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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이해하기 어려운 중국인

by 중은우시 2008. 3. 31.

글: 이중천(易中天)

 

중국사람의 일은 말하기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부패(腐敗)를 보자. 중국인들이 부패를 좋아하는가? 당연히 좋아하지 않는다. 부패라는 말을 꺼내면, 중국인들은 누구나 이를 갈면서 미워한다. 뇌물을 주고, 뇌물을 받는 사람들도 정말 부패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뇌물을 받지 않더라도 쓸 돈이 충분하다면, 그는 왜 관직을 잃고 감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면서 뇌물을 받을 것인가? 만일 뇌물을 주지 않더라도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는 왜 자기 돈을 남에게 갖다 바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부패를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부패를 떠날 수가 없다. 사실상 많은 중국인들은 일단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먼저 생각하는 것이 관계를 동원하거나(拉關係), 뒷구멍으로 일처리하거나(走後門), 접대를 하거나 선물을 준다(請客送禮).  만일 모든 관리가 접대도 받지 않고, 선물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이 허전해져서, 도대체 자기 일이 성사될지 안될지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패에 반대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즉, 식사 한두끼를 대접하거나 담배 한 두개비를 선물하는 것은 허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두 좋아할 것이다.

 

이것이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공금으로 먹고마시는 것을 보자. 이것도 모두 반대하는 일이고, 모두 미워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사람을 불러서 같이 먹고마시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아마도 거개는 기꺼이 부름에 응할 것이고, 얼굴에는 득의의 기색이 나타날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그가 반대하는 것은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끼는데, 자기는 끼지 못한다는데 있는 것이다. 자기는 끼어들지 못하므로, 어쩔 수 없이 공금으로 먹고마시는 것 전체를 모두 반대해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중국사람은 말하는 것이 다르고 행동하는 것이 다른 것은 아니다. 또한 중국사람은 면전에서 다르고 배후에서 다른 것도 아니다. 다만 처세의 원칙과 법칙이 너무 많을 뿐이다. 왕왕 서로간에 모순도 발생한다. 조상이 남겨준 적지 않은 교훈들이 있는데, 이들 교훈은 서로간에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보자. 조상들이 우리를 가르칠 때는 사람으로써, "견의용위(見義勇爲, 의로운 일을 보면 용감히 행하라)", "노견불평, 발도상조(路見不平, 拔刀相助, 길가다가 불공평한 일을 보면 칼을 뽑아들고 도와주라)"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이렇게도 가르킨다: "소관한사(少管閑事, 관계없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 "각인자소문전설, 휴관타인와상설(各人自掃門前雪, 休管他人瓦上雪, 각자 자기 문앞의 눈을 쓸면 되지, 다른 사람 지붕위의 눈은 관여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관여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것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관여할지 말지를 그 일이 '상관없는 일'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지는가? 상관없는 일이면 관여하지 말고, 상관없는 일이 아니면 관여해야 하는가? 이러다보니, '견의용위'도 맞고, '수수방관'도 맞게 된다. 중국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 "남편 말을 들으면 남편 말이 맞고, 부인 말을 들으면 부인 말이 맞다(公說公有理, 婆說婆有理)" 즉,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이치에 맞게 말하는지 아닌지만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남편'인지 '부인'인지도 봐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중국인의 '국민성' 혹은 '민족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골치가 아프다. 어떤 한 두마디 말로 중국인을 개괄할지가 골치아픈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인은 강직하면서도 원활하고, 솔직하면서도 세상물이 들었고, 의심이 많으면서도 쉽게 믿고, 전형적이면서도 신축성이 있고, 실익을 따지면서도 의리도 중시하며, 예의를 숭상하지만 공중도덕은 결핍되어 있고, 중용을 주장하지만 극단으로 잘 치닫고, 근검절약을 찬양하지만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옛것을 잘 지키면서도 현대적인 것을 추구하고, 분수를 알면서 자족하면서도 졸부가 되기를 바라고, 향을 피우고 점을 보면서도 종교감은 없고, 잘 뭉치면서도 내부투쟁이 많고, 다른 사람을 잘 비꼬면서도 또 원만하게 마무리할 줄도 알고, 남의 일에 신경쓰지않으면서도 상관없는 일에 말간섭을 종하하며,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땅이 넓고 물건이 많고, 역사가 유구하고 5천년의 찬란한 문화가 있고, 세계역사상 최초로 부국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알거지가 되었고, 낙후해서 매일 얻어터졌었다. 결론적으로, 중국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중국인 자신들도 잘 알지 못한다.

 

사실,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잘못된 것만은 아니다. 만일 당신이 '말하기 어렵다'는 말로써 중국인을 형용한다면, 누군가 나타나서 바로 반대할 것이다. "말하기 어렵다고? 왜 말하기 어렵다는 말인가? 나는 말할 수 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말해줄 것이고, 말하는 것마다 이치에 맞을 것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그러나, 고개를 끄덕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그는 장삼이 말할 때도 고개를 끄덕이고, 이사가 말할 때도 고개를 끄덕이다. 왜냐하면, 장삼이나 이사나 모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삼과 이사의 관점이 일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이다. 그들의 말을 아마도 완전히 상반되어, 장삼이 한 말을 '남편말'이고 이사가 한 말은 '부인말'이 될 수도 있다. 하물며 중국에서는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 반드시 동의를 표시하는 것도 아니다(물론 반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경청한다는 것을 표시하거나, 예의를 표시하거나, 심지어 습관적인 동작일 수도 있다.

 

중국인의 일은 정말 골치아프다.

 

먹는 것을 얘기해보자. 중국인은 손님을 불러 식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남방과 북방이 모두 같다. 그러나, 어떻게 먹고, 무엇을 먹는지는 많이 다르다. 북방인이 손님을 청해서 식사할 때는 식탁에 요리를 가득 놓고, 접시를 겹쳐놓고, 그릇도 그릇위에 쌓는다. 그 요리들은 왕왕 닭 한마리, 오리 한마리, 돼지다리 한 짝 혹은 양다리 한 짝이다. 어쨌든 많이 먹고 많이 마신다. 남방의 요리접시는 작다. 요리의 양도 많이 적다. 거의 한 젓가락이면 없어질 양이다. 그러나, 모양이나 종류는 아주 다양하다. 한 마리의 닭으로도 여러가지 요리를 만들어낸다. 한 마리의 물고기로도 두번 세번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북방인들은 남방인들을 깔본다. 그들은 자잘하다는 것이다. 남방인들도 북방인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멍청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은 서로를 허위적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북방인들은 그렇게 음식을 조금씩 내놓아서 손님이 젓가락질도 못하게 만들면 어떻게 손님을 접대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한다. 그것은 손님을 제대로 접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방인들은 그러나 분명히 다 먹지 못할 줄 알면서 계속 요리를 내놓는 것은 사람에게 먹으라는 것인지 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허장성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허위적인가? 북방인들이 보기에 성심성의껏 손님에게 식사를 내놓아서, 손님으로 하여금 허리띠를 풀고 마음 껏 먹게 하는 것이 잘 접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남방인들은 실질적으로 대하며,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요리는 먹을만큼만 내놓으면 되고, 많이 내놔서 뭐할 것이냐고 생각한다. 만일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한다면 그렇게 많이 차릴 것이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요리를 내놓는 것은 손님을 밥통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먹을만큼만 내놓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남원북철(南轅北轍)"이다. 결과적으로 둘 다 자기가 실질적이라고 생각하고, 남은 허위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보라. 같은 중국인이지만, 남방과 북방은 많이 다르다. 중국인들이 어떻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