 것은 허영심이다. 그것이 불위에 기름을 부은 것이 아니겠는가? 신문에서 보도하는 것을 보면, 한 영도는 십여명의 정부를 거느렸다고 한다. 그가 감옥에 들어간 후의 진술에 따르면, "사실 내가 다 쓸 수도 없었다. 그저 정부가 많으면 나의 허영시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분명히 황제노릇을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황제는 삼궁육원을 두지 않았던가?
누가 말했던가? '허영심은 악행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악행이 대부분은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말이 맞지 않은가? 이런 예는 정말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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