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삼파(何三坡)
묵자(묵자, 원명은 墨翟)는 어떤 사람인가? <<사기>>에 따르면 그는 송(宋)나라에서 대부(大夫)를 지낸 적이 있고, 공수반(公輸班)과 마찬가지로 노(魯)나라 사람이다. 그는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했고, 스스로 하등인(下等人)이라 자처하였으며, 그가 걸은 길은 완전히 풀뿌리노선이다.
젊었을 때, 그는 유가학설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러나 금방 유가는 예절이 너무 번잡하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죽은 사람에게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 규칙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힘든 일일 뿐아니라, 근본적으로 낭비적인 일이어서, 그는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유가를 포기하고 "주나라의 도(周道)를 등지고 하나라의 정치(夏政)를 사용하여" 묵가학설을 창건하고, 별도의 문파를 연다.
그가 별도의 문파를 연 후에, 도대체 무슨 일을 하였는가? <<사기>>에 나오는 말은 분명하지 않고, 중언부언하고 있다. 필자가 옛서적과 문헌들을 뒤져보고나서 내린 결론은: 그는 무공이 뛰어난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바로 중국역사상 최초의 흑사회(암흑조직 혹은 조직폭력배를 의미함)이다.
묵자의 이 흑사회는 완전한 조직시스템, 정치강령, 행동선언을 갖추고 있었다. 최고권위의 우두머리는 "거자(巨子)"라고 불렀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다. 묵자는 바로 제1기 "거자"였다.
오늘날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흑사회와는 달리, 심지어는 상반되게, 묵자의 이 흑사회는 기본적으로 천사집단이었다. 그의 구호는 겸애(兼愛), 이해(利害), 비공(非攻)이었다. 오늘날의 말로 바꾼다면, 박애, 상부상조, 전쟁소멸이다.
묵자의 주장과 그의 조직은 전체 전국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전성기에는 제자가 수천명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묵자(墨者)"라고 불리웠다. "단의방(短衣幇)"이라고도 불렀는데, 대다수는 사회의 저층출신이다. 평소에는 짧은 옷에 짚신(短衣草鞋)를 신고 무술훈련을 했다. 이들은 힘든 일을 하는 것은 낙으로 삼았다. 일단 약국이 위난을 겪거나, 군중이 곤란을 겪으면, 즉시 달려가서 구해주었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으며,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완전 결사대와 같은 조직이었다.
조직이 방대해지자, 거액의 비용이 들게 되었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묵자는 자력갱생했고, 모든 단의방의 조직원들을 기술이 뛰어난 기술자로 훈련시켰다. 이들에게 가구를 만들게 하고, 건축을 하게 하며, 방어무기를 만들게 했다. 전국시대에 그의 단의방은 백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염가의 목수였고, 부동산업체가 선호하는 건축노동자였다. 또한 전국에서 가장 신용있는 무기상이기도 했다. 그들이 생산하는 연노거(連弩車), 전사기(轉射機), 적거(籍車)는 전국시대에 화력이 가장 큰 중무기였다. 그러나, 그의 무기는 통상적으로 방어하는 측에만 팔았고, 침략자들에게는 공급하지 않았다. 아주 도덕적인 민영기업이었던 셈이다.
기원전 471년, 송나라의 병부에서는 공수반이 목비기(木飛機)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얻어내서는 이것으로 성을 순시하는 도구를 삼을 수 있겠다고 보고, 묵자에게 위탁하여 공수반보다 더욱 크고 더욱 화려한 목비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묵자는 바로 승락했고, 3년의 시간을 들여서 완성했다. 그런데, 시험비행을 하는 날, 목비기는 반나절을 날고는 떨어져 버렸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손해배상을 해주게 되었다. 제자들은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스승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무새를 하늘에 날게 하시다니요."라고 하였다. 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당연히 금활리(禽滑厘) 처럼 했어야 했다. 그는 1척의 나무로, 하루의 시간을 들여 차원(車轅)을 만들었고, 30석의 무게를 싣는다. 싣기도 많이 싣고 가기도 멀리 간다. 그런데 나의 이 엉망인 비행기는 3년만에 만들었는데, 하루도 못버티고 망가져 버렸다. 나는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야 했다"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그는 분명히 불가능한 일인줄 알면서도 계속 했다. 그와 그의 천사집단은 박애, 상부상조의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그는 인류가 겸애하고, 친한지 아닌지, 가까운지 먼지를 따지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스스로를 겸사(兼士)라고 부르면서, 유가에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별사(別士)라고 불렀다.
반고는 <<답빈희>>에서 "공석불난, 묵돌불검(孔席不暖, 墨突不黔)"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공자와 묵자는 모두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느라고, 공자가 앉는 자리는 따뜻해질 틈도 없고, 묵자의 구들은 시커멓게 될 틈도 없었다는 의미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묵자는 천사를 거부하는 시대에 살았다는 점이다. 그의 이상은 너무나 고귀했고, 비열하고 미천한 세상은 근본적으로 묵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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