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초(越楚)
기련해(紀連海)는 우(禹)임금에 관하여 입을 놀렸다가, 많은 공격을 당하고 있다. 본인은 그 논쟁에는 흥미가 없다. 첫째는 역사상 우라는 사람이 존재하였는지에 대하여도 아직 정설이 없는데,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의 혼외정사에 대하여 싸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둘째는 기련해가 말한 요희는 '무산신녀'인데, 우가 거둔 것은 '신내(神奶)'였다. 신화전설일 뿐인데, 심각하게 따질 게 뭐 있겠는가? 필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대우치수(大禹治水)"가 역사인가 신화인가의 점이다.
복잡한 사서전적을 정리해보면, <<사기>>, <<상서>>, <<시경>>이든 <<수경주>>, <<산해경>>, <<회남자>>등이건, 모두 대우치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세번 집문앞을 지나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어약용문(鯉魚躍龍門)"등등이 모두 우임금에서 유래한 것들이다. 그리고 중국대륙에는 수십군데 우임금과 관련되는 유적지가 있다. 마치 우임금의 존재와 하늘이 놀라고 귀신이 울고갈 치수운동이 이전에 확실히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그런데, 우임금이 치수를 했다는 것은 전설이고, 많은 의문이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최소한 후세에 세가지의 수수께끼는 남겨두었다.
수수께끼 하나: 역사상 우임금이 존재했는가?
우임금은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제왕절개수술을 통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게다가 곤(鯀)이라는 남자의 몸에서 태어난다. <<천문>>, <<산해경>>등에서는 모두 곤이 죽은 후 3년이 되도록 썩지를 않아서, 칼로 배를 가르자 우가 출생했다는 것이다. 우는 출생부터, 농후한 신화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임금이 존재했는지에 대하여, 고사변파(古史辨派)는 일찌기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낸 적이 있다. 근세에 고힐강 선생을 대표로 하는 의고파(疑古派)에 속하는 학자들은 역사상 우임금은 없었고, 우임금은 신격화된 사람이며, 사실 근원은 벌레(蟲)라고 하였다. 주요한 근거는 <<설문해자>>에서 우(禹)를 벌레(蟲)로 해석하는데서 찾는다. 또한 "우(禹)"의 하반부를 나누어 "벌레의 다리가 땅에 닿은 것을 표시한다"고 한다. 이 두 글자의 뜻으로 미루어볼 때, 도룡뇽과 비슷하다고 본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청동기에 있는 "리(螭)"의 문양을 보면 바로 도롱뇽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우'는 구정(九鼎)의 문양에서 나왔을 것으로 본다.
우의 부친은 곤인데, <<설문해자>>에서 '곤'은 '큰 물고기'라고 되어 있다. <<국어>>에서는 '곤'은 누런 곰으로 화해서 물속에 들어갔다고 되어 있으니 수생동물이다. <<회남자>>에서는 우가 누런 곰(黃熊)으로 화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우'와 '곤'은 동일한 유형으로 모두 수생동물이다. 또다른 설에 의하면, 치(鴟), 귀(龜), 응룡(應龍)등의 수생동물이 우를 도와 치수를 하게 된다. 치수신화에서 수생동물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도 그들과 동류라는 것으로 보아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전문가는 신화학원리에 추론을 더하여, 우임금은 신도 아니고, 구체적인 '개인'도 아니고, '충(蟲)'을 토템으로 하는 부락을 대표한다고 본다.
본인은 이에 대하여 개인적인 견해를 과감히 개진하고자 한다: 역사상 우라는 사람은 존재했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대우치수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는 고서적은 <<상서>> <<시경>>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청동기 <<제후종>>의 명문에서도 "함유구주, 처역지도"라는 내용이 있고, <<진공궤>>와 <<진공종>>의 명문에서도 '우'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에 따르면, 범문란 선생은 <<중국통사간편>>에서 '우는 고대의 제(帝) 중에서 가장 숭배를 받았던 인물'이라고 본다. 우라는 사람에 대하여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기. 하본기제이>>는 우의 출생, 치수경력에서 '동순수, 회계에 이르러 죽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에 선진고서적에서의 대우치수에 관한 여러 전설을 인용하고 있지만, 사마천은 학문태도가 엄격하였던 사학가이므로, <<하본기>>에서 우가 죽은 후의 장례장소, 그 지명까지도 밝히고 있다. 태사공 사마천은 '제후를 만나 강남에서 공을 논의하다가" 죽었고, "회계"에 묻혔다는데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만일 우가 원래 허구의 인물이라면, 태사공이 이처럼 묻힌 장소까지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오월춘추>> <<사기>>이든 <<죽서기년>>, <<월절서>>이등 모두 월왕세가는 우릉을 지키는 자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에서는 "월왕 구천은 선조가 우의 후손인데, 하후제 소강의 서자이다. 회계에 봉해져서 우의 사당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오월춘추. 월왕무여외전>>에서는 "우의 아래 6대에 제 소강이 있는데, 소강은 우의 제사가 끊어질 것을 우려하여, 서자를 월에 봉하고 무여라고 하였다" 재미있는 일은, 지금 소흥 대우릉일대에는 여전히 '사(姒)'라는 성의 부락이 있다는 것인데, 당연히 당시 능을 지키는 사람의 후예일 것이다. 만일 역사에 우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비어있는 무덤을 수천년이나 지켰다는 말인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당연히 이는 필자 본인의 일방적인 생각이다.
수수께끼 둘: 대우는 도대체 어느 강을 다스렸는가?
우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고, 그렇다면 도대체 우는 치수를 한 적이 있는가? 치수를 했다면 어느 강을 했는가?
대우치수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 고서적에 보인다. 당시의 생산력수준으로 보면, 대부분이 믿기 힘든 것들이다. 예를 들어, <<우공(禹貢)>>의 기록에 의하면 우가 다스린 하천의 수리공사량으로 보면, 현재 삼협댐건설공사에 투입되는 최선진장비를 사용한다고 가정하고, 순임금이 국고에서 이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수 있다고 가정하고, 통행증을 만들어 순임금이 관할하지 못했던 동이, 서융, 남만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13년만에 이처럼 방대한 공사를 완성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새로운 학설에 의하면, 대우치수는 강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해수의 침입을 다스린 것이라고 한다. 우시대에 해수면이 상승하여 해수가 육지로 거슬러 올라오게 되었는데, 세계적으로 바닷물에 잠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해수가 물러간 후, 지면은 진흙으로 덮여 처리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대우가 말한 물을 다스렸다는 것은 바로 이들 밭에 물길을 관리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공자가 말한 "진력호구혁(盡力乎溝洫)"(구혁은 밭 사이의 물길)과 대체로 부합한다는 것이다. <<맹자>>등의 고적에서 말하는 '수횡류(水橫流), 수역류(水逆流)등은 대체로 대규모의 해수침입때나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서욱생(徐旭生)의 대우가 공수(共水)를 다스렸다는 설에 찬동한다. 서욱생에 따르면, <<우공>>, <<국어>>, <<수경주>>등의 고적에 자주 출현하는 '공공(共公)', '공현(共縣)', '강수'등이 나오는데, 실제로 가리키는 것은 지금의 하남성 휘현 경내의 작은 강인 공수(共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위하(衛河)에 상당한다. 이것은 기수(淇水)와 함께 황하로 흘러들어간다. 이곳은 마침 황하가 굽는 곳의 북안이므로, 황하가 이곳에서 적지 않은 지류를 받아들이고 있고, 수량이 많으며, 평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므로, 수재가 발생하기 쉬웠다. 황하의 역대 수재는 거의 전부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우가 역사상 다스린 강이 바로 '공수'라는 이름의 작은 강이었다. '홍수(洪水)'가 원래는 전용용어였는데, 바로 '공수의 수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중에는 보통명사로 되었다. <<설문해자. 수부>>에는 "홍, 강수야."라고 되어 있는데, "강수, 즉 공수야"라고 되어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휘현 맹장유적지의 용산문화에는 대홍수의 흔적이 있다. 그 시기는 바로 4000여년전의 순,우시대와 일치한다.
수수께끼 셋: 고인은 왜 우를 신격화 하였는가?
우가 성공적으로 공수를 다스린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신인으로 존경받고 '대우(大禹)'로 칭해진다. 그리고, 하늘, 땅과 함께 일컬어진다. '천대, 지대, 우대'. 당시 사람들은 심지어 전체 중국을 우역(禹域)이라고도 불렀다. 그 뜻은 우가 다스리는 지방이라는 말이다. 강을 다스리고 홍수를 막는 바램을 모두 우에게 걸었던 것이다. 대우는 거의 무소불위의 신이 되었고, '대우치수'는 중국고대에 가장 성공적인 신화만들기가 된다. 대우는 점차 세상사람들에 의하여 신단으로 밀려 올라간다.
<<시경>>, <<상서>>, <<좌전>>, <<사기>>등에서 모두 우의 공덕을 기리고 있다.
<<사기>>, <<좌전>>, <<상서>>, <<시경>>, <<맹자>>, <<묵자>>, <<장자>>이든 <<수경주>>, <<산해경>>, <<회남자>>, <<태평광기>>, <<초사>>등이든 거의 모든 고적은 우를 신격화하는데 일조하여, 우는 철저히 신격화되고, 치수도 신비로운 신화이야기로 변모한다.
중국대륙에는 곳곳에 대우와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있다. 안휘 회원현에는 우허(禹墟)와 우왕궁(禹王宮)이 있고, 산서 하진현성에는 우문구(禹門口)가 있고, 산서 하현 중조산록에는 우왕성지(禹王城址)가 있으며, 하남 개봉시교외에는 우왕대(禹王臺)가 있고, 우현성내에는 우왕쇄교정(禹王鎖蛟井)이 있으며, 무한 귀산 동산에는 우공기(禹功磯)가 있고, 호남장사 악록산에는 우왕비(禹王碑)가 있으며, 심지어 멀리 서남의 사천 남강현에도 우왕궁(禹王宮)이 있다. 하남 낙양에는 대우가 용문을 팠다는 전설이 있다. 이들 중국전역에 퍼져있는 우에 대한 유적은 민간의 우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는 동시에 중국고대의 공전절후의 신격화운동의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선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기(妲己)는 어떻게 구미호로 변모했는가? (0) | 2008.07.09 |
---|---|
범려(范蠡)에 대한 또 다른 해석 (0) | 2008.06.29 |
하희(夏姬) : 만인의 사랑을 받은 여인 (0) | 2008.02.21 |
묵자(墨子) : 역사상 최초의 흑사회(黑社會) 두목 (0) | 2008.02.11 |
모장(毛嬙): 중국고대의 제일미녀 (0) | 2007.1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