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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한중 "간도(間島)" 분쟁의 유래

by 중은우시 2007. 2. 2.

[중국인들은 간도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글입니다]

 

글: 심이흑(沈二黑)

 

중국인은 현재 일본과는 "조어도(釣魚島, 일본명 센카쿠열도)"를 놓고 투쟁이 격렬하다. 사실상 한국의 민족주의사조는 일본보다 훨씬 심하고, 영토분쟁도 훨씬 심각하다. "간도를 수복하자"는 것은 현재 한국에서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구호이다. 그런데, 중국의 일반인들은 이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저 일부 학자들만 이 문제를 연구할 뿐이다.

 

아래에서는 간단하게 한중간의 "간도"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간도"는 한국인들이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을 이루는 강인 도문강(圖們江, 한국에서는 豆滿江이라 칭함)의 이북, 해란강(海蘭江, 한국에서는 土門江이라 부름)의 이남인 중국의 연변조선족취락지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의 열광적인 민족주의자들, 사실상 갈수록 많아지는 한국인들은 간도가 한국 즉, 과거 조선의 영토였는데, 중국이 침략하여 점거한 것이므로, 반드시 이 토지를 수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명,청 두 황조때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 쌍방은 모두 양국의 경계선이 '압록강(鴨綠江)'과 '도문강(圖們江)'이라는 것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곳은 매우 황량하였으므로 쌍방이 자세히 측량해서 국경을 정한 것은 아니었다.

 

강희제때, 조선의 이씨형제가 국경선을 넘은 일이 발생하였고, 중국경내에서 살인하고 물건을 가져간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강희제는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서 순찰하게 하였고, 압록강, 도문강의 공동발원지인 장백산(백두산) 천지에 경계비를 세웠다.

 

1860년대이후, 중국의 동북지방은 국가간의 시비가 있는 땅으로 바뀌고 말았다. 제정러시아는 동북지방을 침입하여 점령하였다. 원래 동북은 청나라의 통치자인 만주족들의 "용흥지지(龍興之地, 황제가 발흥한 곳)"이었다. 절대로 중국의 내지인(한족)이 동북으로 이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 때는 주민을 보내어 변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동북이주금지정책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변방침입금지정책을 완화해 주었다. 결과적으로 대량의 조선주민들이 도문강을 건너 중국동북의 황무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들이 지금 중국에 사는 조선족의 원류이다.

 

1882년, 길림장군 명안(銘安)은 갈수록 많아지는 중국경내의 조선인들에 대하여 '운남의 묘족의 예'에 따라 관리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국왕인 고종(대원군의 아들, 민비의 남편)은 이 사람들에 대한 '쇄환(刷還)' 즉 귀환을 요청했다.

 

1883년, 당시 중국 돈화의 지방관은 조선의 지방관에게 서신을 보내어 "국경을 넘어와서 개간하는 유민들은....이번 가을추수가 끝난 후 즉시 귀국시키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유민이 전부 귀국하지는 않았다.

 

1885년, 조선의 고종은 중국의 예부에 다음과 같이 서신을 보냈다: "조선인은 그저 두만강(중국에서 부르는 도문강)을 건넜을 뿐이고, 중국과 조선의 경계인 토문강(중국에서 부르는 해란강)을 건넌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현지의 개간민들을 '쇄환'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간도분쟁의 시작이었다.

 

1885년 4월 내지 5월, 쌍방은 제1차 국경선조사를 진행하였다. 역사적으로 이를 "을유감계(乙酉勘界)"라고 부른다. 조선측은 두만강과 토문강은 별개의 강이고, 국경인 도문강은 바로 현재 중국경내의 해란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협상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만다.

 

1887년 9월 내지 11월, 쌍방은 다시 제2차 공동국경선조사를 진행하였다. 역사적으로 이를 "정해감계(丁亥勘界)"라고 부른다. 쌍방은 모두 '두만강(豆滿江)'과 '토문강(土門江)'이 모두 '도문강(圖們江)'에서 음이 바뀐 것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쌍방은 도문강의 정원(正源) 문제에 대하여 의견불일치가 있었다. 조선측은 홍토수(紅土水)라고 하였고, 중국측은 더욱 동남쪽에 있는 석을수(石乙水)라고 하였다. 그래서 쌍방(조선측의 당시 대표는 이중하)은 공동으로 지도를 그리고, 대청황제의 재정을 요청했다. 황제는 석을수라고 정했다. 그러나, 조선국왕 고종은 다시 이의를 제출했다. 그래서 이번 담판도 정식으로 결과를 맺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당시 중국과 조선의 쌍방이 인식을 같이 한 것이 있었다: 즉, 중국과 조선의 양국은 경계에 대하여 오늘날의 도문강(두만강)이고, 도문강/토문강이 하나의 강이라는 것은 인정했다. 즉, '간도'문제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1991년 1월 한국의 <<조선일보>>에는 사학자인 조활의 글을 실었는데, <<간도는 우리나라의 영토이다. 수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제목이었고, 한국백성들에게 이중하(李重夏)를 민족영웅으로 소개했다. "오만한 청국대표들은 우리측 대표를 협박했다...이에 대하여 조선측의 토문감계사인 이중하는 탁자를 치고 일어나 높이 소리쳤다.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국토는 줄일 수 없다' 이로써 청국대표의 기세를 꺾었다. 그래서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사실상, 이중하는 '일강설(一江說)"을 인정했을 뿐아니라, 경계획정의 지도에서 서명하였다. 이 지도는 아직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회담 자체도 결렬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우익은 억지를 쓰고, 없는 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이로써도 잘 알 수 있다.

 

1894년, 중일양국간에 조선문제와 관련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중국이 대패했고, 조선에 대한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했다.

 

1897년,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개명한다.

 

1903년 3월 내지 10월, 러시아사람들의 지지하에, 한국인들은 수차에 걸쳐 중국국경을 넘는다.

 

1904년 4월, 국경침범이 최고조에 달한다. 한국의 "간도보호사" 이범윤(李範允)은 5,6천의 사병을 이끌고 도문강(두만강)을 넘어 중국내륙 100여리를 진입한다. 당시 중국의 연길청 동지인 진작언(陳作彦)이 타격을 가하여, 한국인들은 대패하여 돌아간다.

 

1905년, 러일전쟁후,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다. 일본과 한국은 <<을사보호조약>>을 맺는다.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9년, 일본과 중국은 중국과 조선의 국경문제를 협상하고, 쌍방은 <<도문강중한계무조관>>을 체결한다. 거기에는 명확히 도문강(두만강)이 중한양국의 경계임을 명시하고 석을수를 강의 원천으로 규정하였다.

 

이로써 중한간에 수십년간 끌어오던 국경문제는 해결되었다. 나중의 "만주국"과 조선의 국경, 중국과 북한의 국경도 모두 변경된 바 없다.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소위 "한강의 신화"를 이룬다. 한국의 우익민족주의가 머리를 들기 시작하면서 다시 "간도"문제를 끄집어 냈다. 1978년 1월 1일, <<한국일보>>는 서정철(徐禎哲)의 시리즈그림글 <<신년전시 한국의 옛모습>>을 싣는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영토인 간도를 중국인에게 팔아먹었다고 적었고, 그래서 반드시 수복해야 한다고 적었다.

 

같은 해 한국은 "영토회복"운동이 벌어진다. 간도문제는 바로 핵심내용이었다. 이 학파의 안호상(安浩相)의 주장은 해외기담이라고 할 만하다. 그는 한국역사상의 백제왕국(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오늘날의 한국 전라도 일대라고 본다)의 영토는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며, 남으로 중국절강의 소흥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한다! 심한 것은 한국의 청년들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의 역사만화에는 자주 월주(越州, 소흥)가 등장한다. 소흥은 역사상 계속 중국의 진나라, 오대, 수, 당이 관리해았는데, 어찌 백제의 영토가 될 수 있단 말인가?

 

1980년대이후, 한국측면에서 "간도"에 관한 글은 끊이지 않았다. 중국학자도 이에 반박했다.

 

"간도"문제는 아마도 중한관계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