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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외국인들도 중국인의 분노에 적응해야 한다

by 중은우시 2008. 6. 22.

글: 삼세수(三歲獸)

 

최근 중국은 막 전면적인 "신봉쇄시대"에 들어간 듯하다. 루이비통부터 까르푸까지, 샤론스톤부터 쿵후팬더까지. 풍파 하나가 가라앉기도 전에 새로운 풍파가 일고 있다. 국부에서 전국으로, 다시 전국에서 국부로, 짧은 몇 개월동안 마치 오랫동안 눌려왔던 억울함이 순식간에 폭발한 듯하다. 중국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세계의 곳곳으로 퍼져갔다.

 

처음으로 봉쇄를 느꼈던 것은 대만의 유명한 모 여가수였다(등리쥔-鄧麗君을 가리킴), 당시 그녀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소위 대만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중국대륙의 신문국, 광전국은 일치하여 그녀를 봉쇄했다. 월내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누렸던 그녀는 순식간에 대륙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근 1년동안 텔레비전, 신문, 방송에서 이 가수에 대한 한마디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별로 믿지 않았는데, 나중에 친구가 방송국에 실습을 하러 갔다가, 생방송실의 벽에 "XXX가수에 관한 여하한 노래나 소식의 방송엄금"이라는 글이 붙어 있다고 했다. 비록 나중에 국면이 점차 완화되기는 했지만, 이 가수의 대륙에서의 시장공간은 이미 예전만 훨씬 못하게 되었다.

 

만일 당시의 봉쇄는 정부채널이라고 한다면, 최근의 봉쇄사건은 주인공이 바뀌었다. 일부 국가의 매체의 중국국면에 대한 집단의음(意淫, 정신적인 마스터베이션)은 마침내 조용히 지내던 중국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전국적인 브랜드봉쇄도 좋고, 수퍼마켓봉쇄도 좋다. 민중들이 처음으로 전면에 나선 것은 사상유례가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앞장서서 반대의견을 내기도 한다. 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등이다. 필자는 또 다른 각도에서 이것은 중국의 민주적인 분위기가 한단계 더 발전한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시할 줄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표현방식에서 폭력은 지지하지 않는다.

 

중국유학생이 각지에서 성화를 보호하다가, 크고 작은 폭력충돌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폭력사건은 가장 관심을 끌었다. 한국매체는 중국학생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심하게 비난하고 분개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필자는 생각을 해봤다. 설마 우리의 표현방식이 정말 잘못되었단 말인가? 설마 이 애국심을 그렇게 이해해주지 못한단 말인가? 그런데, 최근 한국민중이 미국소고기수입으로 인한 사건으로 경찰과 무장충돌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한국에서 최근들어 비교적 엄중한 민중과 경찰의 충돌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알 수 있었다. 사실 애국의 열정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단지 우리가 표현할 때는 쉽게 감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여하한 폭력행위도 결사코 반대한다. 무슨 이유에서이든지간에. 그러나, 사룐스톤사건이 일어난 후, 어떤 사람은 중국인의 이러한 분노에 반대했다. 심지어 아무런 폭력행위도 수반하지 않은 분노에 대하여도 한한과 같은 사람들은 반대하였고, 중국인들은 관용스러워져야 한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나도 그 말이 맞다고 여겼다. 그리고 쿵후팬더를 금지하자는 목소리가 커질 수록 나는 그럴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새로 살펴본 후에 나는 돌연 깨달은 것이 있다: 왜 우리가 항상 다른 사람에 적응해야 하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왜 중국인의 분노에 적응해주지 않는 것인가?

 

여러 해동안, 우리는 서방을 어떤 모범으로 삼았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No'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데 이미 습관이 되었다. 여러 각양각색의 랭킹에서 중국인은 항상 열세에 처했고, 이런 저런 나쁜 근성, 나쁜 성격이 지적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런 비난과 질책에 습관이 되어버린 것같다. 기분은 영 더러우면서도. 스필버그가 갑자기 북경올림픽을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였을 때도, 중국인들은 이 대가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다지 적의나 반대를 드러내지 않았다. 파리의 라파이예트백화점이 중국인들을 차별대우할 때도, 그저 보도를 좀더 늘였을 뿐이었다. 몇년동안 중국상인은 항상 유럽인들과 소송을 벌였고, 그들이 제정한 각종 법안, 중국제품수출제한, 라이터사건등등에도 중국인들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중국만두가 일본에서 모함을 받은 사건에서도 중국인들은 이로 인하여 일본인들을 더욱 욕하지 않았다.

 

바로 오랫동안 기가 죽어 지냈으므로,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뭐라고 하든 다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중국인들에 대한 오만과 무례는 갈수록 심해졌따. 그리하여 마침내 달라이라마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러한 집단의음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중국인들이 분노를 표시할 때가 되었다고. 까르푸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이 그다지 비이성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 까르푸를 문닫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다만 우리의 불매운동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고, 어떤 자들이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다. 샤론스톤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연예인들 예를 들어 리차드 기어같은 자들이 중국에 대하여 이런 저런 지적과 비난은 해도 되고, 설마 중국사람들이 그들을 거부해서는 안된단 말인가? 구미의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데모를 하면서 티벳해방을 요구해도 되고, 중국인들은 CNN을 반대하며 시위를 하면 안된단 말인가?

 

비록 쿵후팬더를 금지하자는데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는 그렇게 하는게 그다지 잘못되었다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는 그저 민중이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것이다. 구미의 국가에서 헐리우드영화를 거부하는 인사들이 아주 많다. 프랑스는 헐리우드영화를 제한하는데 이미 오래 되어서 습관화 되었따.

 

어떤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관용하도록 교육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에 적응하라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필자는 오히려 외국인들을 교육시키고, 중국인들의 분노에 더 많이 적응하게 해야 한다고 본다. 모두 사지가 멀쩡하고, 두뇌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전에는 우리가 너희에게 계속 적응해주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우리에게 적응해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